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趙州) 선사께서 하루는 임제사(臨濟寺)를 방문해 발을 씻고 있을 때, 임제 선사께서 다가와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서 오신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마침 노승이 발을 씻고 있는 중이니라”라고 답하였다.

이에 임제 선사께서 조주 스님에게 다가가 귀 기울여 듣는척 하니, 선사께서 “알면 바로 알 것이지 되새김질 해서 무엇 하려는고”라고 하자, 임제 스님은 팔을 흔들며 돌아 셨다.

제일구(第一句)서 깨치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라 했고, 제이구(第二句)서 터득하면 인천(人天)의 스승이라고 하였다. 듣고 바로 깨치면 제일구이며, 귀 귀울여 되새김질하면 제이구이다.

임제 선사가 하루는 발우를 갖고 탁발을 나갔는데, 한 집에 가서 대문을 두드리면서 탁발 왔다고 하니까, 노보살이 대문을 열고 나오며 임제 선사에게 “염치 없는 중이로고”라고 쏘아 붙이고 시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임제 선사가 “탁발하러 왔는데 어째서 한 푼도 주지 않고 염치없는 중이라고 하는고” 물으니, 그 보살이 대문을 확 닫고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머쓱해진 임제 선사도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임제 노장이 노파에게 허물을 보임으로써 그 노파의 빗장 관(關)의 ‘할’에 임제의 귀를 꽉 먹어 버리게 하고, 누구나 자성 안에 가득찬 천연무가보주(天然無價寶珠)의 문을 활짝 열어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임제 선사를 꼼짝 못하게 한 할망구의 제일 구이며, 그 유명한 임제탁발화(臨濟托鉢話)이다.

당나라 때 위산 선사에게 향엄(香嚴)과 앙산(仰山) 두 제자가 아침마다 문안을 드리는데, 하루는 앙산 스님이 문안 드리자 위산 선사는 벽을 향해 돌아누우며 말하길 “내가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그대가 나를 위해 해몽 해 보게나”라고 했다. 그러자 앙산 스님이 즉시 밖에 나가 세수 대야에 물을 떠다가 위산 스님 앞에 놓고 나갔다. 그 다음에 향엄 스님이 문안 드리자 앙산 스님과 똑같은 말을 하니, 스님은 즉시 밖에 나가서 정성껏 차(茶)를 달여와 바쳤다. 그러자 위산 선사는 “내 두 제자의 신통(神通)이 목련존자(木蓮尊者)를 지나가는 구나” 라고 하며 크게 칭찬했다.

생사(生死)서 벗어난 꿈을 깬 진여실상에서는 억지로 꾸미지 않는 순수한 평상심(平常心)이 지극한 도(道)이며, 그 행선(行禪)이 바로 ‘이 뭣고’인 것이다.

다음은 용성 선사와 전강 선사의 전신구(轉身口) 법거량이다.

전강: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용성: 영신아!

전강: 예

용성: 제일구를 일러 마쳤느니라.

전강: 허허(박장대소)

용성: 자네가 전신(轉身)을 못했네.

전강: 전신구를 물으옵소서.

용성: 여하시 전신구인고?

전강: 낙하여고목제비(落霞與孤鶩齊飛)하고 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입니다.


전강 스님이 “저녁 노을은 따오기와 더불어 날고 가을 물은 하늘과 함께 일색입니다”라고 하니, 용성스님이 아무 말 없이 방장실로 돌아갔다.

이환즉각(離幻卽覺)이라는 말처럼, 꿈을 여윈 제일구서 진성과 하나된 깨달은 경지를 보여 준 것이다.

오조 홍인 선사가 이르길 “무상보리(無上菩提)는 모름지기 언하(言下)에 제 본심을 알고 불생불멸하는 제 본성품을 보아서 언제나 만법에 막힘이 없으며, 일진(一眞)이 일체진(一切眞)이라 만경(萬境)이 스스로 여여하니 그 마음이 즉시(卽時) 진실(眞實)이니, 만약 이와같이 보면 곧 이것이 무상보리(無上菩提)의 자성(自性)”이라 했다. 그러니 만법이 모두 자기 마음속에 있음을 알고 자기 마음 속에서 진여 자성을 본다면 이 제일구 듣는 언하에 대오(大悟)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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