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전 상서]19. 유산 정학연의 ‘일속산방기’
[초의 전 상서]19. 유산 정학연의 ‘일속산방기’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8.11.0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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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시학 계승… 초야 산방서 도인의 삶
유산 정학연이 다산 시학을 계승한 황상의 오두막 '일속산방'을 그리며 쓴 '일속산방기'. 황상의 유유자적한 삶이 담겨 있다.
유산 정학연이 다산 시학을 계승한 황상의 오두막 '일속산방'을 그리며 쓴 '일속산방기'. 황상의 유유자적한 삶이 담겨 있다.

치원 황상(園 黃裳, 1788~1863)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강진 유배 시절 기른 첫 제자로, 시에 능했다. 학계에서는 그를 다산의 시학을 이은 인물이라 규정하였으니 이는 척박한 시대 환경을 학문으로 극복한 것이라 하겠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아전의 자제로 궁벽한 강진에서 태어나 조선 후기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오직 공부로 향상일로(向上一路)를 꿈꿨으니 실질적인 그의 버팀목은 다산이라는 시대의 거목이었다. 자질이나 공부에 대한 열의로는 충분히 동량(棟梁)이 될 조건을 갖췄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세상을 이롭게 할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던 것. 중인이라는 그의 신분으로는 아무리 뛰어난 자질과 지혜를 갖췄다하더라도 사회 제도의 한계를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날로 향상된 안목과 지혜를 키웠던 그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이룬 요순(堯舜)시대의 백성이 분명했다. 한평생 스승에 대한 충심(衷心)을 저버리지 않았던 그의 행실은 신의를 실천했던 증표였던 셈이다.

다산 유배 시절 첫 제자 ‘황상’
중인 신분이었지만 학문 매진
다산 자제·초의와도 꾸준한 교류

강진에 ‘일속산방’ 오두막 짓고
부귀 멀리하며 유유자적 살아가
이 모습을 정학연이 글로 담아

그와 스승 다산, 그리고 다산가와 맺은 아름다운 교유의 정은 다산이 해배될 무렵 제자들과 맺은 <다신계>나 다산이 황상에게 써준 증언첩(贈言帖), 그리고 유산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의 글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아울러 1845년에서 맺은 정황계(丁黃契)는 두 집안이 대대로 신의를 지키고자 했던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스승을 향한 그의 신망이 어떠했는지를 드러낸 것이다.
한편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강학과 집필에 매진하던 시기, 황상은 가족을 데리고 강진 소재 백적산 아래에 살면서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겨울과 밤, 비가 내리는 날, 한가한 여가를 틈타 종신토록 글을 읽고 시를 지으며 소일했다. 그가 머문 오두막이 바로 ‘일속산방(一粟山房)’이다.

일속산방은 그가 살던 집의 당호(堂號)로, 정학연이 지어 준 것이다. 무엇보다 황상의 굳은 의지나 열망, 이상이 고스란히 담긴 글은 <치원유고(園遺稿)>에 가득하다. 특히 그는 초의와도 깊은 정을 나눴는데 이때가 1809년 다산초당에서다.

이후 이들의 교유는 무슨 연유에선지 이어지지 못하다가 40년이 지난 1849년에야 재개된다. 바로 황상이 마현의 다산의 생가를 방문한 후, 강진으로 돌아와 초의를 찾아간 것. <치원유고(園遺稿)> 속에 수록된 ‘초의행(草衣行)’과 ‘걸명시(乞茗詩)’가 바로 이 무렵에 지은 작품들이다. 초의 또한 이 시에 화운(和韻)한 ‘일속암가(一粟菴歌)’를 남겼고 ‘차운기답일속암주인(次韻寄一粟菴主人)’이라는 시를 지어 서로의 우정을 이어갔다.

이번에 소개할 ‘일속산방기(一粟山房記)’는 황상의 집 당호(堂號)를 일속산방이라 짓게 된 연유를 상세히 기록한 유산 정학연의 글이다. 물론 유산의 ‘일속산방기(一粟山房記)’는 대흥사 승려들이나 다산의 제자들 사이에서 언급된 글이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초의가 소장했던 ‘일속산방기(一粟山房記)’는 분명 누군가가 필사한 자료이다. 그런데 그 글씨체가 추사체를 닮았다. 물론 황상과 추사는 서로 알고지낸 사이로, 일찍이 추사는 황상의 시집에 ‘치원시고후서(園詩藁後序)’를 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추사의 글씨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추후 서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듯하다.

