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스님(57·현성정사 주지, 자비명상 대표)

마가 스님은… 1961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광주 금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9년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2014년 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석사를 마쳤고,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실천승가학 박사과정에 있다. 1981년 월정사에서 출가했으며, 1982년 현성 스님을 은사로 도선사에서 정진했다. 법주사 복천암을 등에서 5안거를 성만했다. 2002~2005 마곡사 포교국장 재임시 ‘자비명상 템플스테이’를 개발·운영했으며, 현대자동차, 삼성, 우미건설, 신한은행 등에서도 진행했다.2003년부터 2011년까지 중앙대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2013~2015 동국대 정각원 교법사를 지냈다. BBS불교라디오 ‘마가 스님과 함께하는 자비명상’을 비롯한 다수의 방송을 진행했고 〈내 안에서 찾는 붓다〉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불연으로 다시 살다
20세 때 부친 원망 자살 기도
3일 후 깨어나 월정사서 출가
인도 순례서 화두 안고 돌아와

화두 들고 선지식 찾아 나서
태안사서 청화 스님 만나
“너는 출가 전에 어떻게 살았느냐?”
스승의 물음에 화두 풀리고
부친에 대한 미움 용서로 변해
부처님 가피 보답 보살행 원력

“천상천하유아독존” 부처님의 첫 설법. 말씀대로 우리는 각자 존귀한 존재이다. 그 존귀한 각자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안고 육도를 건너야 하는 고단한 존재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 고단한 삶 속에 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부처님이 일러주신 ‘길’이 있어 ‘지금 이 순간’을 또 맞이한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지금 이 순간의 인연을 짓는 것으로, 마음 하나하나가 서로 무관하지 않다. 그 연기(緣起)에 일찍이 눈뜨고 대중의 마음을 살펴온 이가 있다. 시대의 화두가 되어버린, 아니 이제는 화두라고 할 것도 아닌 ‘힐링’을 일찍이 부처님의 글자로 시작한 이가 있다. ‘자비명상’이라는 수행법으로 대중의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고, 그 마음에 불법(佛法)을 심고 있는 (사)자비명상 대표 마가 스님이다.

‘자비명상’의 탄생

2005년 7월 1일, 장맛비가 내리는 마곡사에 28명의 대중이 모였다. 아픈 사람들이다. 마음이 아픈 이들이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부처님을 찾았다. 그들을 맞은 이는 당시 마곡사 포교국장 마가 스님. 그들의 마음은 이제 마가 스님에게 달렸다.

연화당에 모여 앉은 참가자들에게 마가 스님은 각자의 이름을 새로 지어보라고 한다. ‘물망초’, ‘무념무상’, ‘허공’ 등 참가자들은 새로 지은 이름으로 이름표를 고쳐 달았다. 그 이름 속에는 많은 사연들이 담겨있었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스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었고, 이름 하나로 그들은 새롭게 태어났다.

저녁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은 법당에 마주 앉은 참가자들을 두 줄로 눕힌 후 ‘김밥말기’를 제안한다. 적막이 흐른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의 몸 위를 구르는 것이다. 스님의 재촉에 참가자들은 서로의 몸 위를 구르기 시작한다. 상처 없는 상처를 안고 온 이들, 서로의 상처 위를 구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가자들의 눈빛은 분명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리자 스님은 참가자들을 절 밖으로 내보낸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절 근처를 걷게 했다. 한 사람은 눈을 감고 상대방의 손에 의지해 걸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마가 스님의 ‘이심’은 무엇이고, 길을 걷는 참가자들의 ‘전심’은 무엇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 짤막한 길이 결코 짧지 않은 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지난날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것, 일 초 일 초가 가볍지 않은 일이다. 산책을 끝으로 첫째 날의 일정인 ‘마음 열기’가 마무리됐다.

