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라는 인간 만드는 공장에서 벗어나야 자유껏 산다

 

(지난 호에 이어서)

큰스님 지금 무엇을 하신다고 그랬죠? 통신?

질문자3(남) 전화통신공사업.

큰스님 전화통신이요? 우리가 양쪽에 다 설치를 해 놨기 때문에 전화가 통하죠? 그러니까 주인공과 자기가 같이 연관이 돼 있죠? 여러분이 다요. 누구나가 다 연관이 돼 있죠. 그래서 전국에 다 전화통신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통신처거든요. 통신처만 되는 게 아니지만 지금 그 말이 나왔으니까 그 면만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다면 모두 그 주인공에다 통신을 해서 다 당신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그 결단이라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봅니다. 지금 한 사람만 도우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면 이 보이지 않는 데서 망이 다 이렇게…, 음파가 통한다는 말입니다. 음파가 통하면 통하는 대로 모든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보이지 않는 데서 다 응해 주십니다.

질문자3(남) 감사합니다.

함이 없이 하라. 내가 한다는 말 없이,
내가 산다는 말 없이, 내가 죽는다 산다는 생각 없이
그냥 놓고 간다면 그것이 바로 벗어나는 길이다.

큰스님 동업을 한다거나 이런다면 좋지가 않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도 거기다가 관해 보면 ‘좋지 않다, 좋다’ 이게 나옵니다. 그렇게 하세요. 또는 그거를 그렇게만 나눌 게 아니라, 때에 따라서 그쪽이 나쁜 짓을 해서 내가 장사를 못 하겠다 하더라도 그쪽을 좋게 만들어 가지고 같이 하더라도 해라 이 소립니다.

질문자4(남) 저는 제주지원 심용회 회원입니다. 저는 제주지원 거사림 합창단을 잠깐 소개하고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주 불교계에 최초로 거사림 합창단이 지난 1월 26일 법형제를 중심으로 창단되었습니다. 그리고 5월 13일에는 제주문예회관에서 거행된 불기 2543년 부처님오신날 봉축 불교합창제에 보살 합창단과 혼성으로 참가하여 많은 찬사를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럼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법가를 배우고 음성공양을 하는 뜻은 어디에 있으며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큰스님 음성공양으로 보통 찬불가들을 하는데요, 이건 선법가입니다. 찬불가와 선법가는 다릅니다. 찬불가는 일체 음파가 법망에 통하질 않지만 이 선법가는 통합니다. 통하기 때문에, 노래라고 하지만 그것을 자꾸 부르면 그것도 아주 염원을 하는 관이 되죠.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기에 달린 거니까 생각을 크게 넓혀라 이거죠. 넓히면 넓히는 대로 나한테 이득이 오고 상대방에 이득이 간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도 이 선법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단합이 될 수 있고…. 이 선법가가 얼마나 좋습니까? 딴 데서 그렇게 선법가를 잘 지어서 법문으로 듣게끔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선법가를 여러분께서 한 곡 한 곡 부르실 때 보면은 너무나 기쁘고, 그냥 그 운기가 김으로 올라가서 불이 하늘을 두루 붙이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을 넓히는 게 지혜를 넓히는 거와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버리지 말고 한다는 거, 또 모두 공심으로써 함이 없이 살아라’ 하는 이런 뜻이 바로 놓고 가는 겁니다. 함이 없이 하라. 내가 한다는 말 없이, 내가 산다는 말 없이, 내가 죽는다 산다는 생각 없이 그냥 놓고 간다면 그것이 바로 벗어나는 길이다 이런 얘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 때에 허무한 생각도 좀 들고, 무상한 생각도 들고, 좀 고난이 심하면 살기 싫은 때도 있고, 조용한 데로 가서 좀 있고 싶은 생각도 있을 테고 여러 가지가지죠, 뭐.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그걸 응용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는 것도 너 아냐!’ 하고선 딱 책정을 해 놓으면 그게 그대로 화해집니다. 화해지고 넓어지고 그대로 웃어지고 그대로 편안해지고 그런 거죠.

그래서 우리가 될 수 있으면 선법가를 요만한 애들한테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지금 애탄지탄하며 사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공부가 채 뭔지도 모르고 병이 들어서 어쩔 수가 없이 왔다가 이제 조금 알았다고 그러는 분도 있고 다양하죠, 뭐. 그런데 가만히 보면요, 각 지원의 여러분이 공부들을 얼마나 잘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제주지원에 계신 분이 지금 나오셔서 질문했는데 그만큼 하고 가신다면 그, 공부 잘하시는 겁니다.

