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을 잘 내면 부처고 한 생각을 못 내면 중생이다!

 

오계를 어기지 않고 지키려면

질문 선원에 몇 달 다니지도 않았는데 수계가 너무 받고 싶어 이번에 기초 교육을 받고 수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계를 받고 나니 ‘계를 설하실 때 물으셨던 5가지 항목을 정말 잘 지킬 수 있을까. 괜히 공부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 자신과 부처님께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오계를 어기지 않고 평생 동안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거는 이름이 종교지 사실은 어떻게 해야 인간으로 나올 수 있고,
나와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무엇을 해야 미래에 모두 공덕이 될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답변 계율을 지킨다 하면서 못 지키는 경우가 많죠. 단 오계도 제대로 못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관념으로 계율을 지키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계율을 지킨다 안 지킨다는 생각을 다 놓고 욕심과 집착과 관습을 다 놓아 버리게 된다면, 놓고 가는 도중에 우리가 계율을 지킨다 안 지킨다를 떠나서 그냥 자연적으로 계율을 지키는 거예요. 그렇게 한다면 계율 안 지키는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바닷물과 같고 허공과 같이 돼라. 바다에 별의별 물이 다 들어가도 그냥 한 바다의 물로 돌아가고, 이런 물 저런 물 따지지 않고 그냥 하나로 젖는다. 어떤 거든지 다 젖는다. 그래서 계율이라는 것이 우리가 지키려고 해서 지키는 게 아니라 탐심도 없고 집착도 없고, 남을 모함하지도 않고 둘로 보지 않기에, 일체를 내 아픔 같이 생각하고 내 몸같이 공심으로서, 계율을 지킨다 안 지킨다를 떠나서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지 않는 게 없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육바라밀에 지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이 있는데, 인욕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모든 게 마음에서 일어나는 건데 일어나는 마음을 꾹꾹 눌러 참는 게 인욕이 아니에요. 그냥 단순히 참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참는 것은 참다운 인욕이 아니죠. 놓는 것이 인욕이에요. 그 자체를 놓는 것이 인욕입니다. 그래서 찾으라고 하지 않고 놓으라고 그랬죠. 둘로 보지 않기 때문에 놓으라는 거예요. 네가 너를 찾는다면 둘이 되니까 그냥 놓아라. 너한테 보림해라 이겁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오계를 받고 둘로 보지 않는 마음으로 모든 거를 놓는다면 그대로 그것이 인욕이요, 참답게 계를 지키는 겁니다.

대부분의 절에서 업을 강조하는데

질문 대부분의 절에서는 업장 소멸을 해야 된다 하고 업의 강조를 많이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소멸하는 조상님의 천도재가 너무 중요하다면서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하고 그러는데 선원에서는 업장을 소멸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마음공부만 하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혼동이 옵니다.

답변 아이, 혼동할 거 없어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꼭 천도를 해야만이 좋은 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하면 마음이 안심이 안 되는 그런 근기를 가진 사람 앞에는 잘 차려 드려야죠. 안 그래요? 또 그렇지 않는 사람은 밥 한 그릇 놓고도, 자기 먹는 밥 한 그릇 놓고도 천도를 하고 또 남아요. 아, 사람 근기에 따라서 있는 거죠. 그러니 이것도 잘못되는 게 없고 저것도 잘못되는 게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또 이것 보십시오. 사람이 상을 크게 차려 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뭐뭐 뭐뭐 비싼 걸 사다 놨는지 싼 걸 사다 놨는지 그걸 다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게 사다 놓은 것은 혼백도 다 알게 되는 거죠, 자기가 알고 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데 며느리가 돈이 많이 드니까 이거 안 되겠거든요. 남편이 돈 십만 원을 주는 걸 가지고 오만 원은 떼 놓고 오만 원 가지고 가서 장을 다 봐 왔단 말입니다. “여보, 장 봐 왔소? 어머님이 잘 잡수시던 것도 사 오고?” 그러니까 “예.” 그러기에 아들은 그런 줄로 알고 좋아서 인제 그랬는데, 상을 차려 놨어요. 싼 거를 사다가 이렇게 해 놨거든요. 그래도 그 아들은 그것을 의심 안 하고 그냥 지극한 마음으로 했고, 며느리는 그렇게 싼 거를 그만큼 해 놨다는 거를 알기 때문에 시어머니 시아버지도 그만큼 차렸다는 거를 알고 있었다 이겁니다.

