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명나라 중엽 소암덕보

화두 참구와 화두 염 결합
화두 참구와 염불 결합
해화(解話)와 화두 참구 결합

소암덕보(笑岩德寶ㆍ1512-1581)는 명나라 중엽 선종에서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임제종의 선사이며, 대혜종고의 간화선을 수정하기도 했다. 소암덕보의 자는 월심(月心)이고, 호는 소암(笑岩)이다. 속성은 오 씨이며 금대(金台)사람이다. 그는 명문귀족[錦衣世家] 출신으로 일찍이 부친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공맹의 서적을 배우지 못했고,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失讀孔孟之書, 缺承父師之訓). 그는 <화엄경> ‘십지품’의 한 구절을 보고 홀연히 출가의 뜻을 가졌다. 22세에 도문 광혜사(都門 廣慧寺)의 대적능(大寂能)선사에게 삭발하였고, 2년 후에 구족계를 수지했다. 그는 출가 후에 오랫동안 남북 각지를 유역하면서 고명한 선사들을 참방하고 선법을 익혔다. 그 중에서도 천기본서(天奇本瑞ㆍ?~1503)문하의 무문명총(無聞明聰), 대각원(大覺圓)과 대휴삼(大休三) 등 세 분의 선사들이 소암덕보에게 비교적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이 가운데서 무문명총(無聞明聰)의 법을 이었다. 그는 후에 홍법을 하는 과정에서 “인연 따라 교화를 하고, 주처를 정하지도 않았다(隨緣開化, 靡定所居)”고 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명진해내(名震海內)’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는 만력 5년(萬曆5年ㆍ1577)후에 연경유항(燕京柳巷ㆍ현재 북경의 어느 골목)에 은거했는데, 적지 않은 승려들이 찾아와서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그는 만력 9년(萬曆 9年ㆍ1581)에 입적했다. 지금 북경의 서직문(西直門) 밖에 안장했다. 어록으로 <월심소암보조남북집(月心笑岩寶祖南北集)> 4권을 남겼고 륭경년간(隆慶年間ㆍ1567-1572)에 간행되어 유통되었다.

소암덕보는 명나라 중엽에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선사로서, 당시 불교계의 추세로 볼 때 비교적 독자적인 한 파를 형성 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공안과 어록 가운데서 증오(證悟)를 획득하는 방법에 대해서 반대했다. 즉 그는 조금 독특한 견해를 가졌는데, <전등록> 혹은 조사어록 등은 해오(解悟)의 교량(橋梁)이 될 수 없으며, 반대로 오직 깨달은 이후에 비로소 모든 선지식들의 공안 어록 등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사의 깊은 뜻은 언구(言句)에 있지 않기 때문에, 언구(言句)를 의지해서 증오(證悟)를 구하면, 언구(言句)에 떨어지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즉 공안 어록을 참학하는 것은 명심견성의 바른 수행법이 아니라고 여겼다. 곧 깨달음을 얻은 후에 비로소 선지식들의 관점을 바로 이해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새롭고 획기적인 선법을 창조한 것은 없으나, 다만 한 가지 ‘모두 자기 자신의 몸을 관찰하라(審思于諸己躬)’라는 새로운 방법을 주장했고, 밖으로 구하거나 서적(어록)을 가지고 쟁론하지 말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 했던 자오(自悟)의 방법은 대혜종고가 발명한 간화선에 의지한 것이었다. 다만 그는 대혜종고의 간화선을 바탕으로 적지 않은 수정을 가하였기 때문에 그가 수정한 내용은 조금 새로운 창작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중요한 방법으로 세 가지의 내용을 제시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림, 강병호