새벽 3시, 새벽예불이다. 그리고 108배. 참가자들은 잠이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예불을 올리고, 집전 스님의 죽비에 맞춰 절을 시작했다. 누구를 위한 절이며 무엇을 위한 절인가.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일 배 또 일 배, 문 밖의 어둠처럼 일 배 일 배는 그저 어둠일 뿐이다. 하지만 잠시 후 달라지기 시작한다. 가쁜 숨과 숨 사이에 ‘나’가 서서히 들어서기 시작한다. 상처와 관련된 시간들이 거친 호흡을 타고 들락거린다. 이제 절은 각자의 몫이다. 참회의 시간, 용서의 시간, 성찰의 시간이다. 미움, 원망, 그리움, 안타까움 등 번뇌들이 몰려온다.

아침 식사 후 ‘가족 긍정 명상’이 이어진다. 가족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역시 시간이 흐르자 참가자들은 많은 감정들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움과 용서, 원망과 사랑이 교차한다. 마침내 눈물이 터져 나온다. 참가자들은 맨발로 젖은 산길을 걷는다. 상처가 각자의 몫이듯 길은 각자의 것이다. 치유를 향해 걷고 있다.

저녁 공양 후 참가자들은 노래에 맞춰 온갖 몸짓으로 망가진다. 마음껏 망가진 ‘나’를 통해 ‘상처’는 또 한 번 출렁인다. 그 출렁임으로 각자는 어딘가에 가 닿고 있는 듯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난 후 이제 ‘유서’를 쓰는 시간이다. 20분 후에 죽는다는 가정 아래 참가자들은 유서를 써야 한다. 그 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상처’는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던가. 하지만 죽음 앞에서 마주한 그 상처들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유서를 써내려가던 참가자들은 하나 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눈물 속엔 용서와 화해, 믿음과 사랑, 참회와 새로운 서원이 들었다. ‘물망초’ ‘무념무상’ ‘허공’ 그들은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마지막 셋째 날 일정은 ‘다시 일상으로’이다. 지금의 생은 지나온 생의 인과에서 온 것이며, 다음 생 역시 지금의 인과에서 비롯될 것이다. 어제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참가자들은 지난 생을 기억할 수 있고, 지난 생을 기억할 수 있는 덕분으로 새로운 오늘과 내일을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보게 된 참가자들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존재인 ‘나’를 깨닫는다. 각자는 존귀하고, 내가 존귀한 만큼 모두가 존귀함을 깨닫는다. 이제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은 참가자들은 서로에게 삼배를 올린다. 그리고 존경과 자비의 마음으로 서로를 안아준다. 2005년 현대불교신문사와 마곡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 템플스테이’다.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그렇게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출가, 그리고 원력의 시작

마가 스님은 스무 살 때 월정사에서 출가했다. 스무 살의 청년은 삶에 미련이 없었다. 그 뿌리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었다. 스님은 일찍부터 아버지와 멀었다. 힘겹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아를 가지기 시작한 청년은 삶보다는 죽음 쪽으로 기울었다. 스님은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 제일 먼 곳이라고 생각한 오대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을 버렸다. 하지만 청년은 삶을 떠나지 못했다. 약을 먹고 쓰러져 있는 청년을 월정사 노스님이 보았다. 청년은 3일 만에 깨어난다. 그 인연으로 청년은 그 자리에서 출가한다.

스님은 월정사를 나와 합천 해인사, 부산 범어사를 거쳐 서울 도선사에 바랑을 풀었다. 그리고 현성 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군복무를 마치고 도선사로 돌아와 계를 받은 스님은 속리산 복천암을 시작으로 문경 봉암사, 부산 해운정사, 예산 수덕사 정혜사 등에서 다섯 철을 난다. 하지만 특별한 ‘소식’은 없었다.