그래 그날 저녁 꿈에 “얘야, 네가 싼 것만 요렇게 해다 놨으니 지금 너의 할아버지도 모두 계신데 내가 가져갈 것도 없느니라.” 아, 그러거든요. 그러고 꿈을 딱 깼어요. 그래서 날더러 와선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이런 꿈을 꿨는데 어떡해야 하나요?” 그러기에 허, 내가 웃었어요. 세상에 자기 마음먹는 대로 조상도 알게 돼 있고 우주간 법계에서도 알게 돼 있고 보살도 알게 돼 있고 부처님도 알게 돼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겁니다. 또 아직 진화가 되지 않은 어떠한 짐승이 있다 하더라도, 그게 시각이나 촉각이나 후각을 통해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쪽에서 그만큼 아는 사람이 이것을 통해 보면 그쪽에서 그때서야 ‘아하!’ 하고, 사람의 마음을, 문을 열어 주니까 그쪽에서 알고 있는 겁니다.

그렇듯이 영령들도 그래서 알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천도시킬 때 여러분이 상 하나 차렸다고 해서 그런 것만 생각지 마시고, 이 모든 걸 둥글려서 마음의 원을 그려서, 원으로서 그 원심력을 생각하면서 둥글려 놓는다면 이 원 속에는 다 있지 않습니까? 일체가 다 있는데 아니, 뭐 그리운 게 있겠습니까, 거기? 예? 아니, 이 세계뿐만 아니라 전체가 다 있는데 모자랄 게 뭐 있겠습니까, 원을 그려 놓으면. 그 원심으로서 제사를 지극하게 드린다면 아마 가게도 도매상이고 또 어느 호텔이고 음식점이고 뭐, 그런 데로 아니 다니는 데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마음 쓰는 자손들의 영령들, 조상들은 그냥 항상 뷔페식 하는 데 가서 잡숫고 상점에 가서 항상 자기 가지고 싶은 대로 갖고 또 상점에 가서 자기 입고 싶은 대로 입을 겁니다, 아마. 벽도 없고 봇장도 없으니까. 물도 없기 때문에 건너갈 것도 없고 오고 가고도 없이, 시간 공간도 없이. 그러니 여러분이 마음을 넓게 쓰세요. 무슨 요거 하나 있다, 요거 차렸다 하면 영령들도 조상들도 요거 하나 차린 것만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좀 넓게 가지세요. 그리고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 질문하시는데, 그 모든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린 거지 업이 있다…, 내가 아까 얘기했죠. 생각을, 이 환상천을 훌쩍 뛰어넘고 또는 그러한 기복적인 생각에서 훌쩍 뛰어넘으세요. 과거도 없고 현실도 찰나 생활이니까 없고 미래는 안 왔으니까 없고, 아예 없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대로 좋게 생각하라. 좋게 생각하면 그대로예요. 아시겠죠? 쓸 것도 없고 씌울 것도 없는 겁니다. 부처님이 벗겨 주려고 애를 썼지 씌워 주려고 애쓴 건 아니에요. 그러니 우린 쓰지도 말고 누구 씌워 주지도 말고 그럽시다.

참다운 실천이 어떤 것인지

질문 “보이는 것만 가지고 학술적으로, 이론으로 따지고 예의만 지키고 도덕, 의리, 사랑 이런 것만 가지고 얘기했지 무(無)의, 즉 말하자면 근본을 모르고 산다면 진정한 마음공부를 할 수 없다.” 하고 큰스님께서는 항상 강조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룰 수 있는 참다운 실천이 어떤 것인지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답변 우리가 지금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잘되자고만 빌러 다녀서는 안 됩니다. 잘되는 게 있어야 못되는 게 있고 못되는 게 있어야 잘되는 게 있는 까닭에, 우리가 이렇게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만 있어서는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낮은 곳에서만 있어서도 공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반 이렇게 걸쳐 놓고 교차로를 넘나들면서 고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그저 ‘나는 한마음선원에 그냥 다닌다’ 이런 정도로만 생각하신다면 내가 섭섭하죠.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몇 생을 두고 거듭거듭 태어나면서 마음 졸이고 모든 것을 버려서, 이렇게 고구마 같고, 난장이 같고, 또 하나도 보잘것없이 못난 이런 사람으로 태어나게 된 것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렇게 태어날 수도 있었다는 거를 여러분이 좀 더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상 사람은 마음대로 잘나게 태어날 수도 없고 못나게 태어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진해서 못나게 태어난 것도 재주덩어리 아닐까요? 허허허….

