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자비다선 차명상
1) 대자유로 인도하는 차명상

오늘부터는 자비다선 차명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명상의 목적은 고통, 즉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 대자유를 얻는 것이다. 명상을 통해 수행자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이 마음에서 비롯됨을 알고 마음에서 시작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여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명상은 힘든 순간에도 인간 스스로 지탱하여 무너지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하며, 희망의 의지를 줌으로써 삶 속에서 멍들고 짓눌린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고통에서 해방되거나 다가올 고통을 예방하여 신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사회에서 명상이 가지는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이 갖는 이러한 의의는 곧 차명상의 그것과 같다.

또한, 차명상은 다른 명상법과 비교하여도 상대적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적합한 명상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차명상은 현대인들에게 있어 압도적으로 우월한 접근성을 가지는 수행법이라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방법을 제시하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자기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상대를 이해하는 자비심, 그리고 존재의 근원을 꿰뚫어보는 일미(一味)의 지혜를 얻도록 한다.

커피는 열매, 차는 잎이어서
각각 수렴·발산 의미 나뉘어
땀나고 몸 가볍게 하는 차는
번뇌 약하게 하는 데 도움 돼

사람은 본성이 공하여 높낮이가 없어 평등한 존재이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늙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불평등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에 익숙하거나, 인정하면서 몸과 마음을 불평등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한다. 우리가 불평등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기준은 심리적 요인과 관습적인 요인의 영향이 크다.

심리적 요인으로는 자기 스스로를 타인에 비하여 높다고 판단하여 거만하거나 우쭐해하는 것이고, 반대로 자기 스스로를 타인에 비하여 낮다고 판단하여 주눅 들어 있는 상태이다. 관습적 요인으로는 사회적으로 습관적·학습된 불평등의 결과물로 남녀, 나이, 계층, 종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높낮이는 우리 인간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높낮이는 진실이지도 않고 우리에게 아무런 이익을 주지도 않는다. 우리 삶 그대로 표현되는 남녀, 나이, 계층에 속박되어 살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과 이 사회의 무지에서 시작된 것이고, 이는 일미의 지혜가 없어서 벌어진 결과일 뿐이다. 일미의 지혜는 모든 존재를 상호의존, 평등으로 보게 하고 불평등에서 야기되고 있는 테러, 전쟁, 환경오염, 성차별, 계층 간의 차별, 인종차별 등에 비판적 시각을 갖게 한다. 이를 개선시킬 실천적인 행은 자비심이다.

자비심은 중생연자비에서 법연자비, 무연자비로 상승한다. 이 자비로써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는 일미를 실천한다. , ‘지각 있는 모든 유정을 도와주는 자비심이다. 또한 이 자비의 지혜로써 마음의 본성을 덮고 있는 단단한 번뇌와 무명껍질에 균열을 내고 그 틈새로 불공의 일미가 표출되면서 최종에는 범부가 성인으로, 중생이 붓다로 전환한다. ,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어 보는 일미의 깨달음과 대자유를 성취하는 것이다.

처음 지각 있는 모든 존재를 대할 때는 자기의 업() 때문에 평등을 이해한다고 해도 자기와 있는 인연 있는 존재들에 대해 더 친밀감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 다르마에 대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자비심으로 모든 생명을 반연할 뿐인 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이다. 그렇지만 중생연자비에서 차명상을 통하여 상호의존, 무상, , 무아, 공에 대한 이해가 익어지고 체험이 분명해지면서 지각 있는 존재들을 상호의존, 무자성, 공 등 법으로 생명을 보기 시작한다. 즉 체험적으로 평등으로 대하기 시작하는 법연자비(法緣慈悲), 이 법연자비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주객이 사라진 공성 하나로 꿰뚫어 보는 지혜와 공성에 입각한 자비삼매 속에서 주객이 사라진 진정한 평등을 깨닫는다. 그래서 인식대상이 없는 무연자비(無緣慈悲)라는 최상의 경계를 모든 생명에게 실천하게 된다. 이 무연자비를 차명상으로써 성취하는 방법이 바로 자비다선이다. 결과적으로 차명상의 틀이 작용하여 자비심을 일으키게 한다. 자다선(慈茶禪) 비다선(悲茶禪)은 이러한 차명상의 특징을 더욱 잘 보여준다.

