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畵僧으로 초의 면모 확인하다

1865년 4월 29일 초의에게 보낸 소치 허련의 편지. 초의의 16나한도를 김정일이라는 사람에 빌려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겼다.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3)이 대흥사로 초의를 찾아간 것이 1835년경이다. 이 무렵 초의의 명성은 경향에 퍼졌는데, 이는 1831년 봄 홍현주의 별서 청량산방에서 열린 시회에서 그의 글재주를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진도 쌍계사를 내왕했던 소치도 익히 초의의 명성을 들었을 터다. 그러므로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불탔던 소치가 초의를 찾아 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초의는 대흥사를 방문해 자신을 찾아온 소치를 위해 한산전에 거처를 마련해 주고 불화(佛畵)를 가르쳤으니 그가 초의에게 그림을 배웠던 정황은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1839년 4월의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그런데 관음진영을 그리는 필법이 언제 이런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소. 경탄을 금할 길이 없구려. 대개 초묵법(焦墨法, 먹을 진하게 쓰는 기법)은 전하기 쉽지 않은 오묘한 진리인데, 우연히 허소치가 이어 드러냈으니 전해지고 전해진 초묵법이 또 그대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여겨집니다.

앞에 언급한 추사의 편지에는 불가에 이어진 불화(佛畵) 기법인 초묵법(焦墨法)은 초의를 통해 소치에게 전해진 내력을 언급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초의가 그림 ‘관음진영’을 황산 김유근(黃山 金根, 1785~1840)이 소장하려는 의사를 밝힌 점과 황산이 ‘관음상’의 하단에 손수 찬탄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는 사실을 초의에게 전한 셈이다.

조선 후기 서화가 소치 허련
대흥사서 초의에게 불화 배워
소치 작품, 선종 초묵법 함의

편지엔 초의가 보인 배려 담겨
소치의 고단한 삶 속에 버팀목


그렇다면 추사가 초의에게 이 소식을 전한 연유는 무엇일까. 아마 황산이 권문세가(權門勢家)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아들로, 그림에 대한 안목이 출중했기에 초의 그림에 대한 관심은 바로 “초의 그대는 선림예단(禪林藝團)의 이름다운 얘깃거리”가 되리라는 것이다. 더구나 황산이 초의가 그림 ‘관음상’ 끝에 글을 쓰고자 했다는 사실은 초의의 명성을 단번에 드러낼 것이라는 점도 강조된 것이 아닐까. 아무튼 초의 불화(佛畵)는 당시 이름이 있는 추사나 황산 등도 인정했음을 드러낸다.

한편 소치의 그림에는 선종의 초묵법도 함의된 것이다. 특히 소치가 자신의 그림 세계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재주나 열정뿐 아니라 초의와 추사라는 징검다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치가 두 스승에 대한 의리를 평생 잊지 않은 것은 이런 인연의 지중함 때문이었다.

이번에 소개할 소치의 편지는 1865년 4월 29일 초의에게 보낸 것인데 초의는 이 편지를 받은 다음 해에 열반했다. 특히 초의가 그린 ‘16나한도’를 김정일이라는 사람이 빌려달라는 내용과 소치의 어려운 상황도 함께 드러냈다. 편지의 크기는 42.3×29cm이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러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꾀꼬리 떼도 모두 나오는 이때 염려하는 마음, 더욱 간절합니다. 삼가 여쭙건대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법희(法喜) 청공(淸供)은 어떻습니까. 대도총림(叢林大都)이 무탈하시길 축원합니다. 저는 속세에 떨어져 더욱 고통스럽고 졸렬해졌습니다. 명궁(命宮)이 너무 싸늘하니 무엇을 속이겠습니까. 오직 아이의 병이 점점 회복될 희망이 있으니 기쁜 마음 비교할 수 없는데 오히려 조금 나아짐을 경계해야하니 곁에서 근심만 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에 김정일이 우연히 제가 있는 곳을 지나다가 기쁘게 손을 잡으며 이야기했지만 마음을 다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더욱 더 바쁜 와중에 자축(字)을 가져갔는데 과연 바로 스님에게 도착했나요. 또한 십육나한도를 빌려달라는 바람도 상세히 들으셨는지요. 편지로는 다 쓰지 못해 구두로만 전하니 오히려 이에 슬픔만 더합니다. 종제(從弟)가 나포에서 돌아갔는데 그 행차에 편지 하나가 없을 수 있나요. 반드시 편지를 가지고가서 저의 상황을 세세히 말씀드릴 겁니다. 예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1865년 4월29일 허련이 예를 표하며

雜樹生花 群畢出 此時懸誦益切 恭詢肇熱 法喜淸供若何 叢林大都無恙 祝祝 痴 濩落身世 去益苦拙 命宮之太凉 安可欺也 惟病兒稍稍有回蘇之望 情無比 而尙有少愈之戒 不得在傍爲憂耳 日前金正一 偶然過余 欣握話到 不能盡情 益緣之甚 而帶去字 果卽津致耶 且十六羅漢圖願借事 亦有詳及耶 未以書 只憑口矣 尙此凝耳 從弟自羅浦歸去 於其行可無一緘耶 必袖納而細道痴狀矣 不備禮 乙丑 四月 卄九日 許鍊 叉手