선방생활에 지친 스님은 도반들과 인도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출가한 지 십 년째였다. 성지순례는 원만하지 못했다. 서로 뜻이 맞지 않은 도반들은 각자 순례의 길을 나서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에 홀로 남은 스님은 일주일 동안 게스트하우스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스님은 일주일 동안 홀로 있으면서 자신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나’를 보았어요. 그 순간 환해지더라고요.”
스님은 다섯 철 안거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공부를 일주일 동안 타국의 게스트하우스 작은 방에서 경험한다. 작은 ‘소식’이었을까. 가슴이 뛰었다. 출가자로서 처음으로 무언가와 만난 스님은 점검과 지도를 위해 스승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귀국한 스님은 제방의 어른스님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곡성 태안사에서 청화 스님을 만난다.
“자네는 출가 전에 어떻게 살았나?”
그 순간 스님은 숨이 탁 막혔다. 큰스님의 물음에는 큰 가르침이 들어있었다. 스님은 큰스님의 질문을 받자마자 출가전의 삶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다시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 안에는 다시 ‘아버지’가 있었다. 이름과 옷만 바뀌었지 아직도 지난날을 끝내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눈물이 터져 나왔어요. 그리고 저도 모르게 ‘아버지 고맙습니다. 청화 스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고 가슴 속에서 말이 터져 나왔어요. 그렇게 일주일을 울었어요.”
스님이 청화 스님 곁에서 머문지 한 달 반이 지났을 때였다. 스님은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걷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청화 스님은 “이제 자네는 됐네. 그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서 원 없이 보살행을 하게”라고 했다. 그때부터 마가 스님은 세상에서 대중과 나눌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못난 놈을 부처님이 받아주시고, 많은 시주은혜들이 있어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했어요. 그 은혜 다 갚지 못하고 간다면 큰 벌을 받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번 생에 밥값 다하고 가기로 발원했죠.”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본인의 삶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경험한 아픔과 그 아픔에서 벗어난 경험이 녹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수행은 이론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의 응어리를 푸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시대 힐링 포교사
마곡사 인연으로 ‘자비명상’ 시작
2004년 중앙대 교양 과목 채택
〈내 마음 바로 보기〉로 큰 반향
정원 150명서 1500명으로 늘어
9년 동안 총 2만여 명 수강해

2005년 본지와 마곡사 공동 주최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 첫 선
마음 충전소 등 쉼 없는 보살행
새 프로그램 ‘마음카드’ 출시
강연·방송·출간 다양한 활동
“저는 부처님께 위로 받아요”

11월 5일 서울 동국대에서 ‘자비명상’ 지도자 과정으로 최근 새롭게 출시한 프로그램 ‘마가 스님의 마음카드’에 대해 강의 하고 있는 마가 스님.
2005년 본지와 마곡사가 공동 주최한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 템플스테이’에서 명상지도를 하고 있는 마가 스님.

 

‘자비명상’ 태동… 중앙대 교양과목 채택

2002년 마가 스님은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찾는다. 노모는 불편한 몸으로 머리를 깎고 찾아온 아들을 위해 밥을 짓는다. 밥상을 받은 아들의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흐른다.
“출가하고 난 후 처음으로 ‘주지’에 대한 생각을 품었어요.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어요.”
마곡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소임 대중이 필요했던 마곡사가 구인공고를 냈다. 2년 동안 소임을 맡아주면 절을 주겠다는 조건도 있었다. 스님은 마곡사로 달려갔다.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스님이 마곡사 대중이 되면서 시작됐다.
“일과가 너무 무료했어요. 그래서 법공양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마곡사를 찾은 대중에게 〈법구경〉 한 구절씩을 적어 나누어 주기 시작했어요.”
‘자비명상’의 시작은 바로 그 〈법구경〉에서 시작됐다고도 할 수 있다. 〈법구경〉 한 구절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마곡사를 찾았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데리고 오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무리’가 되었고, ‘자리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처음엔 찻자리를 만들어 함께 했고, 새벽예불체험, 범종타종체험 등 작은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다. ‘자비명상’은 그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스님은 모여드는 사람들을 모아서 템플스테이를 시작했다. 찾아오고 머물다보니 템플스테이가 된 것이다. 스님은 그 때부터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아온 삶으로 대중의 마음을 읽기 시작했다. ‘이혼자를 위한 템플스테이’, ‘실직자를 위한 템플스테이’, ‘60대를 위한 템플스테이’ 등 마가 스님의 템플스테이는 하루하루 진화했다. 그때였다. 2004년 마가 스님의 이름이 산문 밖으로 알려지게 된다. 중앙대학교 관계자가 마가 스님의 템플스테이를 보고 학교 교양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종립대학도 아닌 일반대학에서 3학점 짜리 정규과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교과제목은 ‘내 마음 바로 보기’이다. ‘자비명상’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자비명상’으로 하고 싶었지만 학교 측에서 종교적이라는 의견 때문에 이름을 바꾸었다. 만약 학교 측에서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면 ‘자비명상’의 탄생은 좀 더 앞당겨졌을 것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정원 150명의 수강신청이 10분 만에 마감됐다. 지원자가 많아 야간강좌까지 개설됐다. 정원 150명으로 시작된 강의는 9년 후에 1500명으로 늘어났다. 스님 7명이 투입됐다. 9년 째 강의를 마지막으로 강의는 종료됐다. 그 동안 스님의 강의를 들은 학생은 약 2만 명에 달한다.