다도와 선다, 그리고 다선
차명상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다도(茶道), 그리고 선다(禪茶)와 다선(茶禪)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다도의 도()는 진리라는 뜻이 있지만 또한 수단, 방법의 뜻이다. 그래서 다도는 차 마시는 방법, 차의 색과 향과 맛을 보는 방법 등의 뜻이 있다. 그리고 요즘 많이 사용하는 선다(禪茶)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다선(茶禪)과 혼동되고 있다. 선다와 다선은 차와 명상이 결합한 단어로, 선다는 다법(茶法)을 강조하고 다선은 선법(禪法)을 강조한다. , 선다는 선을 이용하는 다법이고 다선은 차를 이용한 선법이다. 선다는 차()가 중심이 되므로 차의 종류, 차를 마시는 순서와 방법 등을 중시하는 반면, 다선은 차()가 보조적인 역할을 하므로 다법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차명상의 경우 차를 매개로 하는 명상이므로 일반적으로 차명상으로 지칭되는 것들은 다선의 다른 이름이다.

다선의 차명상은 선()하는 스님들에 의해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다. 차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차를 접해도 선을 모르는 분들은 다선을 알리가 없다. 더욱이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의 조사선(祖師禪), 간화선 수행자에게는 차를 마시면 그대로 다선이 되기 때문에 구체적이 다선법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선승(禪僧)들이 앉으면 좌선이요 걸어가면 행선이 되고 차를 마시면 다선이 되기 때문이다. 굳이 다선(茶禪)하는 방법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헌에도 다선의 구체적인 수행방법이 제시된 것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다선일미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기록이나 끽다거라는 선문답이 조사어록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 수행을 모르는 요즘 사람들 대부분은 다법은 알아도 차를 통한 선법을 모르기 때문에 선을 모르는 분들의 다도나 선차하시는 분들은 모두 다법 중심으로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선수행자의 다선의 영향으로 다법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고 상징할 뿐이다. 중국, 일본, 대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차명상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는 지금까지 다법 중심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바로 다선 차명상의 등장 때문이다. 1998년 송광사 강원에서 학인들을 대상으로 차를 매개로 한 수행법을 강의한 내용을 정리하여 1999년에 찻잔 속에 달이 뜨네라는 차명상법이 발간되고, 2001BTN불교TV에서 차수행법을 강의하면서 차명상법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차와 수행의 관계를 연구하였고, 차 마시기가 생활의 고상한 취미 수준을 넘어서 수행이 될 수 있는 차명상 방법을 최초로 체계화시켜 그 효용을 제시했다. 차명상 수행법인 다선일미 차명상자비다선을 통해 차명상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상담전문가 1급 자격을 갖춘 마음치유 상담전문가이자 불교방송 우리는 도반입니다프로그램의 인기 진행자인 선업 스님은 1990년대 중반부터 차담을 통한 소통대화법으로 마음치유에 차명상을 접목하여 활용하고 있다. 그의 차명상은 차명상이 아닌 차담명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차를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공감과 나눔에 의미를 두고 있다.

지장 스님은 차가 어떻게 마음에 작용하는지에 대해 초기불교수행론의 방법을 활용하여, 대중이 쉽게 명상에 다가갈 수 있게 앞장서고 있다. ‘차명상이라는 현대적인 용어는 2005년 지장 스님이 초의차명상원을 개원하면서 공개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는 미얀마 등지에서 명상 수행을 직접 경험하고 차명상의 원리를 연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승가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차명상은 그 이름을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었다. 2010325일 지운, 지장, 선업을 중심으로 하여 사단법인 한국차명상협회가 발족하면서 차명상이 본격적으로 출발하였고, 그 산하에 현재 약 500여 명이 활동 중이다. 이외에도 각 사찰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 차명상 및 차문화 관련 단체,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 등 공공기관의 부설기관, 각 대학의 평생 교육기관 등에서 진행하는 차명상은 그 이름을 대중적으로 확장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차명상은 대중적인 명상방법으로 자리 잡는 추세이다.

차가 명상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은 커피와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차와 커피의 비슷한 성분을 가지고 있다. 차이는 커피는 열매이므로 수렴의 뜻이 있고, 반면 차는 잎으로 만드는데 발산하는 성질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커피는 마셔도 땀이 잘 흐르지 않지만 차를 마시면 몸에 땀이 흐르고 몸이 가벼워지는 현상이 생긴다. 그 이유는 바로 차가 기운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커피와 다른 점이고 명상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차의 기운이 몸의 기혈을 뚫어주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여 몸의 기운이 일어나고 몸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번뇌의 힘이 약해짐을 뜻한다. 마음과 기운은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연재에는 마음과 기운의 관계를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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