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선원총림과 차(茶)

‘조주끽다(趙州喫茶)’ 새 공안
가람에 다료(茶寮) 다실(茶室) 등장
‘벽라춘’ 등 명차 모두 선승이 제조
‘다두(茶頭)’- 차 달이는 소임

 

1. 차(茶)와 선, 끽다거(喫茶去)의 의미

선(禪)이 중국 천하를 석권하고 있던 중당(中唐ㆍ766-835), 만당(晩唐ㆍ835-907) 때가 되면 차(茶)는 더욱 선(禪) 속으로 깊이 들어와 ‘차와 선은 하나’라는 다선일여(茶禪一如)의 세계를 형성한다. 기호식품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차를 선의 세계 속으로 끌어 들인 것은 선승들이었다. 차는 선을 만나서 그 세계를 확장했고, 선은 차를 만나서 문화적 지평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송대가 되면 차문화는 선원총림 뿐만이 아니고 일반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차는 드디어 사찰과 황실, 사대부의 가정을 벗어나서 도심 한 가운데로 진출했다. 그 결과 다관(茶館)이 음식점이나 주점(酒店)보다도 더 많을 정도였고, 심지어는 지방의 작은 도시에도 차를 파는 다방이 있을 정도였다.

중국 선종사에서 처음으로 차(茶)를 공안(公案ㆍ선문답) 속으로 끌어들인 선승은 구자무불성화로 유명한 조주 선사(趙州禪師ㆍ778~897)이다. 그의 선을 구순(口脣皮禪ㆍ뛰어난 선법문)이라고 하는데, 아주 일상사(日常事, 尋常事)에 불과한 ‘끽다거(喫茶去)’라는 다어(茶語) 하나로 구도 행각으로 바쁜 납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주는 무심한 차 한 잔을 받아먹고 허우적 거리지 않는 납자들이 없었다. 그의 끽다거는 통상적인 단순한 끽다거가 아니고, 선의 진의(眞義)를 묻는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 祖師西來意)’와 같은 말이 되어 ‘조주끽다(趙州喫茶)’라는 공안을 낳았다.

어느 날 한 납자가 조주 선사를 찾아왔다. 조주 선사가 물었다. “혹시 전에 여기에 와 본 적이 있소이까?” “네, 온 적이 있습니다.” “아 그렇소. 차나 한잔 마시시오.” 다음 날 또 다른 납자가 찾아왔다. “여기 와 본 적이 있소” “아니 처음입니다.” “아, 그렇소? 차나 한잔 마시시오” 원주가 답답해서 여쭈었다. “선사, 어째서 와 본 적이 있다는 납자 에게도 ‘차나 한잔 마시라’고 하시고, 온 적이 없다는 납자에게도 ‘차나 한잔 마시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조주 선사가 “원주”하고 불렀다. 원주가 “예”하고 대답하자 “자네도 차 한 잔 마시게.”라고 하였다.

조주의 차는 무슨 차인가? 조주의 차는 일체 사량 분별을 절단시켜 버리는 희귀한 차(茶)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는 역사상 일찍이 없던 차였다. 언설(言說)과 분별이 미치지 못하는 차(茶)로서, ‘덕산방(棒)’, ‘임제할(喝)’과 같은 차이고,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劍)’의 차(茶)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선종사원에서 ‘끽다(喫茶)’, ‘끽다거(喫茶去)’는 심상사(尋常事)이고, 일상의 하나이다. 즉 ‘선’이란 행주좌와(行住坐臥, 일상의 거동), 착의끽반(着衣喫飯, 옷을 갈아입고 밥 먹고), 아시송뇨(屎送尿, 소대변 보는 일), 그리고 대인접화(對人接話, 객승과의 대화)의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 선승들은 차를 매우 애호했다. 선종사원에서는 눈을 뜨면 차 한 잔으로 부터 하루가 시작되는데, 차(茶)는 좌선 중에 쏟아지는 수마(睡魔)를 쫓고 신심(身心)을 청정하게 해주며, 소화기능을 돕고, 구취(口臭) 등 몸의 냄새를 제거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주(禁酒)의 도량에서 빈객을 접대할 수 있는 격조 있는 유일한 식품도 차였다. 또 차는 대화의 매개체이자 담론의 주제이기도 했다.

