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육식문화와 대량축산, 이대로 둘 것인가

 

심장과 뇌혈관 질환 및 암이나 당뇨병과 같은 성인병들은 우리의 식습관이 채식에서 육식중심으로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2014년 기준으로 닭 8억8천만 마리, 오리 5천만 마리, 소 1백만 마리, 돼지 1천 5백만 마리 등 총 9억 5천만 마리가 넘는 동물들을 잡아먹었다. 어마어마한 숫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2050년쯤에는 육류소비를 현재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이지 않으면 인류의 생존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소개되기도 했다. 불과 30년 이후의 일이다. 이는 지구가 2050년 예상인구인 90~100억 명을 먹여 살리려면 육류의 섭취를 최대 90%까지 줄여야 한다는 뜻이다.

각종 전염병 발생의 씨앗
살처분 동물 4000만 마리
살육의 업보 돌아온다

 이유는 공장식축산업이 지구의 황폐화와 이상기후의 가장 확실한 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식용가축들의 일생은 대부분 고도밀집형태의 공장식농장에서 시작되고 거기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다. 이처럼 음식으로 소비되는 동물들은 대자연 속에서 스스로 먹이를 구하는 형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밀폐된 공간에서 농장으로부터 공급되는 사료를 강제로 먹으며 죽지 못해 살다가 어느 날 도축장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다. 바로 여기서 각종 전염병의 발생과 이에 따른 대량 살처분의 씨앗이 싹트고 있는 것이다. 불현 듯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말이 생각난다.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당국이 시행한 가금류의 살처분 숫자가 무려 1,200만 마리를 넘어섰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2003년 조류인플루엔자가 처음 발생한 이후 같은 이유로 살처분된 닭, 오리 등의 가금류는 이미 4,000만 마리를 상회한다. 이쯤 되면 우리가 음식으로 소비하는 고기가 더 많은지 땅에 파묻은 가축의 숫자가 더 많은지 헷갈릴 정도이다. 그뿐인가. 2010-2011년 겨울동안 구제역의 여파로 매몰된 350만 마리의 소와 돼지 숫자를 합치면 현재 전국의 땅속은 거대한 동물공동묘지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집단 매몰지역 주변에는 침출수의 하천유입과 2차 환경오염의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비극적 사태가 일어나게 된 근본원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들의 음식문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육식 위주의 식사가 불러온 필연적 과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더 많은 고기를 더 싼 값에 공급하려는 자본주의적 경제논리가 그동안 경제적 이유 때문에 억눌러왔던 우리들의 고기 소비욕구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전문기관의 통계에 의하면 지난 20여 년 간 우리나라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농가 숫자는 매년 감소한 반면, 농가당 기르는 가축 수는 반대로 급격하게 증가했다고 한다. 예컨대 1990년에 농가당 평균 2.62마리이던 한(육)우가 2010년에는 6배 이상인 16.86마리로 늘어났고, 34.05마리이던 돼지는 1237.63마리로 40배 가까이 늘어났다. 닭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더 증가폭이 커 462.5마리에서 4만 1051.88마리로 폭증했다. 벌써 7-8년 전의 통계이니 지금은 상황이 훨씬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공장식 축산환경 속에서 소나 돼지, 닭 등의 식용동물들이 대규모로 강제사육당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국토 면적 대비 식용동물 사육 규모는 사실상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이런 환경에서 가축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그 결과 수조원에 달하는 국가예산의 낭비와 함께 엄청난 숫자의 살처분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말 그대로 무시무시한 공업(共業)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에게도 그 악업의 과보가 되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냉정하게 한 번 따져보자. 우리가 고기나 달걀, 우유 등 동물성식품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죽기라도 하는가. 대부분의 환경에서 인간은 고기를 먹지 않고도 잘 산다. 그것도 아주 잘 산다. 이는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영양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수백 만 명의 채식주의자들이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우리가 고기음식을 포기한다고 해서 소중한 생명을 잃는 것도 아니요, 없어서는 안 될 건강을 상실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식탁 위의 쾌락’을 잠시 유보하는 것일 뿐이다. 이에 반해 동물들은 인간의 식도락을 위해 그들의 하나뿐인 생명을 기꺼이 내놓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실천윤리학자인 피터 싱어가 강조하고 있는 이익동등고려의 원리에도 한참 어긋나는 일이다. 우리는 고기를 섭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 한 굳이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육식문화를 채식문화로 바꾸는 시도야말로 이로 인한 환경오염 및 생명윤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려 보자.

동물에게 잔인한 사람은
인간에게도 그럴 수 있다.
동물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

-임마뉴엘 칸트-

 

어떤 국가와 국민의 품격은
국민이 동물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 마하트마 간디 -

이 말은 불살생과 비폭력의 종교인 불교를 삶의 나침판으로 삼고 있는 우리 불자들에게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동안 우리는 과연 동물들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 아마도 깊은 반성과 무거운 성찰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죄책감이 들 것이다. 조금 전까지도 우리는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고기음식을 생산하기 위해 동물농장이 아닌 동물공장을 하루도 쉬지 않고 풀가동해 왔다. 주지하다시피 불살생계를 오계의 첫 번째 계목으로 삼고 있는 불교는 현대사회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환경이나 생명생태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종교보다도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이에 걸맞는 윤리적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안팎의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붓다는 누구보다도 생명을 귀중하게 여겨 초목을 베거나 땅을 파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이것은 하찮은 풀과 나무도 엄연히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가르친 것일 뿐만 아니라 땅 속의 벌레조차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함을 일깨운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불자들은 붓다의 생명존중사상을 각자의 위치에서 상황에 맞게 실천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문득 불교집안의 아름다운 전통인 발우공양과 오관게(五觀偈)의 생명윤리적 의미를 다시 한 번 더 곱씹어 보게 된다. 밥상에 놓인 음식물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곰곰이 되돌아보면 나와 자연은 서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사찰에서 먹는 곡물과 채소의 인연도 이럴진대 살아있던 동물에게서 나온 고기반찬이 우리 앞에 놓이기까지 가축들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다시 한 번 더 옷깃을 여미게 될 것이다.

-오관게-

이 음식이 어디서 왔던고,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법정스님 번역, 길상사 공양게).

인간은 먹어야 산다. 먹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이다. 때로는 고기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먹어야 불교적이란 말인가. 문제의 해결책은 지금이라도 당장 조금이라도 고기를 덜 먹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 외에 다른 특별한 방법은 없다고 본다.

이와 같은 작은 윤리적 인식의 공유야말로 불교윤리의 현대적 적용이 아닐까? 이는 곧 불교적 의미의 중도행(中道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고기를 조금 덜 먹겠다는 다짐과 실천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는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불살생계를 수지한 우리 불자들이 먼저 앞장서자는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여태껏 가능하면 그렇게 살려고 했던 내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더 ‘고기 덜 먹기’의 불교윤리적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계속 이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나도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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