평상시에 그렇게만 하실 수 있다면…, 법사 스님이 아까 ‘국이 짜다’ 이런 얘기 했죠? 그런데 스님네들이 사는 데서는 짜면 그냥 물 타서 먹고요, 싱거우면 간장 타서 먹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이유가 없죠. 그래서 살아나가는 것도 다 그렇게 해라 하는 겁니다. 전자에 그런 얘기 많이 했죠, 내 탓으로 돌려라. 모두가 내 탓으로 돌려야지 남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일체제불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다. 어디에 가서 이 부처 저 부처 찾을 게 아니라 일체제불의 마음들이 전부 내 한마음에 있으니 내 한마음 속에서 다 용도대로 써라, 이런 겁니다. 일체 만물이 내 한마음 속에 들어 있으니까 용도대로 꺼내 써라. 이렇게 간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지구 공장에서, 인간 만드는 공장에서 이거는 죄가 있어서 미생물로 나오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미생물로 나와서 성장을 해서 인간까지 와야 사람이 되니까요. 도리를 모르니까, 업보가 있어서 고생을 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그대로 우리가 인간이 될 때까지 그렇게 치열하고 그렇게 어렵다는 뜻이죠. 인간 하나가 불쑥 태어난다 해서 인간이 아니죠. 얼마만큼 해서 인간이 됐느냐? 즉 말하자면 축생으로부터 이렇게 나왔느냐? 또 저런 나무들, 목성에서 나왔느냐? 아니면 물에서 나왔으냐, 흙에서 나왔느냐? 이 문제는 자기가 살아온 대로, 용도대로 주어진 거니까요.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모습들이 다 나오는 거니까요.

그래서 내가 못나게 나와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해서 못나게 나온 거는 자기가 일부러 그런 거지만,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그냥 못났으면 못난 대로 나오고, 까치 둥우리에서는 까치로 나오고 그렇게 그냥, 이걸로 들어가면 이걸로 나오고 이렇게 된다면 그거는 사람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거죠. 진짜 사람이라면 어떤 거를 알아야 되느냐? 종교라는 이름만 가지고 다녀야 되느냐? 아니다. 진리를 참구해야 그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도리를 알아야만이 우주 법계의 모든, 즉 말하자면 법망을 다 자유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 법망에 걸림이 없다 이 소립니다.

아무리 승려들이 못났든 잘났든, 일단 신도들이 볼 때는 그저 자기 주인공과 둘 아니게 봐라. 스님네들만 그렇게 보라는 게 아니에요. 상대방을 모두 자기와 같이만 봐라. 자기와 같이 보면 손해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는데 꿈을 꾸었더래요. 너무 찌들려서 살다 보니까, 꿈을 꾸었는데 조상들이 다 나타났더래요. 그래서 “스님이 조상님네들도 둘이 아니라고 그러셨는데, 둘이 아닌데 뭐 그렇게 성가시게 하고 그렇게 괴롭게 살게들 하느냐?” 이러니까 조상들이 나왔다가 다 싹 없어지더라는 거예요. 없어져서 그냥 연기처럼 해서 자기한테로 다 그냥 들어가더라는 거예요. 들어가니까 겁이 나 가지고 뛰어온 거예요. “연기처럼 해 가지고 저한테로 다 들어왔으니 이걸 어떡합니까?” 하고요. 그래서 “허허허…. 연기처럼 들어갔다면, 네 영에다가 영이 연기처럼 해서 들어갔으면 그게 영이 몇 개나 되겠느냐?” 하니까 “영은 영이죠, 그냥.” “그러면 됐지 않느냐? 그랬으면 벌써 너의 몸으로 인해서 재생이 돼서 나간 것이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랬죠.