그전에도 말씀드린 거와 마찬가지로 진리도 하나요, 부처님 법도 하나니까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원리로 보면, 여기 여러분 수만 명이 다 깨친다 하더라도 일불(一佛)이며, 일법(一法)이며 바로, 차이 없는 도리인 둥근 원리입니다. 이런고로 우리가 좀 더 생각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생각해서, 일을 할 때나 잠을 잘 때나, 또는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항상 자기 뿌리를 잊지 않을 것을 자기 뿌리에 맹세하는 반면에 자기 싹은 열심히 뛰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내가 예전에 이런 말을 했죠? 부처님이 안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할 테니 너는 뛰어라.” 이러셨다구요. 그 말이 보통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지금 그럭하고 가시는데요, 여러분은 패기가 없어요. 과감히 뛰어넘을 줄을 몰라요. 생각해 보세요. 더 있다 죽으나 덜 있다 죽으나, 이따 죽으나 또 먼저 죽으나 죽는 것은 한 번, 똑같이 죽어요. 하늘이 무너져도요. 그런데 뭐가 두려워서 뛰어넘질 못합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마음인데 말입니다. 죽으나 사나 뛰는 마음 자체가 바로 피안으로 넘어서는 그런 도리입니다. 한 생 한 생을 이렇게 살면서 ‘이거를 이렇게 하면 어쩌나, 저렇게 하면 어쩌나’ 하기 때문에 넘지 못하는 분들이 아주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결사적으로 이걸 해야 한다는 거, 결사적으로 이걸 알아야 한다는 것이 왜 그런가? 여러분이 각각 소임을 다 따로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교직이면 교직, 회사면 회사, 장사면 장사 이렇게 죄 제가끔들 다 가지고 있는 소임에 따라서 내가 자꾸 터득을 하면 그게 개척이고, 그게 계발이고, 그게 바로 나를 내가 승화시키는 길입니다. 억지로 높은 자리를 뺏어서 올라갈 양으로 애쓸 필요 없이, 자기가 맡은 소임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과정에서, 누구나가 다 그렇게 해 나가셔야 발전이 있는 겁니다.

발전이라는 것은 마음의 발전을 말합니다. 마음의 발전이 되면 스스로 행도 발전하게 되므로 그것은 바로 여러 사람들에게 다 좋은 일입니다. 그걸로 인해서 또 천차만별의 소임이 다 발전한다면 그 뒤에 발전을 못하고 가는 사람들도 덩달아 다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몇 사람이 연구하고 발전시키면서 나간다고 해 봅시다. 그 연구진들이 제가끔들 연구하고 토론을 해서 그것이 이 세상에서 보람 있는 연구가 된다면, 예를 들어서 열 사람이 열 가지를 연구했다면 그 열 가지 연구한 걸로 인해서 이 세계가 다 살 수 있는 그런 일이 생깁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거는 이름이 종교지 사실은 어떻게 해야 인간으로 나올 수 있고, 나와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무엇을 해야 미래에 모두 공덕이 될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일체 만물만생이 모두 공생(共生)이면서, 공체(共體)면서, 공심(共心)이면서, 공용(共用)이면서 공식화(共食化)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그만 거든 큰 거든 한 번씩은 다 돼 봤다고 생각합니다. 돼 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겠습니까? 계단을 하나 하나 딛고 올라오지, 그냥 밑에서 날아서 올라오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나가 그렇게 한 계단 한 계단 딛고 올라오셨을 겁니다. 이렇게 모두 첨단의 위치까지 다 그냥 한 발 한 발 딛고 넘어왔단 얘깁니다.

이렇게 한 걸음씩 여기까지 올라온 고등 동물로서 어떻게 실천을 해야만이 진짜 사람으로서 일체 만물을 다 먹일 수가 있고 되남게 할 수 있는가? 이 소리가 “떡 하나를 가지고 이 세상 만물을 다 먹이고도 떡 하나가 되남더라.” 하는 소리거든요.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지마는 모두 그 뜻을 한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말로만 그렇게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우리가 실천을 하는 데는 유(有)의 법이나 무(無)의 법이나 똑같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똑같이 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어야만이 그게 아주 옳은 법이라고 봅니다. 그게 실천이 되려면 여러분의 생각이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해야 합니다.

기복으로 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 저는 이 마음공부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저 자신과 회사에 많은 도움이 되게끔 원을 내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실천이 되는 것에 대해서 저 자신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에 맡겨서 하나하나 체험해 나가면서, 기복 신앙이라는 데 대해서 상당히 혼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 것이 과연 진짜 자성불에서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잘되게 해 달라고 기복으로써 비는 것인지 헛갈립니다.

