불경 번역의 새 역사를 쓴 위대한 역경가, 동아시아에 대승 중관학의 공 사상을 전파한 사상가, 지혜 제일의 사리불이 재현했다고 일컬어지던 천재적 고승. 이 책은 4세기 중앙아시아 구자에서 태어나 5세기 중국 장안서 3백여 권의 불경을 한역하고 3천여 명의 제자를 키우며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던 구마라집의 일대기다. 

오늘날에도 〈금강경〉 〈법화경〉 〈유마경〉 〈아미타경〉 등 구마라집 역본 불경은 널리 읽힌다. 이해하기 쉽고 아름다우며 한문 투에 어울리는 운율이기 때문이다. 구마라집이 처음 번역한 대승 중관학의 논서 〈중론〉 〈백론〉 〈십이문론〉은 난해하지만 중요한 저작으로 지금도 손꼽힌다. 그는 대중적이고 간결하며 아름다운 번역어를 만들어 불학의 개념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단 여덟 글자로 공(空)의 핵심을 표현했다. 하지만 승려이되 승려가 아닌 자, 중국 불교사서 유일무이한 이교도, 불세출의 불학 대사이나 계행을 어긴 수행자로 보기도 한다. 동아시아 불경사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고승에 대한 평가치고는 모순되고 복합적이다. 구마라집은 파계승인가, 깨달음을 얻은 인물인가.

치욕의 삶 딛고 대승 공 사상 전한 사상가 
한역 불경의 새 역사 쓴 역경승 구마라집 
3백여 불경 한역 및 3천여 제자들 양성
파란만장한 삶 살던 구마라집의 일대기

 

구마라집 평전/공빈 지음/부키 펴냄/2만 5천원

이 평전은 정대(正大)하고 숭고(崇高)한 고승 일대기를, 〈진서〉 〈위서〉 〈자치통감〉 등 역사적 전거를 씨줄로, 〈고승전〉 〈출삼장기집〉 대소승경전 등 불교 전적을 날줄로, 그 사이를 문학적 상상력과 불학 사상으로 수놓으며 완성했다.

불경 전래사이자 실크로드 둘러싼 문화사
이 책은 4세기 중반(344년)서 5세기 초반(413년)을 살던 구마라집의 일대기다. 당시는 중국사에서 보면 정치 사회적으로 어지러운 시대라 새로운 철학과 사상이 절실한 때였고, 불교사의 시각에서 보면 중국의 초기 불교 이해가 한계에 다다른 때이기도 했다.

그런 시대, 그런 상황에서 구마라집은 역경가이자 사상가로, 또 큰 수행자로 활동했다. 그는 한역 불경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위대한 역경가로 기록된다. 구마라집은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대승 경전인 〈금강반야바라밀경〉 〈묘법연화경〉 〈유마힐경〉 등을 한역했다. 우리가 오늘 읽는 바로 그 문장, 그 뜻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동시에 구마라집은 동아시아에 〈중론〉 〈백론〉 〈십이문론〉 등 중관학의 공관(空觀)을 전파한 사상가였다. 또 중국에 선종이 태동하기 전 선경(禪經)을 번역해 초기 선법을 전한 시대를 앞선 수행자였다. 