그러니까 스님네들도 모두 그렇지만 다 가족들이 있잖아요?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예전에 부처님께서는 입산을 하러 오면 그거부터 물어보셨답니다. “너는 왜 한짐 짊어지고 왔느냐?” “전 하나도 가진 게 없이 그냥 왔습니다.” “너, 너의 식구를 다 짊어지고 오지 않았느냐? 짊어지고 온 거 다 벗어 놓고 오너라.” 이럭하시더라는 거죠. 그래서 다 떼어 놓고 해결을 하고 또 몇 달 만에 오니까 “아니, 그거는 떼어 놨지만 재산 문서를 왜 죄 짊어지고 왔느냐?” 그러니까 얼마나 그 마음이 진정코 공부하려고 들었던지, 돌아가서는 그 재산을 죄 그냥 배에다 싣곤 바다로 나갔더래요. 바다로 나가서 바다에다 다 집어넣으려고요. 있던 물품도 뭐, 그냥 전부. 그러니까 집에서는 식구 다 죽게 재산까지 가지고 가려고 그러느냐고 야단들을 하니까 “이렇게 해야만 식구가 다 산다.” 그러곤 나가서 배를 바다에다 띄우려고 그러니까 공중에서 그냥 소리가 나더래요. “함이 없이 하라니까, 물건에 뭐가 붙었다고 그걸 갖다 버리느냐?” 그래서, 함이 없이 하고 착을 버리라는 말씀에 그걸 도로 실어다가 집에다 갖다 주고선 그냥 가니까 그때서야 부처님께서 받아 주시더래요.

우리 스님네들도 속가 걱정을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단호하다면, 그냥 단호하게 맡길 수 있다면 그건 그만이거든요. 그것처럼 빠른 게 없어요. 그러니까 스님네들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도 그렇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지금 여기도, 정말이지 공부하려고 하는 분들의 조상님들은 다 같이 와요. 내 이런 말을 하면 무슨 소리냐고 그럴까 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공부 좀 하려고 노력하는 분들의 조상님들은 그냥 고마워서, 자식이 그렇게 하고 손주가 그렇게 하니까 고마워서 그냥 따라 오는 분들도 많아요. 그러니 한 사람으로 인해서 수천수만이 다 건져지는 거예요. 한 사람이 몇 생이나 되겠습니까? 수천 생이 됩니다, 이 몸속에도. 그게 인과거든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이 지구라는 인간 만드는 공장에서 벗어나야 우리가 자유껏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근본에 있는 에너지로 그냥 우리는 자유스럽게, 때로는 이 모습으로도 되고 때로는 저 모습으로도 되고 용도에 따라서 그렇게 하면서 이 우주 전체를 다녀도 손색이 없죠.

그뿐이 아니에요. 이 삼세가, 과거 현재 미래가 바로 현실이거든요. 과거 미래가 현실이란 말입니다. 내일이다 하는 교차로가 있을 뿐이지, 어저께다 하는 교차로가 있을 뿐이지, 그 교차로라는 것만 알면은 그냥 이렇게 하나죠, 그냥. 하난데 ‘그 하나도 모두 공했으니까 너까지도 놔라. 너가 있단 말도 하지 마라. 너도 공했다. 삼세가 공했으면 너도 공했고, 네가 공했으면 네 몸뚱이 속에 있는 의식들도 다 공했다. 다 공했으면 함이 없이 그냥 하고 있는 거니까 너는 죄도 없고 업보도 없고 인과도 없고 유전성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너가 없는데 뭐가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께서 이 도리를 진정코 알아서 공부해 나가신다면 그 유전성이 폐제(廢除)가 되기 때문에 그 악화된 아픔, 병세 이런 것도 없어질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공부 한다고 해서 아주 잘살게 된다는 게 아니라 고통을 받지 않고 살게 되고, 또 진짜로만 믿고 그렇게 나가시는 분들은 자연적 웃고 살게 되고 생활도 지치지 않게 하고 가게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자꾸 업보가, 인과성, 유전성 모두가 다 무너지니까, 구름이 다 걷히니까 햇볕이 짱짱 비쳐서 내 젖은 모습을 다 말려 준다 이런 뜻과 같죠.

그래서 배운 글자로, 학식으로만 해서는 이 공부를 못 하죠. 학식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지식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우리는 지수화풍을 베개 삼아서 나온 거니까요. 우리는 지수화풍에서 그냥 꼼짝없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요. 피만 조금 안 돌아도 야단법석이죠? 물 한 컵 먹을 것도 없으면 야단법석이죠? 불이 없어 보세요, 또. 불만 없어도 야단이죠? 공기가 없어 보세요, 또. 그냥 죽죠, 뭐. 그러니까 모두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수화풍 그 자체가 우리다 이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더 사실 수가 있었는데 그거를 아난이 채 못 알아들어서 좀 더 사시다가 가시라고 그런 말을 못 했답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데 그걸 못 알아들어서…. 그러니까 자기가 죽고 싶어서 죽고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에요. 남이 원하면 원하는 것까지 해결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거보다 더 큰…, 꼭 가야만 된다 할 때는 가야 되겠죠. 이거는 양면의 살림살이뿐 아니라 두루 살림살이니까요. 만약에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전체에 두루 책임이 주어져서 있다면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야죠. 그런데 그 마음으로 뛰는 건요, 하나도 괴로움이 없고 하나도 걱정이 없고 하나도 하는 게 없고, 하는 게 없으면서도 진실로써 그냥 되는 거죠.