답변 이 원이라고 하면 언뜻 둥근 것이 떠오르죠? 그래서 원심을 낸 거죠. 한마음이 된 거죠. 한마음으로 구성해서 통신이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냥 이렇게 공부하는 거 같지만, 이거는 심성의학이기도 하고, 과학이기도 하고, 천문학이기도 하고, 천체물리학이기도 합니다. 그건 왜냐? 내가 그 몸속에 있는 의식과 모두 합쳐 한마음을 냈습니다, 한마음으로. 원이라는 그 말이 한마음이란 뜻입니다. 그래 한마음을 냈는데, 한마음으로 내 가지고 보니까 바깥 경계도 한마음으로 되돌아가더란 얘기죠. 안에서 한마음이 다 이렇게 한다고 말을 할 땐, ‘원자에서 입자로 화해서 다 조절을 한다, 한마음으로.’ 내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이건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한마음을 냈는데 그것이 어떻게 비는 겁니까? 이 내 마음속으로 하는 거는 비는 게 아니고, 바깥으로 찾는 게 비는 거고 기복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주인공한테 찾는다는 것은 한마음으로 중심에 그 원을 세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원을 세운 그 마음 한생각이 입자로 화해서, 즉 말하자면 통신이 되면, 먼저 한 찰나에 대뇌를 통해서 중뇌에서 책정을 합니다. 그리고 사대(四大)로 통신이 되면 그 모든 입자들이 다 한마음으로 구성이 돼서 제각기 또 벌어집니다. 일을 할 때 똑같은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요거는 말을 해야 될 일, 요거는 또 사람의 마음을 움죽거려야 될 일 등, 이렇게 각각 나가서 자기 소임을 완수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천부적으로 일체를 다 구족하게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다 구족하게 가지고 있단 얘깁니다. 내가 그렇게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구족한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일러 드리는 겁니다. 당신네한테 구족하게 있으니까, 그렇게 통신이 되게 해서 그렇게 해라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안 되고 배깁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금 속마음으로 ‘저 사람을 한번 죽여 버려야겠다.’ 이런다면, 벌써 저쪽에서 ‘흥!’ 콧방귀 탁 뀌고 ‘네가 날 죽여?’ 하게 됩니다. 본인은 모르죠. 본인은 몰라도 본래 자기 속에서는 벌써 알고 ‘흥! 날 죽여?’ 그러고선 오히려 댑다 그리로 몽둥이가 들어가죠. 그러는 수도 있지만, 이쪽에서 자비스러우면, 또 그걸 알면서도 몽둥이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 오히려 실의에 되빠져 가지고, 그런 마음을 버리고 다시 올라오도록 자비를 베풀죠.

그러니까 그 도리를 완벽하게 알기 위해서는 자기가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실천에 옮겨 보면서, 실험을 해 가면서, 체험을 해 가면서 자꾸자꾸 끝없는 길을 걸어야죠. 어떤 사람은 몇 년이나 해야 되겠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런 게 없어요. 몇 년을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고, 몇 달을 해도 되는 사람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건 정해진 게 없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그릇에 따라서, 지혜에 따라서, 선천적인 자기의 그 착한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습을 가지고 몇 알갱이나 살겠습니까? 요 사는 동안에 세세생생을 건지느냐, 아예 그냥 구덩이에 빠지게 하느냐 하는 것은 여기에 달려 있는 겁니다. 내 한생각을 잘해서 자기뿐만 아니라 부모를 건지고 자식을 건지고 세세생생 건질 수 있으려면은, 우리가 정말 똥을 누나, 잠을 자나, 밥을 먹을 때나 주인공 생각만 나면은 항상 거기다 놓는 작업을 안 하고는 아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 내가 “삼천배를 올려라. 기도를 하라. 정성을 들여라.” 또는 “몇몇 일을 목욕재계를 하고 정성을 들여라.” 이런 말 합디까?

