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떠나가고 있다. 길거리에 낙엽이 뒹굴고 있다. 낙엽을 보고 멋을 느끼기보다 청소부의 고달픔을 먼저 생각하니 늙긴 늙은 모양이다. 한국 영화계의 큰 별인 신성일 씨가 지구별을 떠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종로 극장가를 배회한 허리우드 키드였던 나에게 그의 떠남은 어떤 한 시대와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찌들고 가난했던 그 시절에 그는 한 시대의 별과 같은 로망이었다.

“인생은 연기야!” 이 말은 엄앵란 씨가 남편 신성일 씨의 시신을 입관한 후 한 말이다. 언론은 이 말을 표제로 뽑아 그녀의 애달픔을 전하고 있다. 남편을 ‘안의 남자’가 아닌 ‘밖의 남자’로 표현한 엄앵란 씨의 속앓이가 그동안 얼마나 심했을까. ‘인생은 연기야’라는 표현을 보자 언뜻 세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다.

타계한 배우 신성일 입관 후
엄앵란 “인생은 연기” 한마디
‘演技·煙氣·緣起’ 의미 떠올라

명연기 위해서는 아상 버리고
無我 경지서 세상과 소통해야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
인생은 사라지는 연기와 같아
모두 붓다의 연기론과 맞닿아


첫째로는 배우가 무대에서 펼치는 연기(演技)를 생각했다. 인간의 삶을 연극과 배우로 비유한 사례는 동서고금을 통해 엄청 많다. 명배우 최불암 씨는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라는 긴 제목의 책을 펴내 배우로서의 인생살이를 회고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불을 만들면서 허공으로 사라지는 연기(煙氣)를 생각했다. 언뜻 매우 허무한 표현으로 들린다. ‘인생은 헛 거야’하는 것처럼.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전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인생을 연기로 생각하는 것이 인생을 참되게 살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에.

세 번째로 붓다의 연기(緣起)론이 연상된다. 연기론은 불교 사상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연기법에서 무아와 공의 사상이 나오고 자비 사상이 발현된다. 붓다가 밝혀낸 연기법은 경이롭고 위대한 사상이다. 지금도 연기적 인과론을 공부하고 생각할수록 그 심심미묘함에 현기증을 느낀다. 이 글을 쓰면서 당시의 기사를 자세히 살펴보니 엄앵란 씨가 말한 연기는 바로 붓다의 연기론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한다. 그녀가 남편의 죽음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본 것이리라. 엄앵란 씨는 붓다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다스린 분으로 알려져 있다. 남편 신성일 씨를 보내면서 붓다의 연기를 생각했다니 왠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방영준 성신여대 윤리교육과 명예교수

연기라는 단어를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이곳에 붓다의 가르침이 오롯이 담겨 있다. 명배우가 되고 명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아상(我想)을 버려야 할 것이다. 자신의 틀을 벗어나 타자가 되고 세상과 공감할 때 비로소 명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무아의 경지다.

또 인생을 허공에 사라지는 연기에 비유한다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 중 제1구게를 연상시킨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이 제1구게는 허무의 내용이 아니라 실존으로 가는 출발점일 것이다. 아마도 허무는 실존의 전제조건일 것이다. 붓다의 사성제 중 고성제가 으뜸인 이유가 무엇일까. 이 모두가 붓다의 연기법과 함께하고 있다.

엄앵란 씨가 남편을 보내면서 참으로 명연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걱정은 욕심이다. 다들 욕심의 노예가 돼서 산다.”, “여기서 인연을 맺었기에 내 식구 내 새끼라며 애지중지하지만 결국 다 똑같은 것 아닌가. 너무 욕심을 내지 말자.” 그리고 마초 같은 남편에게 내생에는 순두부 같은 여자를 만나기를 기원해주니.

이러한 엄앵란 씨의 모습이 아름답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지만 ‘맨발의 청춘’에 나온 그 모습처럼 아름답다. 건강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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