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담(81·교림출판사 대표)

서우담 대표는… 1970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출가했다. 삼덕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환속 후 1979년 교림출판사를 설립해 스승인 탄허 스님의 유업을 받들어 40여 년 간 탄허 스님의 저술을 출판해왔다.

 

선지식 탄허를 만나다
20세 때 월정사서 출가
탄허 문하서 한문 공부
한문경전 이해 두각
이른 시간 수제자로
〈신화엄경합론〉 출간 위해
해인사서 3만 배 기도
1974년 〈신화엄경합론〉 출간

 

1983년 6월 5일,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 50여 명의 수좌들이 모여 있다. “스님, 여여하십니까?” 시봉 상좌가 스승에게 여쭈었다. 스승은 그러하다고 답하고 원적에 들었다. 5년 전 본인의 예언대로였다. 원적에 든 스승은 한국불교사에서 방대한 역경불사와 유불선 3교 회통 사상으로 불교의 가치를 높이는 등 한국불교사를 넓힌 탄허(1913~1983) 스님이다. 그렇게 스님은 한국불교사에서 대작 중의 대작 불사를 이루고 원적에 들었다. 그런 스님의 대작이 한 시대의 불사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대작의 가치를 알아본 밝은 눈과 남다른 원력불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의 방대한 역경불사를 보다 많은 대중이 누릴 수 있도록 출판불사를 이어온 도서출판 교림의 서우담 대표가 그 밝은 눈과 원력불사의 주인공이다. 40여 년 탄허 스님의 역경 원고만을 책으로 만들어 온 그 불사 역시 한국불교사를 또 한 번 넓힌 대작 불사다.

또 한 번 칠엽굴… 교림출판사
서울 종로구 경운동 건국빌딩 본관 202호. 서 대표가 탄허 스님의 대작 불사를 다시 대작 불사로 이어온 교림출판사다. 문 앞엔 ‘도서출판 교림’과 함께 ‘화엄학연구소’라는 현판이 함께 붙어있다. 화엄학연구소는 1973년 탄허 스님이 서울 종로구 낙원빌딩에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1979년 그곳에서 도서출판 교림의 역사도 시작됐다. 그리고 1980년 화엄학연구소와 교림은 지금의 건국빌딩으로 자리를 옮긴다.

서 대표는 이곳에서 탄허 스님의 육필 원고(역경)를 정리하고 출판하며 평생을 보내고 있다. 탄허 스님은 이곳에서 말년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춘성, 고암, 경산, 청담 등 당대의 선지식들을 이곳에 만났다. 또한 한 시대의 많은 고민대중들이 스님의 법을 듣기 위해 찾았던 곳이다. 작은 공간이지만 역사에 관여한 많은 이야기들과 생각들이 오고 간 역사적인 공간이다.

그 역사적인 작은 공간 한 구석엔 또 하나의 역사가 쌓여 있다. 아니 잠자고 있다. 그동안 교림에서 출간된 책들의 인쇄용 필름 원판들이다. 〈신화엄경합론〉 등 탄허 스님의 글자들이다. 그 필름들은 대작 불사라는 불교사적 의미와 더불어 출판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작된 사진식자 인쇄용 필름이기 때문이다. 교림에서 출간된 탄허 스님의 경전들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출판사적으로도 의미가 큰 것이다. 서 대표는 출판사 한 구석에 쌓여 있는 필름 박스들을 가리키며 “저 기록들은 문화재가 되어야 할 것들이다”며 “작은 출판사 구석에 쌓여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고 안타까워했다.

출판사 벽엔 탄허 스님의 사진과 육필 원고 사진들이 걸려있다. 그리고 벽면 한 쪽 서가엔 그 동안 교림에서 출간한 탄허 스님의 책들이 꽂혀있다. 이제 더 이상 교림은 출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림은 역사적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속에서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처님 열반 후 부처님의 말씀으로 가득 했던 칠엽굴처럼 교림이라는 작은 공간엔 부처님의 말씀과 ‘탄허’의 글자들로 가득하다. 그때는 아난이었고, 지금은 우담이다. 또 한 번 칠엽굴을 본다.