쉼 없는 프로그램 개발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자신에 대한 자비심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에게 자비심을 확장시켜 이타적이고 평온한 마음에 이르게 하는 명상이다. 또한 자비명상은 명상과 상담의 장점을 살려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개발한 명상법이다. 삶과 어우러지며 소중한 나를 찾아가는 마음치유명상이다. 마음을 열고, 알고, 나누는 명상으로, 화와 불안을 다스리고 건강하게 터트리는 방법과 자기 안에 깊숙이 내재된 긍정심과 자신을 사랑하는 법,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을 기르는 법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자비명상은 이 순간 선업공덕을 짓고 있는지 불선업을 짓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요.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역할과 인과법을 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어요. 인과를 모르고 살기 때문에 세상이 복잡해진다고 생각해요. 부처님의 인과법을 안다면 좀 더 조심스럽게 살 것 같아요. 연기법의 핵심은 계를 잘 지키는 것이죠. 그리고 수행은 지금 이 순간 선업공덕을 쌓는 것이고요.”

스님은 언제부턴가 이 시대의 ‘힐링 멘토’로 불리고 있다. 2013년부터 매일 아침 인연지인들에게 ‘오늘의 명상’을 발송하고 있고, 2015년부터는 ‘53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선재동자의 명상여행’을 이끌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문화관광부가 인증한 ‘청소년을 위한 EGG 깨뜨림’, 2018년부터는 ‘나를 바꾸는 100일’ 수행 법회를 현성정사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올 초부터는 상처입고 지친 청춘들에게 직접 다가가기 위해 노량진 고시촌에 ‘마음충전소’를 열었다. 단 하나뿐인 자신을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방법, 자신을 아껴주는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 그리고 이를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베푸는 방법을 널리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이다. 그렇게 쉼 없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마가 스님은 최근 또 하나의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마음카드’이다. 49장의 그림 카드로 구성된 ‘마음 카드’는 상담자와 내담자의 중간 역할로서 자신의 내면 통찰에 대한 도움을 주기 위한 도구이다. 더불어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의 조화로운 관계 형성을 위해 지혜를 주는 수단으로 제작되었다. 스님은 이 밖에도 다수의 방송프로그램과 저서를 통해 힐링 멘토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힐링 멘토도 아프다

국민의 힐링 멘토로 불리는 마가 스님이지만 스님 역시도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이다. 스님도 아플 때가 있다.
“부처님 전에 무릎 꿇고 앉는 거죠. ‘부처님,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묻죠. 그렇게 묻는 것이 저의 위로죠. 출가자로서의 힐링은 그것뿐이죠. 부처님께 묻는 것.”
스님의 힐링 멘토는 부처님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부처님으로부터 위로 받고 있는 것이다.
“제가 하는 모든 노력들은 이미 부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종교가 양적인 팽창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수행이 철저해야 다른 사람을 제도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진리입니다.”
스님은 자기 수행을 ‘너무나도 쉬운 진리’라며 강조했다. 일주일 동안 눈물을 쏟아내고 난 후 가슴 속의 모든 것을 비워낸 힘겨운 시간이 있었기에 마가 스님은 대중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점점 마음을 쓸 수 없는 세상이다. 함께 사는 일이 내가 사는 일이다. 더 많은 일정으로 마가 스님이 쉴 틈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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