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승려·儒子·중인 교류 계기는 ‘다산’

초의 선사 소장본 ‘치원시고후서’의 전체 모습. '완당선생전집' 수록본보다 더 자세해 원본보다 생략됐음을 알 수 있게 됐다. 또한 내용을 통해 초의와 황상 등이 조선의 명문가와 교류할 수 있던 것은 다산과 그의 아들 유산의 역할이 컸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조선 후기의 인물 황상(1788~1863)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에 기른 첫 제자 그룹에 속한다. 시에 밝았던 그가 스승에 대한 의리를 평생 잊지 않고 지킨 인물됨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자신이 지은 시에서 골라 편집한 시 뭉치를 들고 추사 김정희(1786~1856) 형제를 찾아가 질정을 요청했던 사실은 〈완당선생전집〉 권6에 수록된 ‘치원시고후서(園詩藁後序)’에서 확인된 바이다. 그런데 〈완당선생전집〉에 수록한 ‘치원시고후서’는 원래 지었던 글보다 생략되었고, 이 사실은 초의 소장본 ‘치원시고후서’를 통해 밝혀진 셈이다.
특히 이 자료는 추사체와 비슷한 서체로 필사된 것이라는 점에서 초의 주변 인물의 필사본으로 추정된다. 필사본 ‘치원시고후서’의 크기는 24.3×20.9cm이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초의 소장 필사본 ‘치원시고후서’
〈완당전집〉수록본 보다 더 자세해
다산 中人 제자 황상 詩格 상찬
승려·중인 등 명망가 교류 뒤엔
다산과 아들 유산이 있어 가능해