딴 데서 천도를 하고 왔다 이러는데도 그 조상님네들은 그냥 거기 갇혀 있지 않으면 그냥 떠돌고 이러거든요. 그것을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진정한 마음이라야 되죠. 똑같은 염불을 해도 지극한 마음으로 주인공에다가 관하면서 열심히 하는 거하고, 그냥 주인공에다 관하고 하는 거하고, 관하지 않고 그냥 대충 하는 거하곤 다르죠. 만약에 신도가 똥을 누다가 그냥 왔다고 그래요. 그럼 밑을 딱 씻어야 되지 않겠어요? 밑 씻는 것까지 참견을 해야만 되겠죠. 그래야 아주 편안하게 나을 수 있죠.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되죠.

내가 매끈하게 얘긴 못해도 그냥 내가 실천해서 아는 대로 얘기를 하는 거니까 그대로 믿어 주세요. 그것이 진정코 진실이니까요. 어떤 땐 이런 생각을 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못 배운 거를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상당히 고달프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죠. 그러다 어느 때에 타다 남은 숯이 하나 있었는데 그 숯을 집어서 그냥 글을 쓴 거예요. 글자는 모르고 쓰기는 멋지게 써 놓은 거예요. 글자를 모르는데, 내가. 그럼 여러분이 그렇게 됐다면 그런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자는 모르는데 그냥 숯으로다가 한문으로 멋지게 글을 써 놓았다면 그걸 누가 봐 줘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주인공 속에서, 즉 말하자면 내 과거, 바로 불성 자체가 연결이 돼 가지곤 ‘글자를 알려고 하지 마라. 글자를 알아도 그 소리, 글자를 몰라도 그 소린데 글자는 알아서 뭘 하느냐? 글자가 누구 하나를 건져 줄 수 있는 거냐? 글자 하나가 누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거냐? 네 마음이다. 못 배웠든 배웠든 네 마음이니까 그대로 해라.’ 하고 일러 준 거죠.

산에 다니면서도 그때는 참, 동네에 내려가서도 얻어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 그때는 모두 먹을 게 너무 없었어요. 그래서 그것도 큰 소나무가 아니라 조그만 소나무들인데 물이라도 좀 빨아 먹으려고 했으면 위에 있는 순을 뚝 잘랐을 거예요. 그런데 생각이 있거든요. 그것도 생명인데 위의 순을 딱 떼어 놓으면 내 머리 떼어 놓는 거와 같더군요. 그래서 ‘너하고 나하고 만난 것이 바로 인연이 아니겠느냐.’ 하고선 그 맨 밑에 있는 가장자리 거를 떼었으니 거기서 물이 뭐가 그렇게 나오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물도 안 나오는 거를 껍데기를 벗기고선 빨아 먹고 이렇게 해 본 예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야 되는 게 아니라 적게 먹어도, 물 한 모금을 마셔도 그게 만약에 빵으로 된다거나 이런다면은 그냥 배고프지 않죠. 이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모두가.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그믐밤에 풀숲에 앉았어도 십 리 안팎으로는 어느 거든지 거기를 범접치 않는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뱀이었거든요, 허허허…. 처음에는 뱀이 보이면 상당히 무서웠는데, 언젠가 지나가다 보니까 샘터 옆에 큰, 뱀이라고 그럴 수가 없죠, 크니까. 구렁이가 이렇게 뚤뚤 뭉쳐서 머리만 딱 들고선 있어요. 그런데 아니, 목이 말라서 물을 먹으려고 그러는데 ‘이게 더러운 거냐, 깨끗한 거냐?’ 이렇게 묻는 거죠. 그래서 ‘목이 마른데 더럽고 깨끗한 게 어디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급하면은 이거보다 더한 것도 먹을 수 있는 건데 어떻게 더러우냐 깨끗하냐 이걸 묻느냐고 그랬어요, 외려. 반문을 했다고요. 그랬더니 ‘그것이 깨끗하지 않으니까 거기다 똥 마려우면 똥을 눠라.’ 이러는 거예요. 만약 지금만 같아도 문제가 없었겠지만 옛날에 나이 적었을 때 그런 문제가 일어났으니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런데 문득 생각이 나기를 ‘어, 일체 사람이나 짐승들이나 더럽고 깨끗한 것이 따로 없구나. 새는 새대로 사는 생활과 삶이 있고, 사람은 사람대로 삶과 모습이 있고, 모두가 제각기 모습이 있고 삶이 있는데 뭐가 다르냐, 그게? 그러니까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는 까닭에 그걸 가르치기 위해서 똥을 누라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이 나니까 싹 또 그게 없어지더군요.

