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난 정보·옛 조사 차이… 연구 필요한 불화들

안동 석탑사에서 도난과 유출로 사라진 불화들, 사진 왼쪽부터 석탑사 아미타불도, 삼장보살도, 신중도.

한국 유교문화의 산실인 안동에 많은 사찰이 운영된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유교가 지켜야 할 덕목과 규범을 가르칠 수 있지만, 돌아가신 망자(亡者)에 대한 추모와 내세관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삶과 죽음은 사찰 전각 배치에서도 알 수 있는데, 조선 후기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영산전과 명부전이 건립된 것은 당시 스님이나 신자들이 바라던 믿음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경북 지역에서 안동에 가장 많은 사찰이 건립되어 운영된 것은 이러한 지역민들의 필요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에 있는 사찰은 사적기를 비롯한 많은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관련 연구를 진행하기에 한계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석탑사(石塔寺)도 그 중 하나의 사찰이다.

석탑사는 학가산 자락 계곡을 낀 평지에 지어진 사찰이다. 석탑사의 남쪽 넓은 터에 안동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이 자리하고, 탑의 북서쪽 모서리에서 20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사찰이 위치해 있다. 석탑사에는 원통전, 산령각, 범종각, 요사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 돌담이 쌓여 있다.

석탑사는 1913년 2월 사찰령에 의하여 고운사 본말사법이 시행됐고, 현재 조계종 제16교구본사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이 사찰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전하지만, 창건연대 및 창건주는 알 수 없다.

석탑사라는 절 이름은 주변에 돌무지로 쌓은 네모난 석탑과 관련된 듯하고, 이 석탑은 신라시대 의상(義湘)의 제자이며 봉정사(鳳停寺)의 창건주인 능인(能仁) 스님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영가지(永嘉誌)〉에 보면 능인대사가 이곳의 굴에서 은거하는데, 영주 부석사 스님 1천여 명이 그를 만나러 왔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이 때 스님들은 각각 돌을 모아서 한 곳에 쌓았고, 이것이 남아있는 방형의 석탑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고려와 조선시대 사찰의 연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석탑사에 전하는 ‘학가산신흥암기’(현판)를 보면 1790년에 중건되고, 1803년에 후불도가 조성되었다. 

현재 사찰 내에 남아있는 성보문화재는 목조관세음보살좌상(도 유형문화재 368호)과 안동석탑리방단형적석탑(도 문화재자료 343호)뿐이다. 목조관세음보살좌상은 높이 42㎝의 소형보살상으로, 조선 전기 보살상의 양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산신도는 19세기 전중반의 호랑이를 타고 있는 산신을 그린 불화이다. 

20세기 전반 석탑사에 소장되었던 성보문화재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조선총독부 관보본에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20세기 전반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 의하면 석탑사에 봉안된 성보문화재는 17건 28점으로, 이 중에 불상 1점, 불화 4점이 소장돼 있었다. 또한 1932년 12월 24일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불상 1점, 불화 5점으로 산령탱 1점이 늘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재산대장을 살펴보면 20세기 전반 석탑사에 봉안된 불화는 아미타불도, 지장시왕도, 감로도, 제석도, 산신도이다. 그러나 석탑사에서 1991년 1월 20일에 도난당한 불화는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에 신고되지 않았고,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에 삼장보살도(1699년), 후불도(아미타불도, 1803년 제작), 신중도(1844년 제작)만 신고되어 있다.(〈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 2016년 간행)

따라서 도난당한 유물 가운데 삼장보살도는 원래 석탑사의 불화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이후 다른 사찰에서 이운되었다가 도난당한 것이고, 감로도는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목련존자가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해 천도재를 지냈다는 〈우란분경〉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그려진 감로도는 우리나라에서는 16세기 이후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는데 석탑사 감로도 또한 화기와 형태를 알 수 있는 사진 등이 남아있지 않지만 영가천도를 위한 의식용 불화로 조성 봉안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아미타불도는 세로 115㎝, 가로 176㎝(조선총독부 관보본에는 세로 3척8촌 가로 5척8촌) 크기로 1803년 마바탕에 그려졌다. 중앙에 위치한 아미타불은 정면을 향해 가부좌한 모습으로 아미타수인을 결하고 있다. 양협시 가운데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표현되었고 대세지보살의 보관에는 정병이 그려져 있다. 협시보살을 비롯한 보살들의 자세가 자유스럽게 묘사되어 있고 아미타불의 두광 양옆에 배치된 아난과 가섭 등 제자들의 시선 처리와 가사 끝단에 그려진 문양표현이 다채롭다. 적색과 녹색 청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채운과 서기 등의 표현에서는 백색으로 강조하고 있다.

삼장보살도와 함께 아미타불회도는 도난백서에 신고된 내용과 일제강점기 당시 재산대장의 기록과 달라서 불화의 재질이 삼베인지 비단바탕에 그려졌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실정이다. 19세기에 그려진 불화의 특색이 신광 시문의 새로운 범례와 중간색의 사용 등에서 엿보인다.

삼장보살도는 1699년 마바탕에 채색되어 그려진 세로 165㎝, 가로 200㎝ 크기의 중단의궤용 불화이다. 삼장보살은 앙련과 복련의 연화대좌 위에 가부좌한 모습의 좌상으로 표현되었으며, 화면 중앙에 천장보살을 그리고 향좌측에 지장보살, 향우측에 지지보살을 배치하였다. 화기는 보이지 않아서 잘려나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림의 박락이 심하여 훼손돼,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원형의 두광과 신광이 표현된 삼장보살도는 모두 정면을 향해 가부좌한 모습으로 보관을 쓰고 아미타수인을 결하고 있다. 어깨는 둥글게 표현되었으며 가슴에는 화려한 영락을 표현했고 어깨에서 내려오는 천의의 선을 굵은 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형 두광의 바탕은 녹색으로 채색되었으나 중앙의 천장보살의 신광, 지장보살의 두광에는 화문이 그려져 이색적이다. 천장, 지지, 지장의 삼장보살도는 소의경전이 없어서 도상의 형식과 존명의 명칭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문헌 등을 통해서 수륙재 등의 불교의식용으로 조성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중도는 문헌에 제석탱(帝釋幀)으로 기록된 불화로, 도광 24년인 1844년 마바탕에 그려진 1폭의 세로 101㎝, 가로 100㎝ 크기이다. 신중도의 구성을 살펴보면 위태천과 제석천이 화면의 중앙에 크게 자리를 잡고 배치되어 있으며 에워싸듯이 권속이 화면을 가득 채워 표현한 형식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크기와 배치를 통해 천상의 위계를 표현했다. 좌우 대립적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으면서 또 상단과 하단의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화면 하단 중앙에는 적색 바탕에 묵서로 쓰여진 화기가 있다. 위태천과 제석천은 모두 화면의 정면을 향해 바라보고 있으며, 위태천은 깃털장식이 달린 투구를 머리에 쓰고 있다. 제석천은 오른손을 가슴 위까지 들어 올려 연꽃 한 송이를 손에 쥐고 있는 형상이다. 바로 아래 천신들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으로 얼굴을 약간 비스듬하게 좌우로 향하고 있으며 머리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원형의 두광을 두르고 있다.

안동 석탑사 신중도 화면의 크기를 살펴보면 1932년 관보본에 기록된 크기는 세로 1척 8촌, 가로 1척 4촌으로 도난신고된 크기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불화의 재질에서도 조선총독부 관보본에서는 비단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유물대장에서는 종이바탕에 채색되어진 것으로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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