1966년 12월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열린 대학생불자연합회 수련회에 참석한 탄허 스님(두번째 줄 왼쪽서 다섯 번째)과 서우담 대표(첫 번째 줄 왼쪽서 첫 번째).

 

출가… ‘탄허’를 만나다
서 대표는 스무 살에 출가했다. 스무 살, 그때나 지금이나 그 시절의 ‘세상’이란 하 수상한 것. 스무 살의 서 대표 역시 피는 끓고 또 끓었고, 시절은 하 수상하기만 했다. 그렇게 끓고 또 끓는 스무 살 서 대표의 비등점은 ‘불연(佛緣)’에 가 닿았다. 서 대표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던 탄허 스님을 스승으로 하여 머리를 깎고 불가의 이름을 받는다. ‘우담’은 탄허 스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이다. 당시 해인사 대중이던 법정 스님의 인연으로 서 대표는 탄허 스님의 글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글자를 위해서, 그 글자에 의해서, 그 글자로 살고 있다.
“처음엔 탄허 스님이 받아주시질 않았어요.”
서 대표는 대학 선배인 법정 스님의 도움으로 오대산 월정사에 주석하고 계신 탄허 스님을 찾았지만 탄허 스님은 서 대표를 선뜻 받아주지 않았다. 인연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풀렸다. 선조들의 인연이었다. 서 대표의 16대 선조는 조선의 천재 유학자로 불렸던 서화담이었다. 그리고 탄허 스님은 화담의 수제자 토정의 16대 집안의 사위였다. 탄허 스님과 서 대표는 서로의 내력을 알게 됐고, 서 대표의 가계를 알게 된 탄허 스님은 비켜섰던 마음을 고쳐 서 대표에게 물었다.
“공부할 수 있겠느냐?”
“네, 할 수 있습니다.”
사제의 인연은 그 두 문장이면 충분했다. 그 자리에서 서 대표는 삭발염의했다. 공부의 시작은 ‘한문’이었다. 족보의 덕이었을까. 서 대표는 한문과 잘 맞았다. 서 대표는 3개월 만에 탄허 스님이 붙여준 사수를 뛰어 넘는다. 그리고 탄허 스님의 그림자와 점점 가까워진다. 서 대표는 한문에 있어 빨랐다. 덕분에 한문경전에 대한 이해력과 기억력이 어느 누구보다 빨랐다. 이를 본 탄허 스님은 서 대표에게 서화담이 다시 왔다는 뜻의 ‘우담(又潭)’이라 이름을 주었다.

위대한 불사 탄허의 〈신화엄경합론〉
당시 산문에서의 공부는 한문이 첫 번째 산이었다. 모든 경전이 한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불교는 중국을 거쳐 왔다. 그 시작이 한문일 수밖에 없다. 그 산을 넘어야 경전을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 대표는 “지금도 한문으로 된 경전을 온전히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승과 속을 통틀어 10%도 안 될 것이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사문에게 있어 경전을 읽어야 하는 일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그 한문이라는 산을 넘으며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문제는 쉬워진다.

그 산을 먼저 넘어선 이가 스승이 되어준다면 문제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스승’이라는 말이 딱 필요한 대목이다. 그 대목에서 가장 먼저 불러야 할 이름이 ‘탄허’이다. 탄허 스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대선사이자 대강백이다. 특히 역경과 교육에 쏟은 원력은 따라올 이가 없을 것이다. “법당 100채를 짓기보다 인재 한 명을 기르는 게 더 낫다”고 했을 정도로 스님은 인재불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탄허 스님에게 역경과 교육은 하나였다. 스님의 업적 중 첫 번째로 꼽히는 방대한 양의 역경불사는 바로 후학들의 교육을 위해 시작됐다.