2. 차(茶)의 대화, 설봉과 암두

당말의 유명한 선승 설봉의존(雪峰義存ㆍ822~908)과 암두전활(巖頭全豁ㆍ828~887), 흠산(欽山) 선사가 함께 강서 지방을 지나가다가 어느 찻집에서 차를 마시게 되었다. 〈전등록〉 17권 ‘흠산문수(欽山文邃)’ 장(章)에 나온다.

흠산이 말했다. “전신통기(轉身通氣)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오늘 차를 마실 수 없도록 합시다.” 암두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차를 마시지 않겠소.” 설봉이 말했다. “나도 그렇소.” 이에 흠산이 말했다. “두 노인네가 말 귀도 못 알아듣는군!” 하고는 일어섰다.

재미있는 대화다. 여기서 차(茶)란 반야지혜 작용의 하나로 등장한다. 흠산은 정신적 질병에 걸려서 전신통기(轉身通氣)를 할 줄 모르는 자는 차를 마실 자격이 없다고 법거량을 한 것이다. 이에 암두와 설봉이 사실로 받아들여서 “차를 마시지 않겠다.”고 했으니, 여기서 행각은 의미를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흠산은 말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핀잔을 준 것이다.

〈전등록〉 ‘흠산문수’ 장(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미 당말(唐末)의 중국 거리에는 차를 파는 다점(茶店), 즉 찻집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 차문화의 발전 상태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당말에 이르러 차는 선이라는 매개체를 등에 업고 곧 다가올 송대를 향해서 문호를 확장하고 있었다.

차를 달이는 소임을 ‘다두(茶頭)’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다각(茶角)’이라고 한다.

 

3. 선종사원의 차(茶)

선종의 끽다문화는 송대에 이르면 가람 구성에도 영향을 주어 법당(法堂, 설법당)과 방장 사이에 차를 마시는 다료(茶寮, 茶室), 다당(茶堂), 다실(茶室)이 세워진다. 이로 인하여 종래 승당이나 중료(衆寮, 큰방, 대중방)에서 마시던 차(茶)가 한층 더 격조를 갖추게 되었고, 다선일여(茶禪一如)는 선종사원의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왔다. 선승들의 생활에서 끽다(喫茶)와 음다(飮茶)는 불가분의 깊은 관계가 되었다.

선종사원에는 전문적으로 차밭, 즉 다원(茶園)을 가꾸고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제다(製茶) 기술도 뛰어났고, 명차(名茶)의 재배와 생산, 그리고 전다(煎茶) 솜씨도 우수했다. “명차(名茶)는 사찰에서 나온다.”는 말과 같이, 몽산차(蒙山茶ㆍ한나라 普慧 스님이 만듦)와 벽라춘(水月茶), 무이암차에서도 명성이 높은 수성미(壽星眉)ㆍ연자심(蓮子心)ㆍ봉미용수 등 명차는 모두 선승들이 만든 차(茶)였다. 선승들은 모두 차(茶)의 명인(名人)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차를 달이는 소임을 ‘다두(茶頭)’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다각(茶角)’이라고 하는데(우리나라에서만 쓰는 말), 하위직으로 주로 법랍이 얼마 되지 않는 신참승들이나 행자들이 맡는다. 그러나 수행에는 다두(茶頭) 소임이 제격이다. 다두 가운데는 승당(선당)의 다두, 방장실의 다두, 수좌료(首座寮, 수좌실)의 다두, 유나실의 다두, 지객료의 다두, 고사(庫司, 원주실)의 다두 등 각 요사마다 다두가 있다. 승당의 다두와 방장실의 다두는 주로 신참승이 맡고, 기타 다두는 행자들이 맡는다.

송대 선원총림에서는 다석(茶席, 찻자리), 다탕(茶湯, 찻자리)이 많았다. 다석에는 거의 모든 대중들이 참석한다. 많은 대중이 참석하므로 법도와 질서가 정연해야 하고 고요[寂靜]·정숙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해서 우왕좌왕하면 그날 다석은 망친다. 그래서 각자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는데, 명패를 붙인다. 100명 이상이 함께 차를 마시지만 발우공양처럼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한다. 방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야 한다. 선의 마음으로 차를 마시는 것이므로 소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말을 해서는 더욱 안 된다. 그것이 선이고 선차(禪茶)이다.