그의 삶은 불교 전래의 역사와 함께한다. 공간적으로 그의 삶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로 이어졌다. 일곱 살에 사미승이 되어 십 대에 타림 분지와 파미르고원을 둘러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불교문화를 체험하며 불학을 배우고 명성을 떨쳤다. 사십 대에는 구자국을 떠나 중국 동쪽 변경 고장서 17년간 긴 유폐 생활을 보낸 다음 후진의 수도 장안에서 역경(譯經)과 강설(講說)로 홍법의 뜻을 이루었다. 그 과정을 시간적으로 보면 구마라집의 행적은 불학이 소승에서 대승으로 전환하고, 대승 공 사상이 동방으로 퍼져나가는 길잡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마라집 평전〉은 한 인물의 삶의 기록이자 불경 전래의 역사이며 실크로드의 시대 풍경을 담은 사회 문화사로서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서 책은 〈진서〉 〈한서〉 등의 역사서, 〈고승전〉 〈출삼장기집〉등 많은 승려들의 전기와 여러 기록물을 기초 중앙아시아의 찬란한 불교문화,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험난한 자연환경, 전란이 끊이지 않던 오호십육국의 상황, 장안 역장(譯場)의 생생한 모습, 강남 여산의 혜원과 보기 드문 불학 교류, 구마라집과 함께한 걸출한 제자들의 면면까지 4, 5세기 서역과 중원의 문화, 사회, 승단의 모습을 되살려 낸다. 
 

구마라집은 복잡한 특성과 매력지녀
“성품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고승전〉에 나오는 어린 시절 구마라집에 대한 성격 묘사다. 그다음에 이어진다. “그의 모든 행동이 수행자들에게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스스로 이해하는 바가 있어 남의 의심에 마음 쓰지 않았다.” 

구마라집은 복잡한 특성과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믿기 힘들 정도로 다사다난한 인생을 살았고, 수행자로서 겪기 어려운 치욕과 모욕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꺾여 뜻을 접지 않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숨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비구의 계율을 어겼다고 주변의 수군거림을 받을 때도, 세속의 권력자에 의해 파계할 때도, 무도한 전진의 장수 여광에게 조롱당할 때도, 음계를 어긴 스승에게 반감을 가지며 제자로부터 대우 받지 못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를 “천재는 제멋대로 행동하기 십상이고 소소한 규율을 닦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성격과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정신이야말로 학술 연구와 예술 창조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 구마라집이 말한 대로 한평생 홀로 엄격하게 계율을 지킨 자들 중에서 몇 명이나 불법을 크게 흥하게 했는가? 불교가 계율을 만든 근본 목적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데 있지 않고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갈고 닦아 아라한과를 얻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천재적 사상가이자 수행자의 면모 갖춰
“파계하지 않으면 우바굴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한때 구마라집은 지혜 제일인 사리불(부처의 십대제자)의 현신, 용수보살(제2의 붓다로 일컬어짐)의 재림, 우바굴다(인도의 제4대 조사로 아소카왕의 왕사)에 못지않으리라는 평을 얻었던 천재적 사상가이자 수행자였다. 하지만 그를 얻기 위해 두 번의 전쟁이 일어나고 그들에 의해 두 번의 파계를 했다.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가던 중 전진의 왕 부견의 죽음으로 황량한 땅 고장에서 십칠 년을 머물며 여광의 군사(軍師)나 하며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 전적과 불경을 읽었다. 육십 대가 거의 다 되어서야 장안에 와서 후진의 군주 요흥의 지원 속에 불경을 번역하고 강설하며 홍법의 뜻을 이루었다. 그 과정은 그 자체로 개인의 역사를 넘어 시대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구마라집이 겪은 계율을 어긴 수행자의 번뇌와 업장이 깊고 무거움에 대한 고통은 컸고, 그 고통을 대승 공관으로 속박에서 벗어나며 세상의 따가운 시선에 대처하는 의연하고 담담한 모습이 기록과 상상을 넘나들며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인도 중부에서 발생한 불교는 서북쪽 계빈, 간다라, 대월지 등을 거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림분지 주변 서역을 지나 중국에 전해졌다. 구마라집의 삶도 구자국을 기점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 중앙아시아에서 동쪽 중국 고장, 장안으로 이어졌다. 구마라집의 일생을 따라가는 여정에는 불법뿐 아니라 험준한 자연환경, 찬란했던 불교 사회의 모습, 서역만의 독특한 문화가 함께한다.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구자는 서역의 핵심 국가이자 물산이 풍부하고 불교가 흥성한 나라였다. 수도 연성에서 북쪽으로 사십여 리를 가면 “고차하의 서쪽 연안은 기복을 이룬 언덕이었고, 작리대사는 그 언덕 위에 서 있었다. 각 층의 건축과 금박이 칠해진 불당과 불탑 등은 언덕 위에 난데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세워져 있었고, 그 기세는 장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저 갈색의 언덕은 마치 황금색을 주조로 하는 거대한 주단(綢緞)으로 변해서 남쪽에서 시작해서 북쪽까지 대지를 덮는 듯했다”는 작리대사가 눈앞에 나타난다.

