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은 여백. 그림=조향숙

 

우리의 내면에는 광활한 여백이 있습니다. 그 무엇에도 연연(戀戀)하지 않고 자아를 비움으로써 볼 수 있는 텅 빈 자리입니다. 그 여백은 자유롭고 걸림 없는 허공 같은 마음입니다. 불교는 비움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종교입니다.

쪹일본 메이지시대에 어느 대학교수가 난닌(南隱)선사를 찾아가 선(禪)에 대해 물었습니다. 스님은 교수에게 차를 대접하려고 찻잔에 차를 따랐습니다. 찻잔에 차가 넘쳐흘러도 스님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라보던 교수가 말했습니다.

여백은 무량광명불 자리
염불하듯 절하듯 겸손
‘나’ 비우면 모든 이웃 행복

스님, 찻잔이 넘칩니다.”

스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바로 이 잔처럼 그대는 자신의 견해와 지식으로 꽉 차 있어서 새로운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네. 먼저 그대의 잔을 비우시게. 그래야 진리를 체험할 수 있소.”

널리 알려진 이 일화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300만 독자들이 곁에 두고 있다는 <나를 찾아가는 101가지 선 이야기>에 실려 있습니다.

*자신의 견해와 지식에 집착하면 진리를 체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고(苦)가 생깁니다. 넘치는 찻잔을 비우듯 마음을 비우고 열어야 합니다. 고는 집착에서 나옵니다. 일체가 인연따라 생멸하는데 집착의 대상에 실체가 있다고 붙잡고 매달리니 좋고 나쁨의 분별이 나오고 번뇌가 일어납니다.

선과 악, 극락과 지옥,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욕구하면 업력이 생겨 끄달리므로 삶이 괴롭습니다. 이고득락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업력을 보는 기회가 생겨 분별과 욕구를 내려놓으면 이 세상에 고는 없습니다. 일심 법계에 분별 망상을 쉬면 여래와 함께 합니다. 처처가 행복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거운 짐을 들고 있다가 내려놓을 때 홀가분한 것과 같습니다. ‘나’라는 것에 국집하는 아만을 놓으면 무집착의 안락을 맛볼 수 있습니다. 칭찬에도 비난에도 연연하지 마세요. 연연하지 않으면 분별심이 사라집니다. 무상을 통찰하면 무착심이 나오고 무착심에서 이웃에 대한 자비가 나옵니다.

*놓고 비우기 위해 하염없이 몸으로 절 공양을 하고, 입으로 염불을 하고 마음으로 원력을 다지세요. 그렇게 닦으면 공덕이 생겨 만나는 사람들에게 염불하듯 칭찬을 하고, 절하듯 겸손해 집니다. 내가 비우면 만나는 인연마다 행복합니다.

수행한 만큼 원력이 건강해집니다. 몸 정진, 입 정진, 마음 정진의 원력이 꽃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를 주변에 있는 인연들에게 쓰세요. 물난리 난 곳에, 이웃돕기 ARS전화에 동참하면 부자현상이 생깁니다.

내 속의 나쁜 한 중생 한 중생을 소멸하려면 분수에 맞게 보시하세요. 선근 공덕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허공 영가에게까지 공덕을 나누시길 바랍니다.

이웃을 이익되게 하면 세세생생 업장을 소멸하고 복과 혜가 들어와 복혜쌍족하게 됩니다. 부처님과 같은 몸과 마음이 됩니다.

온전한 비움은 무량 광명이 상주하는 부처님의 자리, 내 안의 광활한 여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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