아무튼 유산의 ‘일속산방기(一粟山房記)’는 당시 대흥사나 다산의 제자들, 그리고 초의와 교유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필사해 두고 읽었던 글 중에 하나라 여겨진다. ‘일속산방기(一粟山房記)’의 크기는 23.9×25.8cm로, 다른 자료와 합첩(合帖)한 서첩(書帖) 속에 들어 있던 자료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을묘년(1856)에 나의 형제 중에 상을 당한 슬픔이 있어서 문을 닫고 아파했습니다. 작은 길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하고 이리저리 떨어진 낙엽이 계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을에는 마음이 처연하고 숙연하여 모든 감정이 다 일어납니다. 홀연히 치원 황상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마치 빈 골짜기에 들을만한 소리가 있는 듯할 뿐 아니라 아픔도 갑자기 줄어들어 기쁨을 느낄 만합니다. 황상은 우뚝하게 뇌락한 모습을 저버리고, 출세한 벼슬아치와 귀인들과 노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다만 나만을 서로 좋아합니다. 매번 한번 생각이 미치면 문득 까끄라기가 핀 짚신과 해진 축(筑:악기 이름)을 구부정히 지고서 천리를 걸어서 나의 한가하고 거칠고 엄숙한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젊은 사람도 오히려 어려울 것인데 하물며 칠십이 된 노인이랴. 그 뜻이 족히 오랜 옛날에나 있을 뿐입니다.
황상은 집안 살림살이를 능숙하게 다스리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다만 홀로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여 세상에서 글 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활(迂闊)하다고 비웃고 아끼지 않았다. 거처를 백적산 중에 집을 짓고 즐기고 휴식하며, 시를 쓰는 장소로 삼아 대개 노닐며 소요한다. 나에게 그 집의 이름을 부탁하고 기(記)를 써달라고 하였다. 나는 곧 그곳을 일속산방(一粟山房)이라 하였다. 아! 세상이 커서 몇 만 리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물과 초목과 금수가 살며, 또 몇 천만리인지를 알지 못하니 이것을 대괴(大塊)라 한다.
그러나 창해(滄海)로부터 보면 작은 한 줌의 흙이니 하물며 다른 것이랴. 황상이 사는 산은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니 낱알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큰 땅(大塊)에는 사람이 초목, 짐승보다 커서 그 통달하여 풍운과 더불어 넉넉하니 공경으로 하여금 당세에 그 위엄을 두려워하게 하고 그 은혜를 생각하니 우뚝이 크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달인으로부터 본다면 모두, 마치 일 순간의 틈에 있는 쭉정이 겨, 흙에 떨어진 삼 씨, 몽환, 허공의 구름 같은 것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늙은 황상은 나무와 돌과 더불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강가의 적막한 땅에서 귀뚜라미와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이웃으로 삼았으니 또한 낱알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비록 그러나 우산(遇山)에게 말하길 ‘천 길을 높이 나는 봉황, 나뭇가지에 뱁새가 깃들어 각자 그 알맞은 곳에 나가서 하여금 사는 곳을 바꾸어 그 의지할 곳을 잃었다’고 하였으니 즉 맞지 않는다.
지금 황상은 낱알처럼 작은 몸으로 낱알 같은 작은 산에 살며, 앞을 쓸고 차를 다리고 시를 짓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시가 더욱 아름다워지고 글 또한 더욱 더 묘해져서 조용하고 여유로우며 담담하게 맑다. 지금 세상을 멀리하고 작게 여기며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긴다. 우산(遇山)이 말한 봉황이 뱁새보다 즐겁고 한 가지가 천 길보다 낮게 여긴다. 나는 천 길과 한 가지와 대괴와 낱알 하나를 알지 못한다. 애오라지 일순간에 알맞은 것을 취할 뿐이다. 대저 누가 알 수 있을까. 1856년 12월 유산이 쓰다.