아홉 살 구마라집의 계빈 유학길을 가다 보면 수많은 구법승과 상인들이 다녔을 파미르고원과 인더스강을 만난다. “우전하의 양안은 사람 사는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사방은 온통 모래와 자갈뿐이었다. 가는 내내 마차 바퀴가 모래와 자갈에 끼이고 걸렸다. 냉기를 품은 매서운 칼바람은 뿌연 먼지를 몰고 왔다. 며칠 동안 큰 바람이 불었다. 모래와 자갈이 섞여 바람에 날렸고 말은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돌산에 있는 힘을 다해 겨우겨우 기어올랐다. 꼬박 반나절을 보내고 나서 마침내 비좁은 협곡 입구에 이르렀다. 입구 맞은편과 좌우 양쪽의 산봉우리 모습은 커다란 짐승의 새하얀 어금니 같았다. (…) 말이 풀을 뜯지 않고 머리를 들어 귀를 세운 채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았다. 바위에서 내려온 말몰이꾼 두 명이 바람을 맞아가며 밧줄을 단단하게 부여잡고 간신히 말들을 끌었다. 그들은 한데 모여 서로를 꽉 잡았다. 눈 깜짝할 사이 눈발이 거세게 몰아쳤다.” “벼랑에서 내려다 본 협곡의 물살 빠르기는 화살이 날아가는 듯했다. (…)그 강은 거의 상상에나 나올 법한 고난과 위험을 의미했고, (…) 정으로 쪼아 벼랑에 만든 통로에서 위아래로 칠팔백 개의 계단이 있었다. 한 시간쯤 후 일행은 마침내 높은 벼랑에서 신두하 강가로 내려왔다. 강 위로 가로놓인 긴 밧줄은 사발보다 굵었다. 굵은 밧줄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광주리는 십여 명 정도를 실을 수 있었다. 거센 바람이 계곡을 휩쓸었고 밧줄이 이리저리 계속 출렁였다.”
 

구마라집 역장은 홍법이자 학술 공간
구마라집의 역장은 번역과 강경이 이루어지는 홍법의 장이자 학술 활동의 공간이었다. “구마라집은 호본을 들고 중국어로 읽어 내려갔다. 경전의 원문을 번역하는 한편으로 뜻풀이도 했다. 사실 역장의 의학 사문이 모두 번역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국왕 요흥은 직접 〈대품반야경〉의 옛 번역본과 새 번역본을 대조하면서 어느 곳이 나아졌고 어느 곳이 부족한지를 살폈다. 혜공, 승략, 승천, 보도, 혜정, 법흠, 도류, 승예, 도회, 도표, 도항, 도종 등 오백여 명이 반복해서 불전의 바른 의미를 토론하고, 번역문의 뜻을 심의한 후에야 정본(定本)을 써서 완성했다. 이처럼 폭넓은 참여와 엄숙하고 진지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이 진행되는 토론 속에서 번역 작업은 진정한 학술 활동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승려와 속인이 모두 경건하게 한 구절마다 세 번씩 반복하면서 그 뜻을 새기고 정밀하게 추구하면서 성인의 뜻을 보존하는 데 힘썼다.” 

구마라집 번역의 새로움은 역장의 규모, 걸출한 제자들, 어학 수준의 차이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구마라집이 범어와 중국어의 언어적 특성을 깊이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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