여러분 사는 생활이 그대로 여여하고, 그대로 공부할 수 있는 재료고, 여러분이 부처고, 여러분이 중생이니까 ‘한 생각을 잘 내면 부처고 한 생각을 못 내면 중생이다. 그러니 잘해 봐라.’ 이거죠. ‘삼보에 귀의한다’ 이런 것도 ‘자생삼보에 귀의할 줄 알아야 불(佛)·법(法)·승(僧)에 귀의할 줄도 안다. 즉 말하자면 자생중생에, 자생부처에, 자생삼보에 귀의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과거에 살던 자기와 현재의 자기 한생각과 자기 한생각의 움죽거림이 자생삼보입니다. 가만히 있는 자기 무심과, 생각을 내는 마음과, 생각을 내면 몸이 움죽거리는 것이 바로 삼합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니까 그게 자생삼보에 귀의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 자생삼보에 진짜로 귀의해서 그 도리를 알면은 바로, 불(佛)도 자기의 생명과 둘이 아니죠. 불이 생명이니까, 생명의 근본이 불이에요. 우리가 살면서 배우는 게 교(敎)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 머리 깎은 사람만 믿게끔 되는 게 불교가 아니죠. 그냥 진리예요. 그러니까 생명의 근본인 불(佛)과 한생각인 법(法)과 스님들인 승(僧), 즉 불법승이 다 한데 합쳐서 내 자생삼보와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둘이 아니죠. 생명도 둘이 아니요, 몸도 둘이 아니요, 만약에 생각도 둘이 아니라 한다면, 즉 그냥 모두가 삼보에 귀의했다 한다면, 자생이다 뭐, 부처님이다 이런 걸 떠나서, 내가 항상 얘기하죠. 여기 법당에 와서 일정례(一頂禮)를 하든지, 삼정례(三頂禮)를 하든지, 칠정례(七頂禮)를 하든지 간에 ‘내 몸은 부처님 몸과 같고, 내 마음 낸 것도 부처님 법과 같고, 또 저렇게 앉아 있는 그 모습도 내 모습과 둘이 아니다.’ 이렇게 하라고 그랬죠. 항상 그렇게 하면서, 여기 들어와서는 불상과 하나로 합치고, 나갈 때는 댁의 자신으로 한데 합쳐서 나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둘이 아니죠. 그러니 형상 부처님을 무시하지도 않게 되죠. 부처님 형상을 무시하면은 자기 형상이 무시가 되는 거니까. 모두가 그렇게 상대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냉정하게 판단하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탄생을 안 했다면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탄생을 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자랑스러운 게 있고, 즐거움이 있고, 모두 그런 거죠. 여러분이 없다면 없는 거죠. 전부 없는 거죠. 그래서 최초의 문제는 ‘너 하나로 인해서 생긴 것이다’ 하는 얘기죠. 모두 각자, 너 하나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어딨습니까?” 하니까 “말하는 놈은 어떤 놈이냐.” 이렇게 말을 했거든요. 또 “번연히 이미 부처가 됐다고 하면서도 왜 부처를 깨닫지 못합니까?” 하고 물으니까 “네가 깨닫지 못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느냐.”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그런 거와 같이 어떤 사람이든, 스님네든 스님네가 아니든 자기 그릇의 잣대에 대서 상대방을 생각하려고 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게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내가 둥글게 그쪽에 모자라게 들어가 주고, 크면 큰 대로 들어가 주고 아주 작으면 작은 대로 들어가 준다면, 항상 평등하고 항상 둥글지 않겠습니까? 어때요? 여러분이 보기에 ‘왜 저렇게 할까?’ 하고 모자라게 생각되는 사람이 있죠? 그런데 ‘어허! 저게 내가 모르고 살 때의 내 모습과 같구나.’ 이런 생각 해 보셨습니까? ‘내가 모자랐을 때의 바로 그 모습이로구나!’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바로 부드럽게 말이 나가고 부드러운 행동이 나갈 겁니다. 자기이기 때문에, 전자에 모자랐던 자기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예 자기 그릇에다가 맞추어서 생각을 하고선 ‘아휴, 저거는 그냥 천리만리 모자라.’ 하고 생각을 했다면 아예 모가 나죠. 그리고 외면이 되고 그러죠. 그러니까 사랑을 할래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그러죠.

그러니 여러분이 심사숙고해서…, 그 자동적인 오신통의 제일 중심에 숙명통이라는 컴퓨터가 있다고 생각을 하세요. 그 숙명통의 컴퓨터에 스스로, 자동적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 입력되는구나. 그래서 스스로 거기다가 또 맡기면 입력된 게 그냥 전체 자꾸자꾸 없어지면서 새 물로 화하는구나. 그럼 내가 생각하는 대로 자꾸 화해서 없어지고 없어지고 하니까 새 걸로만 자꾸 나올 거 아닙니까, 이 세상에. 그러니 얼마나 좋은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아마 누구든지 이러한 경험 안 해 본 분들은 이렇게 좋다고, 정말 눈물까지 흘리면서 좋다고 생각하지 못하실 겁니다, 아마. 그거를 알면 자동적으로, 그 무너졌다는 빌딩에 들어가다가도 아마 튀어나왔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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