탄허 스님의 핵심 사상은 화엄사상이다. 그리고 〈화엄경〉은 강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부 중의 공부다. 본래 제목이 〈대방광 불화엄경(大方廣 佛華嚴經)〉인 〈화엄경〉은 우리 강원의 중요 경전이다. 산스크리트 완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대승불교 초기의 중요한 경전으로 한역본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60권 본(418∼420), 실차난타(實叉難陀) 역의 80권 본(695∼699), 이통현 역의 40권 본(795∼798)이 있다. 스님은 44세 때인 1956년부터 오대산 수도원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화엄경〉 번역을 시작했다. 10년 만에 번역을 마쳤고, 스님은 힘겨운 노력과 오랜 기다림 끝에 1974년 화엄학연구소를 만들고 〈신화엄경합론〉 47권을 출간한다. 번역을 시작한 지 18년 만에 이룬 불사였다. 그 불사의 중심엔 서 대표가 있었다.

탄허 스님의 〈신화엄경합론〉은 실차난타 역의 80권 본 〈화엄경〉과 이통현의 40권 본 〈신화엄경론〉을 합본한 〈화엄경합론〉에 대한 현토역해본으로 〈화엄경〉 관련 저술 287권을 집대성한 것이다. 원효 스님 이후 1300년 만의 집대성이다. 이 공로로 탄허 스님은 조계종 종정상과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제3회 인촌문화상을 수상한다. 이차돈의 순교 이래 최대의 불사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한국불교사에서 불사 중의 불사다. 하지만 당시 탄허 스님은 “하루 저녁 푹 잠을 자고난 기분으로 썼다”고 했다. 하지만 탄허 스님의 〈신화엄경합론〉은 결코 가벼운 불사가 아니었다. 하루에 14시간 씩 원고지 6만 3천여 장을 써야 하는 고행이었다. 탄허 스님은 생전에 총 20종 80권의 역저서(譯著書)를 남겼다.

대작 불사의 시작 화엄학연구소
탄허 스님의 방대한 역경 불사는 그렇게 후학들을 위해 시작됐다. 그리고 그 불사가 다시 산문을 넘어 사바의 많은 대중에게까지 닿을 수 있기까지는 서 대표의 불사가 있었다.

당시 경전의 출판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화엄경〉과 같이 방대한 양의 경전은 말할 것도 없었다. 탄허 스님의 첫 번째 출간물인 〈신화엄경합론〉이 나오기 전인 1970년, 서 대표는 탄허 스님의 〈신화엄경합론〉 원고의 교정 작업을 마친 뒤 3만 배 기도를 발원하고 해인사로 향했다. 개인 기도라는 이유로 해인사에서는 기도를 받아 줄 수 없다고 했지만 서 대표는 장경각 입구에 거적을 깔고 기도를 시작했고, 작은 다락방에 거처를 마련해 기도를 이어갔다. 이를 본 일타 스님이 불사의 중요성을 알아보았다. 일타 스님은 “탄허 스님의 불사는 신라의 원효 스님 이래 큰 불사다”며 서 대표의 기도를 대중공사에 부쳤고, 장경각의 문은 열렸다. 서 대표가 기도를 마치고 나서 출판 불사는 시절 인연을 만나기 시작한다. 화주가 시작됐다. 그리고 1973년 화엄학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많은 일들이 화엄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많은 인연들을 불러왔다. 그리고 마침내 탄허 스님의 〈신화엄경합론〉이 출간됐다.