황군 제불(帝, 황상의 호)은 20세(弱冠)에 시(詩)에 능했다. 지금 나이도 칠십이나 되어 늙었는데도 더욱 시에 힘써 시가 더욱 공교(工巧)하며 치원시고(園詩稿) 수권(數卷)을 손수 편정(編定)하였다. 황군은 젊어서 다산에게 배워 수십 년을 부지런하게 따랐으며 또한 그러한 사람을 따라 유산형제 같은 이들과 교유하니 소위 걸으면 따라 걷고 빨리 걸으면 따라 빨리 걷는 자이다. 그 시가 다산의 규범을 떠난 것은 아닌데도 곧 하나도 비슷한 것이 없는 것이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따라 들어가는 바를 물으니 말하기를 옛날에 들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두보, 한유, 소식, 육유, 사가(四家)는 천고에 뽑을 만한 사람들이니 사가를 버리고 시를 짓는다면 바른 규범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스스로 다른 집의 근방에도 가지 않고 마침내 전심으로 사가의 시를 읽은 것이 거의 오 십 여년이나 되었다’하니 내가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대저 사람은 각기 뜻이 있고 또한 각각 정이 있어서 만나는 때와 처한 경우도 각기 다르니 즉 후인의 말이 반드시 앞 사람과 다 같지는 않아서 그 어떤 물건을 말한 것이다.
지금 황군의 시는 어근버근하게 혼자 만들어 스스로 베틀과 북에서 나와서 생각의 길이 멀고 만든 말이 세련되지 않아 읽는 사람들에게 마치 갑자기 황림과 절애에 들어가 마음으로 놀라고 머리털이 젖지만 천천히 풀어보면 생기가 이리저리 뚫리고 진력이 더욱 가득차서 마치 풀이 새 달에 처음 나온 것 같으며 옥이 윤기가 흐르며 정신이 산천을 보는 것과 같게 한다. 즉 오십년 동안 사가를 전심하여 멀리는 두보와 비슷하고 한유와 비슷하며 소식과 비슷하고 육유와 비슷하며 가까이는 다산을 닮기를 구했지만 모두 똑같이 만들지 않고 그 치원의 시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 물건 됨을 믿을 수 있다.
하지만 황군은 그 생각이 고인과 다른 것은 아니며 서로 닮고자하지 않았다. 그가 오십년 동안 사가에 전심하여 여기에서 성명(性命)을 만들었으며 여기에서 침식하였으니 물건이 다른 것을 보지 않고 옮긴 것이라고 한다. 정과 뜻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때와 상황은 몸에 가까운 것이니 스스로 능히 사가의 정신을 만나서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며, 스스로 유물이 흩어지고 뿌려짐을 알지 못한 것이로다. 앞서 능히 이것을 성취하여 두보, 한유, 소식, 육유도 아니며 아울러 다산의 시도 아니다. 이것은 사가를 잘 배우고, 또한 다산을 잘 배운 것인가. 그러나 황군이 아직 스스로 그 나아갈 바를 믿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아가 거리의 다니는 사람에게 물으면 비웃는 자가 많고 오히려 나의 형만이 깊이 감탄하여 지금 세상에서 이렇게 짓는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였다. 유산이 황군을 얻고 만난 것을 기뻐하여 나에게 한마디 말과 글을 요구하였다. 내가 늙고 힘이 없어서 황군의 시에 거듭 하기는 부족하다. 말을 하면 그대의 입가에서 웃음이 낭자할까 두렵다. 그러나 웃지 말고, 부족하지만 그대의 시를 위해 마침내 이것을 써서 황상(제불)에게 주며, 아울러 유산도 참고해 주기를 바란다. (치원 시고에 서문을 쓰는 것은 황 처사 제불을 위해서이다.)
황수(黃)가 그 시 치원고(園藁)를 가지고 와서 나의 형제에게 질정(質正)하므로 나는 ‘지금 세상에는 이런 작품이 없다’고 말했고, 내 아우는 또 황상(黃)의 오십 년 평생 내력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낌없이 있는 대로 다 털어 내어 다시 남겨둔 것이 없었으며, 심지어 사람들이 칭송하는 두보(杜甫)와도 같고 한유(韓愈)와도 같으며 소식(蘇軾)·육유(陸游)와도 같다는 것을 장황히 늘어놓아 찬양하였으니 황상의 시에 있어서는 더욱 더할 수 없이 했다. 나는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두보와도 같고 한유와도 같다는 것은 본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요, 내 아우가 초창하여 비유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유독 시인하는 반면에 부인도 곁따른다. 두보는 시에 있어 만상(萬象)이 혼륜(混侖)하여 아무리 한유(韓)나 또는 소식(蘇)·육유(陸)라도 같게 할 수 없는 것이며 소식ㆍ육유가 한유에 있어서도 역시 같게 할 수 없다. 비록 사람들이 소리를 동일하게 하여 비의(比擬)한다 해도 너무나 어울리지 않을 성싶다. 지금 황상의 시는 힘써 고도(古道)를 따르고 위체(僞體)를 별재(別裁)하였으니 당(唐)에 있어서는 조업(曹)·유가(劉駕)·유득인(劉得仁)이 한 것과 같다는 것은 혹 근사하다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조업과 같고 유가와 같다고 한다면 역시 아니다.
조업·유가·유득인이 시를 하는 것은 모두 번갯불을 떠받고 달을 찢고 괴이(怪異)를 수쇄(囚鎖)한 것들인데 지금 황상은 능히 번갯불을 떠받고 달을 찢고 괴이를 수쇄한다는 것은 옳겠거니와 또 조업과 같고 유가와 같다고 한다면 불가하다. 조업과 같고 유가와 같다고 해도 불가한데, 또 어떻게 두보와 같고 한유와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조업·유가의 그 당시 신체(新體)를 바로잡아 도시의 호고(豪)를 위하지 않은 것만은 황치원이 특별히 가깝고 황치원도 조업·유가에 가까우니 역시 다행인 것이다. 치원이 일찍이 조, 유의 시를 한번 보고 미치기에 힘쓴 적도 없었는데 그 가까운 것이 곧 이와 같으니 또한 이상하다. 이것은 또 이상하다하기에는 부족하니 옛날과 지금, 위와 아래에 이르도록 이 일도(一道)가 있는 것이다. 추사
黃君帝 弱冠攻詩 年今且七十 老而愈肆 力於詩 詩愈工 手編定園藁幾卷 君少學於茶山 服勤數十年 又從其哲 似酉山兄弟游 所謂亦步亦趨者也 意其詩不離於茶山家範 而乃無一似者 余異之 其所從入 其言曰 昔聞之 師曰 杜韓蘇陸四家 千古之選 舍四家而爲詩 非正軌也 自是不旁及他家 遂專心讀四家詩 蓋五十有餘年矣 余尤異之 夫人各有志 亦各有情 所遇之時與所處之境 又各不同 則後人之言 未必盡似於前人 以其言有物也 今君之詩 獨造 自出機 思路之邈 造語之苦硬 使讀之者 如猝入荒林絶壑 心駭髮淅 而徐而澤之 則生氣橫貫 眞力彌滿 如草之新出月之初生 而玉之浮筠 精神見于山川也 卽其五十年 所專心於四家者 求其遠而似杜似韓似蘇似陸 近而似茶山 而無有適成 其爲園詩已矣 信乎其有物也 雖然 君非有意與古人異 不欲其相似也 其五十年專心於四家 性命於斯 寢食於斯 所謂不見異物而遷焉者也 情志之所發作於內 時境之所逼側於外者 自能於四家神遇心喩 不自知其有物之奔注射乎 前能成就 此非杜非韓非蘇陸 非茶山之詩 此所以善學四家 而亦善學茶山也歟 然君未能自信其所就 如何 就質於通都人 多笑之者 而猶吾伯氏深賞之 歎爲今世無此作 酉山喜君之得所遇 要余一言弁藁 余老孱無力 不足以重君詩 恐言出而益藉笑君者之口 然不笑不足以爲君詩 遂書此贈帝 質之酉山云 (園藁爲黃處士帝) 山泉黃以其園藁來 質於余兄弟 余曰 今世無此作矣 仲又從之五十年 平生未歷傾倒而出之 無復遺蘊 至以人所稱揚之 似杜似韓似蘇陸者 張皇贊道之 其於之詩 尤無以加矣 余又何說矣 似杜似韓 是人之同聲 而比擬恐太不倫也 今之詩 力追古道 別裁僞體 在唐如曺劉駕劉得仁之爲之者 亦或近之 又以爲似曺似劉 則亦未也 曺劉駕劉得仁之爲詩 皆撑霆裂月囚鎖怪異者 今能撑霆裂月囚鎖怪異可也 又以爲似曺似劉不可也 似曺似劉之不可 又何以似杜似韓也 夫曺劉之矯時新體 不爲都市豪者 特近之 而近於曺劉 亦幸矣 未嘗於曺劉一詩目力有及 其近之乃如此 亦異矣 此又不足以異之 古今上下 有是一道焉耳矣 秋史

