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中 고행길이지만 신심으로 극복

22번 뵤도지 전경. 본당으로 가는 계단 옆으로 코보대사의 샘이 보인다.

아침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다. 밖을 보니 밤새 비가 왔다 간 듯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숙소를 나서려니 카운터 직원이 배웅을 나온다.

“오헨로상! 오늘은 비가 온다고 해요. 조심하세요.”

아니나 다를까 비소식이다. 순례길에서 가장 힘든 존재는 작열하는 태양도, 발 여기저기 난 물집도 아니다. 바로 비다. 비가 내리면 배낭과 옷이 젖어 걷는 속도가 느려질뿐더러 신발에 물이 스며 걷기 불편해 진다. 최악의 경우 산길로 이어지는 순례길이 계곡이 되기도 한다.

오늘의 목표는 23번 야쿠오지(藥王寺). 산길을 넘는 길이 몇 곳 있어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고 길을 지체할 수 없으니 길을 나선다. 어제 로프웨이로 내려와 원래의 순례길에서 조금 벗어났다. 1시간 반 정도를 걸어 순례길로 돌아가야 한다.

다행히 비는 오후부터 쏟아진다고 한다. 비가 오지 않을 때 최대한 거리를 많이 가둬야 한다. 지도를 보니 오늘은 약 30km를 걸어야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산길이 이어지는 코스는 오전에 끝날 것 같다.

22번으로 이어지는 순례길 중 오네(大根)고갯길은 필자가 좋아하는 순례길 중 한곳이다. 그리 험하지 않은 오르막이 끝나면 대나무가 싱그러운 순례길이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숲길을 빠져나오면 또 한 동안 논 옆을 걷는 길이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길이다. 하지만 비가 오고 난 다음의 고갯길은 여기저기 미끄러워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저 길바닥만을 보며 꾸역꾸역, 가쁜 숨을 쉬어가며 고갯마루에 도착했을 때, 일단 배낭을 풀고 쉬기로 했다. 그나마 덜 젖어 보이는 풀숲에 배낭을 풀어 놓고 쉬려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잠시 길 옆으로 빠져 미숫가루를 꺼내 먹기로 한다. 어제 같이 숙소에 묵은 동료들도 뒤따라 올라온다.

다들 배낭을 풀어놓고 주섬주섬 먹을거리를 꺼낸다. 나야 항상 먹는 미숫가루 경단에 생강편, 일본친구는 빵을, 프랑스 친구는 어디서 났는지 비스킷을 한가득 꺼낸다. 다함께 둘러 앉아 나눠 먹으니 아침부터 아주 배가 부르다.

“박상은 그 가루 참 잘 먹네. 힘이 나요?”
“탄수화물이니까요! 생각보다 배가 불러요.”
“네팔 사람들도 비슷한 걸 먹던데.”
“그렇죠, 그걸 따라하는 겁니다.”

네팔 이야기를 하니 문득 배낭 안에 넣어둔 기도 깃발, 룽따가 생각난다. 예전에 인도에서 사온 것이다. 티베트나 히말라야 문화권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룽따는 오색 깃발에 불경을 써둔 것이다. ‘바람의 말(風馬)’라는 뜻의 룽따. 바람에 깃발이 나부낄 때마다 바람을 타고 부처님의 말씀이 퍼져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고갯마루에 룽따를 걸며 길손들의 안전을 비는 것이 티베트 불교의 전통 중 하나다.

미숫가루를 털어먹곤 배낭에서 룽따를 꺼냈다. 고갯마루 위로 길게 펼쳐 걸곤 잠시 손을 모은다. 이 룽따 밑으로 지나는 순례자들이 모두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를. 모두 안전하게 순례를 마치기를. 날을 헤아려보니 마침 오늘이 달라이라마 존자의 생신날이다. ‘룽따를 걸기엔 길상한 날이구나’라고 생각한다.

다시 배낭을 둘러매고 내리막을 조심조심 내려간다. 낙엽 밑에 숨어있는 진흙길에 발을 헛디디길 여러 차례, 고갯길이 끝나고 포장도로로 들어섰다. 탁 트인 길에 긴장했던 마음이 시원해진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한 것이 먹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게 보인다. 걸음을 서둘러 22번 사찰을 향한다. 

22번 뵤도지(平等寺)는 최근 여러모로 칭찬이 자자한 사찰이다. 젊은 부주지 스님의 다양한 노력이 지역과 함께 사찰을 부흥시키고 있다는 평이다.

‘원래 시골 사찰이란 동네아이들의 놀이터’라는 생각으로 산문의 울타리를 허물어 경내를 개방하고, 사찰에서 판매하는 호신부는 지역특산품인 쪽물에 염색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지역과 상생하는 사찰, 함께하는 이웃으로 불교에 대한 문턱을 낮추고 있는 것이다.

최근 시코쿠 88개소에 청·장년의 젊은 주지 스님들이 하나 둘 등장하면서 여기저기 새로운 소식이 들린다. 순례 중에 만난 나이 많은 도보 순례자는 “약 30년 전에도 주지들의 세대가 바뀌면서, 숨어있던 시코쿠 헨로가 일본에 널리 알려졌다”며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이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실제 내가 만났던 젊은 주지 스님들이나 부주지 스님들은 헨로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늘어나는 외국인 순례자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 감사했다. 지금 시코쿠 순례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니 미래가 기대될 따름이다.     