乙卯余有原之戚 閉戶吟病 蒼苔滿徑 荒葉凝階 秋懷凄然 蕭然百感振觸 忽見園 黃子披戶而入 不若空谷足音 病爲之頓 喜可知也 黃子負崎歷落之骨 恥與達官貴人遊 而獨於余相善 每一意到 輒以芒枯然徒步千里 而訪余于荒寒瑟居之中 少壯者 猶難之 而七十老乎 其意足千古也已 黃子不善治家人産 且獨喜詩者 文詞人皆笑其迂 而不 作一屋於所居白山中 以爲宴息吟之所 蓋自放焉 屬余名其屋 且爲記 余乃署之曰 一粟山房 噫 天下之大 不知爲幾萬里 有人物草木禽獸 又不知爲幾千萬 是謂之大塊 然自滄海而觀之 渺然一拳土 何乎 黃子所居之山 僻在海隅 則不過一粟而已 所謂大塊之中 人惟大於草木禽獸者 以其達而與風雲富 而使公卿當世畏其威懷其惠 非不巍然大也 自達人觀之 如秕土夢幻雲空 於一瞬俄頃之間 何乎 黃子之老 白首無所遇 與木石爲隣 蚓叫於海堧寂莫之鄕 則亦不過一粟而已 雖然 施愚山曰 鳳凰之翔千 之棲一枝 各適其適 使易地失所憑 則皆不適也 今黃子以一粟之身 處一粟之山 掃葉烹茗 吟諷不輟 詩益工 文益妙 蕭閑而澹 遠今鄕雲富貴 愚山所謂鳳凰之樂於 一枝之卑於千 余未可知 而千與 一枝與 大塊與 一粟與 聊以取適於一瞬而已 夫孰得以知之 乙卯 嘉平月 酉山 記

유산이 “을묘년(1856)에 나의 형제 중에 상을 당한 슬픔”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는 1856년 세상을 떠난 정학유(1786~1855)을 두고 말한 것이다. 더구나 유산과 아우 정학유는 형제의 정이 깊었던 사이였으니 그 슬픔이 오죽했으랴. 이처럼 가슴이 아려오는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는 관계가 바로 황상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황상은 일민(逸民)이 분명했다. 그러기에 “출세한 벼슬아치와 귀인들과 노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다만 나만을 서로 좋아했”다.


다만 “홀로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여 세상에서 글 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활(迂闊)하다고 비웃고 아끼지 않았다. 거처를 백적산 중에 집을 짓고 즐기고 휴식하며, 시를 쓰는 장소로 삼아 대개 노닐며 소요했던” 것이다.

그의 심중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유산이기에 자신의 집 당호를 부탁한 것은 당연하다. 결국 일속산방이란 바로 황상의 인품과 소요의 미덕을 실현했던 은신처였다. 그렇다면 일속산방이란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유산은 일속산방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바로 황상은 “바다와 강가의 적막한 땅에서 귀뚜라미와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이웃으로 삼았으니 또한 낱알 하나에 불과할 뿐이”며, 황상은 “낱알처럼 작은 몸으로 낱알 같은 작은 산에 살며, 앞을 쓸고 차를 다리고 시를 짓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시가 더욱 아름다워지고 글 또한 더욱 더 묘해져서 조용하고 여유로우며 담담하게 맑다. 지금 세상을 멀리하고 작게 여기며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는” 일상을 살았기에 일속산방이라 명명한 것이다.

시를 지으며 한가한 삶을 지향했던 황상의 시는 여유롭고 담담했으며 맑았다. 그의 삶과 시처럼 담박했으리라. 그러므로 추사는 ‘치원시고후서(園詩藁後序)’에서 “지금 세상에는 이런 작품이 없다(余曰今世無此作矣)”고 극찬했다. 당시 황상의 시는 “사람들이 칭송하는 두보(杜甫)와도 같고 한유(韓愈)와도 같으며 소식(蘇軾)ㆍ육유(陸游)와도 같다는 것을 장황히 늘어놓아 찬양하였으니 황상의 시에는 더욱 더할 수 없이 했다. 나는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금 상하를 통했던 황상의 시품(詩品)은 분명 다산의 영향과 황상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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