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수 김용덕

흔히 “가난은 죄가 아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죄를 짓게 된 경우는 분명 있다. 13살 때 과실치사로 소년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김용덕이 그렇다. 효심에서 비롯된 살인은 가난이 부른 살인이었다.

1980년대는 내가 소년 재소자들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은 시절이다. 개운사 주지 시절이었다. 절 가까이 김천소년교도소가 있었다.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15년형 선고 후 김천소년교도소로
수감 7년만에 어머니와의 첫 면회
구명운동 전개해 그 해 연말 출소
“가난한 소년수들 정상참작 못받아”


보통 사람들은 소년원과 소년교도소를 혼동한다. 죄가 비교적 가벼운 미성년들을 교화 교육하는 소년원과 달리, 소년교도소는 사실상 실형이 확정된 소년범에게 형을 집행하는 곳이라 수용경력도, 전과도 남는다.

1982년 어느 날, 김천소년교도소 교무과장이 내게 “저 애들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아파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 나는 당시 그 말의 참 뜻을 알지 못했다.

교무과장은 나에게 7년째 복역 중이라는 모범 소년수 김용덕(당시 20세)을 소개했다. 교무과장은 김용덕이 소년 재소자들 사이서 지도반장을 맡고 있으며, 양복 재단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한 성실한 청년이라고 했다. 김 씨의 첫 인상은 도저히 13살에 살인을 저질러 15년형을 선고받은 얼굴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김 씨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나는 김 씨로부터 사건 기록에 담기지 못한 김 씨의 사연을 직접 들어야만 했다.

김 씨는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깡촌 출신이었다. 심한 당뇨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은 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김 씨는 아버지에게 약 한 번 쓴 적 없고, 병원도 가보지 못한 집안에서 자랐다.

김 씨가 13살 때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 김 씨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들쳐 업고 무작정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진료를 받을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식이 없는 아버지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김 씨는 곧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생각에 이번엔 무작정 동네로 내달렸다.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만 했다. 그 때였다. 정신없이 동네 여기저기를 헤매던 김 씨의 눈에 쌀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보였다. 돈을 세고 있었다.

아버지를 살리겠단 일념에 사로잡힌 김 씨는 그 돈으로 아버지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아주머니는 당연히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악을 했고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과정에서 그만 사고가 났다. 김 씨에게 밀쳐진 아주머니가 머리를 부딪혀 사망했다. 김 씨는 돈을 뺏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가는 바람에 직후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스님, 어머니가 보고 싶어 죽겠습니다. 제 어머니는 촌 노인네라 여기까지 찾아올 분도 못 됩니다. 죗값을 치르는 7년 동안 어머니 손 한 번 잡아 본 적이 없습니다.”

밝고 씩씩한 그의 얼굴 뒤에는 가난에 한 맺힌 눈물이 가득했다. 아들이 살인자가 된 충격으로 김 씨의 아버지는 곧 돌아가셨다. 김 씨는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가 일자무식에 돈도 없어 도저히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가 그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김 씨의 고향인 전남 함평 면사무소에 연락을 했다. 김 씨 가정은 ‘극빈자’로 등록돼 있었다. 면사무소 직원들은 자식을 너무나 보고 싶어 하면서도 아들이 있는 쪽을 쳐다볼 뿐, 고향 밖을 한 번도 나오지 못한다는 딱한 사연을 전했다.

나는 곧바로 택시를 대절해 김 씨의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 김 씨의 고향집은 ‘폭탄 맞아서 내려앉은 집’ 같았다. 세상에 이런 집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초라한, 난생 처음 보는 집이었다. 50대 중반의 나이라고 들은 그의 어머니는 80대로 보였다. 김 씨의 어머니는 ‘용덕이가 있는 곳에서 온 스님’이란 내 말을 듣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

태어나서 처음 타본 택시서 먼 길을 가는 내내 김 씨의 어머니는 울었다. “가난이 죄”라며 불쌍한 아들의 신세를 하염없이 털어놨다.

김 씨의 사연을 아는 김천소년교도소 교무과장은 모자 상봉을 위해 특별 면회실을 마련해줬다. 김 씨와 그의 어머니는 서로를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엄마, 왜 이렇게 늙었어. 왜 할머니가 됐어. 손이 왜 이렇게 됐어?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한 거야, 엄마…”

나는 두 사람의 첫 면회를 주선한 그때 김용덕을 석방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눈물겨운 면회현장을 바라보면서 무너지기 직전인 김 씨의 집과, 출소한 김 씨가 재단사로 취직해 어머니를 봉양하는 모습을 동시에 떠올렸다.

김 씨의 구명운동에 나선 나는 박정수 지역구 국회의원을 찾아갔다. 법무부 장관을 찾아가 탄원서를 직접 전달할 계획을 알리고 동행해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박 의원은 당시 법무부 장관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인데다, 김천에서 그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박 의원은 고맙게도 자초지종을 듣고 ‘이런 일은 응당 해야한다’며 즉시 승낙했다.

법무부 장관실에서 나눈 대화는 잘 풀렸다. 그 해 연말에 석방된 김 씨는 내게 대구의 한 양복점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 모시고 잘 살겠다는 김 씨의 전언은 더할 나위 없이 감격스러웠다.

김 씨 출소 전인 1984년 봄, 김천소년교도소 모범원생 20명을 데리고 구미 금오공고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교내 불교학생회 학생들과 자매결연하는 날이었다. 나는 아이들 틈에서 이야기하며 웃던 김 씨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이전에 교무과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애들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아파서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소년수들은 모두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었다. 집이 부유한 아이들은 재판 과정서 빠져나갔다. 변호사 선임할 비용이 없는 아이들은 일말의 정상참작 없이 형을 선고 받았다. 교도소장의 말은 일종의 양심선언이었다.

학교를 떠나기 전 철창 차에 탄 소년수들과 교문에 서서 배웅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교무과장이 느꼈던 바로 그 부끄러움이 내게도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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