소치의 편지는 초의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하면서 늘 스승이 수행하시는 대흥사 총림이 무탈하기를 축원했다. 하지만 속세에 사는 자신의 처지는 “더욱 고통스럽고 졸렬해졌습니다. 명궁(命宮)이 너무 싸늘하니 무엇을 속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명궁(命宮)은 수명과 운수를 보는 별자리로, 생년월일의 방위이다. 명궁이 너무 싸늘하다는 것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도 쓸쓸하고 어렵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초의가 불화에 능했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 이 편지에 초의가 나한도를 그린 사실을 “얼마 전에 김정일이 우연히 제가 있는 곳을 지나다가 기쁘게 손을 잡으며 이야기했지만 마음을 다 드러내지는 못했습니다. 더욱 더 바쁜 와중에 자축(字)을 가져갔는데 과연 바로 스님에게 도착했나요. 또한 16나한도를 빌려달라는 바람도 상세히 들으셨는지요”라고 한 점이다. 초의의 ‘십육나한도’는 범해(梵海)의 시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다. 따라서 초의 불화에 대한 명성이 당시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소치의 편지는 몇 편이 더 전해진다. 1860년 3월 6일에 보낸 편지에는 부인의 상을 당한 자신의 슬픔 처지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예를 생략하고 말씀 드립니다. 마음이 온통 쏠려 있던 중에 스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삼가 살펴보니 서글픈 추운 봄에 법체를 보살핌이 중하시고 청공(淸供)도 자재하다니 구구한 마음 위로가 됩니다만 안 스님(眼衲)이 오랫동안 속인의 집에 있는 것은 인연을 함부로 한 근심 때문에 실로 민망할 만합니다. 이미 그러하니 즉 근일 공양의 절차는 누가 그것을 맡겠습니까. 더욱 그것을 위해 생각에 장애가 됩니다. 저는(心制人) 한 가닥 목숨을 구차하게 이어가니 문득 종상(終祥)이 지나면 하늘을 우러러 땅을 굽어보며 울부짖을 것입니다. 사람의 일이 더욱더 궁하여 1월 28일 또 아내가 죽는 슬픔을 만났으니 마음을 갑자기 어찌해야할까요. 도리어 다시 생각하니 즉 지금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금강보살이 한번 도의 길을 보고 진실로 크게 개오한 것인가. 너무 슬퍼하던 끝에 곧 막힘없이 확 트인 듯 함을 느끼겠습니다. 지난 번 일도 이미 끝났습니다. 또한 담제(祭)기일이 다가옴에 따라 빨리 지팡이를 들 수는 없습니다. 월여(月如)스님과 약속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별도로 계획할 뿐입니다. 감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도리어 부끄러움을 느낄 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갖추지 못했습니다. 삼가 감사 편지를 올립니다. 1860년 3월 6일 심제인 허련 올립니다.

省禮言 懸戀之餘 獲承禪 謹審春寒惻惻 法體衛重 淸供自在 區區慰誦 而眼衲之長在俗第 縱緣憂故 實爲可悶者也 旣然爾則近日供養之節 誰其任之耶 尤爲之碍念 心制人 一縷苟延 奄過終祥 俯仰叫號 人理益窮 而正月卄八日 又遭叩盆之慟 情悰如何 還復思量 則今焉解脫牢獄 金剛一見道路 寔大開耶 悼傷之餘 便覺豁如也 襄事亦已完矣 且緣期之取次來 當不得飄擧一&也 月如所約事 終始圖耳 貼何以送及耶 還庸感愧耳 餘不備 謹謝狀
庚申 三月 初六日 心制人 許鍊 狀上

1860년경 자신의 호를 심제인(心制人)이라 하였다. 그리고 초의와 관련이 있는 승려로 추정되는 안 스님이 무슨 연유에선지 “오랫동안 속인의 집에 있는 것은 인연을 함부로 한 근심 때문에 실로 민망할 만합니다. 이미 그러하니 즉 근일 공양의 절차는 누가 그것을 맡겠습니까. 더욱 그것을 위해 생각에 장애가 됩니다”라고 한 대목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소치는 아내를 떠나보낸 슬픔을 “사람의 일이 더욱더 궁하여 1월 28일 또 아내가 죽는 슬픔을 만났으니 마음을 갑자기 어찌해야할까요. 도리어 다시 생각하니 즉 지금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금강보살이 한번 도의 길을 보고 진실로 크게 개오한 것인가. 너무 슬퍼하던 끝에 곧 막힘없이 확 트인 듯함을 느끼겠습니다”라고 했다. 아! 슬픔이 지극하면 막힘없이 마음이 확 트인 듯함을 느끼는 것일까. 소치의 슬픔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소치의 편지에 “월여 스님과 약속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별도로 계획할 뿐입니다. 감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도리어 부끄러움을 느낄 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갖추지 못했습니다. 삼가 감사 편지를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실제 초의의 제자 월여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를 통해 소치는 초의의 제자들과도 막역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특히 초의가 보낸 감은 어려움에 부닥친 소치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 마음의 선물이다. 더구나 한양에 낙향한 후에 진도에서의 소치 일상을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이런 곤란함 속에서도 “오늘 막내아이가 아들을 낳았다는(添丁) 소식을 들었는데 이는 경사스러운 일입니다”라는 기쁜 소식도 있었으니 1859년 정월 초의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내용이다. 늘 소치의 고단한 삶에 위안을 주었던 초의의 따뜻한 배려는 속 깊은 스승의 인정이었고, 이는 소치의 버팀목이었다. 고통과 환희,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소치의 일상에 손자를 얻는 기쁨은 그의 답답한 마음을 씻어내는 청량제라고 하겠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