추사는 ‘치원시고후서’에서 황상은 시에 대한 관심이 컸으며, 이미 약관의 나이에 시에 능했던 인물이라 하였다.

황상은 중인이었다. 반상(班常)이 분명했던 사회의 분위기에서도 추사는 그의 시집에 서문을 써 주었으니 이는 추사가 어떤 인품의 소유자이며, 황상의 시격(詩格)이 얼마나 출중했던 지를 짐작하게 한다.

대개 조선시대 선비는 당송시대 필명(筆名)을 날렸던 두보(杜甫, 712~770)·한유(韓愈, 768~824)·소식(蘇軾, 1036~1101)·육유(陸游, 1125~1210) 등의 시품(詩品)을 흠모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두보는 당대의 인물로, 시성(詩聖)이라 칭송됐고 한유 또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이름을 올렸다. 이뿐인가. 소식은 조선의 선비가 가장 흠모했던 인물로, 그의 호는 동파(東坡)이며, 송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이다. 육유는 남송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시를 남긴 인물로 회자된다.

바로 황상은 “오십년 동안 사가(四家: 두보, 한유, 소식, 육유)에 전심하여 여기에서 성명(性命)을 만들었으며 여기에서 침식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는 다산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시에 근간은 당송의 문장가들인 셈이다.

한편 추사가 황상의 시집에 글을 써 준 또 다른 연유는 바로 유산 정학연(1783~1859)의 역할 때문이었으니 이런 사실은 “유산이 황군을 얻고 만난 것을 기뻐하여 나에게 한마디 말과 글을 요구하였다.”라고 한 것에서 드러난다.

아무튼 황상과 초의, 이들이 지체 높은 명문가와 교유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유산의 역할이 컸다. 황상이나 초의가 당대의 걸물로 칭송될 수 있었던 실질적인 토대는 다산과 그의 아들 유산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한 자료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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