뵤도지의 본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작은 샘이 있다. 코보 대사는 수행 중에 약사여래의 모습을 친견하고 석장으로 땅을 찌르자 솟아나왔다는 샘이다. 코보 대사는 이 샘으로 목욕재계하고 백일기도 끝에 약사여래를 조성해 모셨다는 것이 이 사찰의 연기 설화다. 약사여래는 중생들을 평등하게 구제하기에 그 이름을 ‘뵤도지(平等寺)’라 지었다.

참배를 마치고 납경소 옆으로 있는 작은 차당(茶堂)에서 빈 물통을 채우러 들어갔더니 커다란 유리 물통에 물이 가득 차 있다. 옆에 컵도 가득 놓여 있어 무엇인가 하고 옆의 안내문을 읽어 보았다.

“22번 뵤도지는 옛날 코보 대사가 약사여래의 가피가 깃든 샘을 솟아나게 하여 세워졌습니다. 뵤도지는 매일 아침 이 샘물을 길어 부처님전에 올립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알가수(閼伽水)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은 그만 알가수를 많이 길어 참배오신 여러분께 가피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유롭게 드시거나 떠가주세요.” 

설마하니 실수로 물을 많이 긷었겠는가. 분명히 순례 온 이들을 위해 물을 가득 채워둔 것이다. 그래도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그만 많이 길어버렸다’며 살며시 뒤로 물러난다. 세심한 마음씀씀이에 잔잔한 감동이 스며든다.

납경소 직원이 마침 나왔다가 내 손의 빈 물통을 보시더니 걱정 말고 물통에 물을 받아가라 권하신다. 대사의 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나오니 걱정 없다며.

다시 배낭을 둘러맨다. 일기예보에는 오후에 비가 온다 했는데, 바람결에 물방울이 하나 둘 날리는 것을 보니 서둘러야 할 판이다. 사찰에서 2km쯤 벗어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살살 내리는 비라면 그냥 맞아가며 걷겠는데 빗발이 제법 거세다. 한숨을 푹 내쉬곤 판초우의를 뒤집어 쓴다.

23번을 가는 길은 바닷가를 따라 걷는 길이 처음으로 나오는 순례길이다. 처음 순례를 왔을 때엔 조금 편하게 가보겠답시고 국도를 따라 걸었지만, 교통량이 많아 위험한 것을 알곤 그 뒤론 바닷가를 따라 걷는다. 날씨가 맑았다면 탁 트인 태평양을 바라보며 즐거워했겠지만 빗발에 거센 파도소리만 귓가를 때린다.

해수욕장에 서있는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지도를 더듬어 본다. 23번까지는 8km 남짓 남았다. 보통 걸음이라면 2시간 안에 도착할 거리지만 거센 빗속에선 더 지체될 것이 분명하다. 이미 신발은 빗물에 푹 젖었고, 발도 목욕을 다녀온 것처럼 쪼글쪼글 주름이 잡혔다.

일본인 친구가 휴대폰으로 일기예보를 보더니 한 2시간 안에 비가 좀 그친다고 전해주었다. 그래도 어차피 버린 몸, 더 버려봤자 잃을 것도 없다며 다시 빗속으로 나아간다. 딱히 시간적으로 쫓기는 것도 없으니 그냥 걷기로 했다.

빗속을 뚫고 걷기를 2시간. 저 멀리 23번 사찰의 탑이 보이고, 일기예보대로 빗발도 약해졌다. 대신에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몸이 으슬으슬해 일단 몸을 좀 말리고 참배하기로 한다. 23번 사찰 앞의 전차역 휴게소에 마침 무료족탕이 있는 게 기억나 서둘러 역사로 들어선다. 동네에 온천이 나오기에 마련된 시설이다.  

비에 젖은 몸을 화장실에서 대충 닦고, 배낭에서 마른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족탕에 발을 담그니 떨리던 몸이 금세 진정된다.

참배를 나가기 전에 역사 옆의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묵으려는 젠콘야도를 관리하는 곳이 이 식당이기 때문이다. 식당에 들어서자 사장님이 난색을 표한다. 벌써 순례자가 다섯 사람이나 와있다는 것이다.

“공간이 좁아서 어떨지 모르겠네요. 일단 직접 가서 이야기 해보세요.”

잠시 식당 밖에서 의견을 나눠본다. 만약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밤에는 비가 그친다는 예보를 믿고 역사에서 노숙하기로 했다. 결정을 내리니 마음에 부담이 없다.

이곳의 젠콘야도는 오래된 버스를 개조해 만들어 유명하지만 공간이 조금 좁은 게 단점이다. 젖은 옷을 선풍기 바람에 말리며 쉬고 있으니 식당 사장이 들어왔다. 오셋타이라며 찬합에 저녁밥을 가져왔다. 그런데 순례자가 한 사람 더 따라 들어온다. 좁은 공간에 9명의 순례자. 오늘 길만큼이나 잠자리도 험난한 밤이 돼버렸다.

순례의 Tip

대나무가 싱그러운 오네 고갯길.

- 22번에서 23번으로 가는 길은 크게 해변루트와 국도루트로 나뉜다. 국도루트가 조금 더 빠르지만 교통량이 많으니 주의하자.
- 순례기에 나온 젠콘야도는 저녁밥을 오셋타이 해주기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현재는 폐쇄되었다.
- 23번 사찰로 첫 번째 현인 토쿠시마가 끝난다. 토쿠시마현만 참배할 예정이라면 전차역 앞에서 전차로 고속버스로 도쿠시마시나 오사카 등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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