특히 주지는 일 년에도 수십 번 찻자리를 마련하는데, 총림의 4절(四節)인 하안거 결제일과 해제일ㆍ동지ㆍ정월 초하루 날에는 대중 전체가 함께 마시는 대좌탕(大坐湯) 자리를 마련한다.

또 선종사원에서는 ‘특위차(特爲茶)’라고 하여 특별히 누구누구를 위한 다석이 많았다. 방장이 대중들을 위하여 내는 차(堂頭煎点), 방장이 새로 입방한 납자들을 위하여 내는 차(方丈特爲新掛搭茶), 주지가 신구(新舊) 지사와 두수를 위하여 내는 차, 지사와 두수들이 대중에게 내는 차(茶), 새로 입방한 신도승(新到僧)이 내는 차(茶) 등 〈선원청규〉와 〈칙수백장청규〉에 나오는 것만 해도 20여 종이나 된다.

4. 선원총림의 다탕(茶湯)과 다석(茶席)

선종사원에서는 끽다(喫茶)에 따르는 법식, 다법(茶法), 다례(茶禮)를 매우 중시했다. 그래서 괘탑(掛塔, 입방)하고자 하는 납자들은 안거 15일 전에 입방을 완료해야 한다. 다법(茶法), 다례(茶禮)를 익히기 위해서였다.

행각승(객승)이 하안거 결제를 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반월 전(半月, 15일 이전)에 괘탑(입방)하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다탕(茶湯,차)의 인사(人事)를 창졸(倉卒)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탕(茶湯)의 인사(人事)’란 다법(茶法), 즉 끽다의 법도를 말한다.

총림의 찻자리(茶席, 茶湯)는 그 종류만도 20여 종 이상 되었고, 또 차를 마시는 장소나 공간, 좌석 등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 입방하는 납자가 이를 숙지(熟知)하자면 15일 정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 선종사원의 경우는 특별히 법도를 갖춘 다석(茶席)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런 이야기는 부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송시대 중국 선원의 다석, 다탕의 법도는 매우 중요했고, 일본 선종사원의 다도(茶道)도 선원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장로종색의 〈선원청규〉에는 객실에서 곧 입방 예정인 객승도 다탕(茶湯, 찻자리)에 참석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그만치 다법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또 〈선원청규〉 1권 ‘판도구(辨道具)’ 편에는 “총림에 입방하고자 하는 납자는 삿갓, 주장자, (……) 발낭, 정병(淨甁), 욕의(浴衣) 등을 갖추라. 그리고 다기(茶器) 등은 재정 형편에 따르라”고 나온다. 개인용 찻잔을 준비하되 굳이 비싼 찻잔을 준비할 필요는 없고, 형편에 따라 갖추라는 것이다.

5. 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선일여(茶禪一如)

선종사원에서 다탕(茶湯, 찻자리), 다석(茶席), 끽다(喫茶), 음다(飮茶)에 따르는 다례와 행다(行茶) 등은 그야말로 다법(茶法) 가운데서도 고준한 다법이다. 그 법도와 격식 등은 전인적 인격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선원의 다석(茶席)은 현실 속의 불국토, 곧 선의 세계였다.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을 처음 쓴 이는 〈벽암록〉의 찬자인 원오극근(圓悟克勤ㆍ 1063~1135)이라고 한다. 원오극근은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유명한 묵적(墨跡)을 남겼는데 이 묵적이 어떤 경로를 거쳐 전설처럼 일본에 전래되었고, 현재는 교토(京都) 다이도쿠지(大德寺)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다이도쿠지는 무로마치(室町)시대의 유명한 다승(茶僧) 잇큐(一休,ㆍ1394~1481)가 주지로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현재 이 글씨가 다이도쿠지에는 물론 일본 안에는 없다는 설도 있다.

조선 후기의 명필이자 불교를 좋아했던 추사(秋史) 선생은 차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차(茶)에 대한 시문을 적지 않게 남겼는데, 그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수많은 차인(茶人)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글이 ‘정좌처 다반향초(靜坐處 茶半香初), 묘용시 수류화개(妙用時 水流花開)’이다.

송대 선종사원에서는 대중 전체가 차료(茶寮)에서 차를 마실 때는 향을 피웠다. 점차(點茶)에서 차와 향은 하나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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