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소자 유지동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 제주에서 만난 한 재소자가 떠오른다. 유지동 씨다. 나는 유 씨가 정말 밉지 않았다. 유 씨는 딸 운동화 값을 마련하던 중 사고로 사람을 죽였다. 

유 씨와의 인연은 다른 재소자 일로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시작됐다. 나는 양승부 변호사에게 유 씨의 사연을 들었다. 양 변호사는 당시 유 씨의 무료변론을 맡고 있었다.

딸 운동화 값 구하려다 살인
사연 알려져 각계 성금 답지
구명운동… 1년 6개월 뒤 출소
1988년 부처님오신날 특별사면


전북 무주가 고향인 유 씨는 1972년 제주로 들어왔다. 유 씨는 제주서 아내를 만나 3남매를 낳았다. 유 씨의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유 씨는 6년의 병고 끝에 생을 마감한 부인과 사별하고, 둘째딸마저 병으로 잃었다. 홀로 남은 유 씨는 어린 두 남매를 위해서 이를 악물었다. 유 씨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힘든 막노동도 마다않고 열심히 살았다.

그런 유 씨에게 1986년 9월, 큰 딸 유문임(당시 14세) 양이 다니는 학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문임이가 3일째 무단 결석했다’는 담임선생님의 전화였다. 유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하교 시간 무렵, 유 씨는 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유 씨의 딸은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며 귀가했다. 유 씨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딸에게 버럭 화를 냈다. 유 양은 왈칵 눈물을 쏟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자신의 운동화를 내밀었다. 

신고 있어도 발이 다 보이는 운동화였다. 너무 낡아서 다 떨어진 딸의 운동화를 본 유 씨는 가슴이 무너졌다. 문임이는 남학생들이 놀려서 학교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문임이는 아버지가 단칸방 월세를 내는 것도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마 아버지에게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일은 학교 가자, 문임아.”

유 씨는 내일까지 꼭 신발을 사주기로 딸과 약속했다. 운동화 한 켤레 값은 오천 원. 유 씨 수중에는 단 오천 원이 없었다. 유 씨는 지난 번 건넌방에 사는 이웃에게 3만원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건넌방 이웃은 폐결핵을 앓는 젊은 남자였다. 유 씨는 건넌방 사람에게 빌려준 돈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밤늦게까지 남자를 기다린 유 씨는 귀가한 그를 붙잡고 다짜고짜 돈을 달라고 채근했다. 남자는 “돈을 받으러 오기 전 미리 말을 해줘야 빌려서라도 준비할 것 아니냐”며 도리어 화를 냈다.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유 씨는 절박한 나머지 무작정 매달렸다. 뒤쫓아 들어온 유 씨를 보고 남자는 신경질을 냈다. 두 사람은 실랑이를 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어려운 살림이라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이었다. 유 씨를 밀친 남자가 하필이면 찬장 쪽으로 넘어졌다. 남자는 깨진 유리파편 때문에 뇌동맥 파열로 사망했다. 

유 씨는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됐다. 1심에서 10년형이 구형된 유 씨는 양 변호사의 무료변론으로 정상참작을 받아 3년으로 감형됐다. 하지만 유 씨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제주에 있는 남매와 떨어져야 했다. 문임이는 아버지가 옥살이를 하면서부터 학교를 그만뒀다. 유 씨는 두 어린 남매를 돌볼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바로 그때 유 씨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인연이 있는 불자가 유 씨 동네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미용사 양신순 씨를 유 씨에게 소개했다. 양 씨의 따뜻한 도움으로 유 씨 남매는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문임이는 낮에는 미용기술을 배우고, 밤엔 동려야간학교에 다니며 동생 유성훈(당시 10세) 군을 돌봤다.

이와 함께 나는 유 씨를 위해 구명운동에 나섰다. 나는 중앙일보 등 주요 일간지에 유 씨와 어린 남매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렸다. 1987년 12월 24일 ‘“아빠만 오시면 고무신도 좋아요”’ 제하 기사가 보도된 이후, 유 씨 가족을 위한 각계의 온정 손길이 줄을 이었다. 제주지역민 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생활비, 학비, 쌀, 운동화 등을 신문사로 보내온 것이다.

유 씨의 사연이 사회 전반에 알려지자, 법무부는 유 씨를 광주에서 제주교도소로 이감시켰다. 이 뿐만이 아니다. 유 씨는 복역 1년 6개월 만에 출소했다. 유 씨는 1988년 5월 부처님오신날 특별사면으로 다시 아이들과 지낼 수 있게 됐다.

출소한 유 씨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속죄라도 하듯이 무리해 일을 했다. 지병인 허리병이 도진 유 씨는 일을 나갈 수 없었다. 유 씨는 또다시 좌절했다.


그때쯤 유 씨의 이야기가 교도소에도 퍼졌다. 영등포교도소의 한 재소자가 몸 져 누운 유 씨에게 또 다시 온정의 손길을 내밀었다. 강도살인죄로 무기수가 된 오동규 씨였다. 오 씨는 교화위원인 나를 만나 지은 죄를 참회하는 모범수였다. 오 씨는 내게 영치금 100만원을 유 씨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스님 절에 다니는 신도가 제 이름으로 적금을 넣어준 영치금입니다. 기약 없는 무기수인 제게 희망처럼 느껴졌지요. 저보다 더 어려운 유지동 씨에게 이 돈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 씨가 전한 영치금은 정말로 유 씨에게 희망이 됐다. 출소한지 4년이 경과한 어느 날, 유 씨는 내가 있는 부산 자비사로 아이들과 함께 찾아왔다.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방을 얻었습니다, 스님. 작고 초라한 방이지만 우리 세 식구 나란히 발 뻗고 누울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습니다. 꼭 저희 집에 한 번 들러주십시오.”
 

유지동 씨는 딸 운동화 한 켤레 때문에 사고로 사람을 죽였다. 안타까운 유 씨의 사연이 알려지자, 각계서 유 씨 가족을 위한 성금이 모였다. 무기수 오동규 씨를 대신해 성금을 전달한 삼중 스님이 유 씨를 격려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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