그 구렁이가 보이는데 구렁이가 이렇게 고개를 들고 나만 노리고 쳐다보고 있어요. 아, 그러니 글쎄, 그거를 같이 앉아서 들여다보고 있었죠, 생각이 날 때까지. 영 일어나지도 않고 눈도 이렇게 돌리지도 않아요. 그러니 뭐, 그거 얼마나 무섭겠어요? 허허허…. 아이, 그냥 똑바로 마주 쳐다보고 있는데 아니, 얼마쯤 앉아 있으니까 그 지금 고개 들고 있는 구렁이가 똥그랗게 있는 모습과 길게 가는 모습이 생각이 나요. 생각이 나면서 ‘응, 기어가면 한 일(一) 자고, 뚱그렇게 뭉쳐서 머리 들면 흰 백(白) 자고, 이것이 그냥 뚱그러면 이 우주 전체가 다 하나로구나. 하나라고 가르치는 거로구나. 저게 나를 가르치려고 이랬구나. 저것도 바로 내 주인공과 둘이 아니야. 너도 그렇지?’ 그러는데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그냥 가 버려요, 그 생각이 나니까. 그때부터 그렇게 무섭질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마주 쳐다본 게 한 너덧 시간 됐을 거예요. 생각이 안 나니까, 내가 얼른 생각이 났으면 그게 얼른 갔을 텐데, 지금 생각을 하니까 내가 생각이 날 때까지 그러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구렁이든 뭐든, 내가 무서워하니까 무서워하는 모습으로는 영 보여 주질 않았어요. 그리고 뜻으로다가 이렇게 만나게 하고 그랬죠. 여기 처음 이사 와서도 눈이 자박자박하게 왔는데 발자국이 탁 나 있어요. 산에서 토굴에 있을 때 만났던…, 앉았다 간 자리가 이렇게 있고 그래서 ‘어이, 왔다 갔구나. 이렇게 모습으로 오지 않아도 될 텐데 넌 왜 모습으로 왔니?’ 그랬죠. 그랬더니 그때부터는 모습으로 안 오고….

이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에 여러분이 이 공부를 하면서 이 도리를 아신다면은…. 참, 사람이 짐승이 돼서 짐승의 대접을 받고 사는 것들을 또 봐 보세요. 그걸 아신다면 그런 짐승들을 보면 뭐, 그냥 지나가지 않게 되죠. 사람이 됐다가 짐승이 돼서 산다면…. 개도 그런 개를 봤거든요. 그리고 또 짐승이 사람으로 된 사람은 많고요. 처음으로 사람이 돼서 살면서 사람으로 또 태어나기가, 재생되기가 상당히 어려운 거예요. 우리가 살면서 이런 도리를 좀 알고 가야 이게, 사람으로 태어나서 또 한 번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세 번을 죽어서 거듭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이 부처님의 그 한자리를 한다고 그랬거든요. 여기고 저기고 간에 똑같이, 그런 분들에 한해서 마음공부들을 하시는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하시다 보면 이제 이다음에는 ‘이건 죽어도 살아도, 떠나고 헤어지고 이런 것이 없구나. 은하계가 그렇게 많고 우주가 그렇게 많아도 떠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 떠나고 하는 게 없이 헤어지고 떠나고, 이렇게 하면서 찰나찰나 화해 가면서 이렇게 사는 거구나. 자유스럽게 사는 거구나!’ 하고 그럴 때는 내 생각도 많이 나시겠죠. 허허허….

그럼 감사합니다. 모두 여러분께서 이 공부를 열심히 하시기 때문에 참 감사하기 짝이 없어요, 아주. 무식하니까 무식하게만 만날 말을 하죠. 그렇지만 무식하더라도 이해하시고 그대로 적응해 주신다면 그대로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9년 10월 3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 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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