 

산문 밖으로…탄허의 아난
1979년 교림출판사 설립
탄허 법어집〈부처님~〉 출간
강원 교재 제작 보급
〈신화엄경~〉 3차례 재간행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
40여 년 탄허 저술만 출판
“국내 최초 사진식자 출판
불교사·출판사적 의미 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화엄경〉
마지막 출판 계획 서원

 

산문 밖으로… 도서출판 교림
서 대표는 출가한 지 16년 만에 환속한다. 산문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서 대표가 환속은 했지만 육신의 거처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서 대표와 탄허 스님과 인연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탄허 스님은 〈화엄경〉을 출간하고 나서는 역경을 그만두시겠다고 하셨어요. 너무 힘드셨던 것 같아요.”
탄허 스님의 〈신화엄경합론〉 출간은 한국불교사에서 대작 중의 대작 불사다. 그만큼 어려웠던 불사였던 것이다. 18년이라는 세월은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세월이다. 탄허 스님의 심정에 다른 말을 갖다 붙일 수도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서 대표는 스님의 불사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우리 불교를 위해 스님이 해 주셔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스님, 어차피 〈신화엄경합론〉이라는 대작 불사를 회향하셨으니 나머지 경전도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님은 다시 마음을 내셨고 1979년 서 대표는 탄허 스님과 함께 교림출판사를 시작한다. 오직 탄허 스님의 역경 출판만을 생각한 출판사였다. 서 대표가 산문 밖에서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이었다.
“산문에 있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탄허 스님의 공부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그런 스님의 공부가 산문만이 아닌 산문 밖 많은 대중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교림은 현행 표준 교과과정 도입 이전 승가대학의 사미, 사집, 사교, 대교반 교재를 제작 보급했다. 탄허 스님의 법어집 〈부처님이 계신다면〉을 시작으로 1980년 〈초발심자격문〉, 〈치문〉, 1981년 〈능엄경〉, 〈금강경〉, 〈원각경〉, 〈기신론〉을 출간했다. 이후 〈주역선해〉, 〈도덕경〉을 출간했으며, 1976년 화엄학연구소에서 나온 〈서장〉, 〈도서〉, 〈절요〉, 〈선요〉를 재출간했다. 그리고 1974년 출간된 〈신화엄경합론〉을 3차례에 걸쳐 다시 출간했다. 2009년 가로쓰기 80화엄원문 현토 5권을 간행해 전세계 약 500여 곳의 동양학연구소에 기증했다. 2011년에는 세로쓰기 법공양본을 간행해 국공립도서관과 전국 사찰 강원에 기증했다. 그리고 2018년 화엄게송 현토역해 탄허본을 출간했다.
“스님 가시고 난 후 어느 날 꿈에 나타나셔서는 책이 떨어졌으면 다시 책을 더 찍어야지 왜 찍지 않느냐고 하신 적이 있었어요. 정말로 책이 다 소진되고 없을 때였죠.”
서 대표는 그렇게 다시 책을 찍었다. 어려웠지만 고마운 인연들이 책을 만들었다. 그렇게 도서출판 교림은 40여 년 간 탄허 스님의 글자만을 책으로 만들어 왔다. 부처님 열반 후 아난이 “如是我聞(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하며 살았던 것처럼 서 대표는 “나는 이와 같이 배웠습니다”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교림은 더 이상 책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서 대표는 마지막으로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마지막’이라고 했다.
“3년 전 쯤에 스님 한 분이 출판사를 찾아왔는데, 생전에 뜻은 다 알지 못하더라도 〈화엄경〉 한 번 온전히 읽어보는 것이 원이라고 했어요.”
서 대표는 바로 작업에 들어갔고, 탄허 스님의 가르침을 되살려 〈대방광 불화엄경〉 40품 59만여 자에 한글 음을 달았다. 하지만 그 옛날 그랬듯이 출간은 아직 시절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하루 빨리 부처님의 소중한 말씀과 탄허 스님이 이루어 놓은 위대한 글자와 이 시대의 아난인 우담의 원력이 좋은 시절인연과 만나기를 기원한다.

교림에서 출간된 탄허 스님 도서.
〈신화엄경합론〉 등 인쇄 필름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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