첫 번째는 화두를 참구하는 것과 화두를 염하는 것을 결합한 것이다. 화두를 참구할 때 소암덕보 이전의 선사들은 화두를 들거나, 화두를 참구하거나 혹은 화두를 간(看)하거나 할 때 모두 내심(內心)으로 참구하기를 권했다. 즉 모두 하나의 화두에 집중하는 방법으로 기타 사유 활동 및 사량 분별을 소멸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소암덕보에 이르러서 ‘두구묵절(杜口切ㆍ입을 봉하고 침묵하다)’과 ‘출성추심(出聲追審ㆍ소리 나는 곳을 살핀다)’을 결합해서, 내심으로 참구하기를 요구했으며, 또한 입으로 염송할 때 어떻게 염송하는가의 세부적인 방법을 규정했다. 그는 입정(入定)을 실천하는 입장에서 볼 때, 소리를 내어서 염송하는 것이 내심으로 묵묵히 참구하는 것보다 더욱 더 심리적인 안정 및 입정에 이르기 쉽다고 보았다. 때문에 참선하는 자로 하여금 이러한 방법을 쓰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하나의 화두를 들 때 반드시 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즉 ‘일념을 일으키지 않을 때, 어느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 혹은 이르되, 일념이 일어나지 않을 때, 어느 것이 나의 본래면목인가?’라고 소리를 내서, ‘혹은 2회, 혹은 5회, 혹은 수회(數回)에 이르러서 묵묵히 심의(審定)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한 구절 한 구절이 분명해져서(字字分明),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되어서(不緩不急), 마치 귀로 친히 들은 것과 같고(如耳親聞), 마치 눈으로 친히 본 것과 같아서(如目親睹), 즉심즉념(卽心卽念)이 되며, 즉념즉의(卽念卽疑)되고, 즉의즉심(卽疑卽心)이 되어서, (저절로)마음의 의심을 분별하지 않게 되고(心疑莫辨), 흑백이 분명해지면((黑白不分), 하나의 응어리가 일성을 폭발해서(爆燃團地一聲), 명철한 견해로서 한바탕의 웃음거리를 밝힐 것이다.(灼見一場笑具)’고 했다. 즉 이때에 이르러서 문득 증오(證悟)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화두 참구와 염불의 결합이다. 염불은 정토종이 제시하는 수행의 기본 내용이며, 명대 중엽에는 적지 않은 선사들이 화두를 간(看)하는 것을 염불로 대신할 것을 주장했다. 또 일찍이 송대 이후는 ‘선정일치(禪淨一致)’가 유행하기 시작했었다. 오대 송초 시기의 영명연수선사는 적극적으로 염불을 참선에 도입해서 염불선을 제시한 적이 있다. 영명연수가 말하기를 “선도 있고 정토가 있는 것은, 마치 호랑이에게 뿔이 달린 것과 같다(有禪有淨土, 猶如戴角虎)고 하였고, 또 선은 있고 정토가 없으면, 열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은 길을 잃어서(有禪無淨土, 十人九錯路), 음경(陰境)이 홀연히 현전해서, 잠깐 사이에 다른 곳에 떨어진다.(陰境忽現前, 瞥爾隨他去)”고 하기도 했다. 즉 정토수행법과 선법수행을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다. 송대 운문종의 일대효승(一代孝僧)이라고 일컫는 명교계숭(明敎契嵩)선사도 일찍이 선정합일(禪淨合一)을 적극적으로 독려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송대로부터 명대에 이르기까지 선정합일을 주장했던 선사가 적지 않다. 때문에 소암덕보가 장차 참선과 염불을 결합하기 시작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으며,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바로 당시의 추세로서 그도 또한 그러한 환경의 영향을 충분히 받았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대적능(大寂能)화상에게 가르침을 구한 적이 있다. 대적능화상은 그에게 염불을 지도해 주었다고 한다. 또 그는 하남(河南)에 가서 대천(大川)선사를 친견한 적이 있는데, 대천선사가 그에게 말하기를 “염불에는 염불의 공덕이 있는데, 어찌 깨달음을 계발하는데 어려움이 있겠는가? 만약에 ‘무(無)’자 화두를 들지 않으면 아름다울 뿐이다.”고 하자, 그는 ‘무(無)’자 화두를 고쳐서 참구했다. 후에 또 제공(際空)선사에게 가르침을 구하자, 제공선사는 그에게 오로지 염불하기를 권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위의 세분의 선사로부터 계몽을 받았다. 그는 그의 어록에서 말하기를 “무자는 후퇴가 있는데, 도리어 염불은 매우 빠르다”고 하고 있다. 그는 최후에 가서 본인이 반복적으로 체득한 것을 근거로 참선을 실천하는데 염불을 수용해서 사용했다. 그는 사실 아미타불명호를 직접적인 ‘화두’로 사용하면서, 또한 기타 화두와 같이 취급한 것이다. 곧 그는 정토신앙을 선의 영역으로 융합해서 사용했다.

세 번째는 해화(解話)와 화두 참구의 결합이다. 그의 총체적인 사상은 바로 내성(內省ㆍ안으로 살피다)을 주장하고, 지해(知解ㆍ지식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와 사려를 반대한 것이다. 다만 해답(解答)을 요구하는 학인들에게는 완전한 거절을 한 것은 아니다. 근기에 따라서 가르침을 베푸는 방법을 채용했고, 응병여락(應病與藥ㆍ병에 따라서 약을 준다)의 제접 방법을 썼다. 그가 금릉(金陵ㆍ지금의 남경)에 있을 때, 어느 거사가 그에게 묻기를 “내가 만법공안을 참구한지가 벌써 반년이 지났다. 심중(心中)이 불쾌하니, 스님께서는 저를 대신해서 분명하게 파해주십시오”라고 하자, 그가 해답하기를 “만법귀일의 뜻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日歸何處)이며, 옛사람은 이것으로부터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자가 적지 않았다. 그 방법을 알고자 한다면, 문득 지금의 허공, 산하, 대지, 사람과 축생, 사물 내지 자기의 신심(身心)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이름이 모두 만법이 된다. 그 하나를 알고자 한다면, 지금의 사람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생불멸 묘적명심(妙寂明心)이다. 이것을 진심(眞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록 다명(多名)이 존재하지만, 모두 하나의 일심일 뿐이다”고 했다. 이 해답은 한사람의 거사를 위해서 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통해서 그의 선법 방편의 묘용을 알 수 있듯이 그는 매우 융통성이 있었고, 또한 매우 민첩하고 포용성을 함축한 선법을 전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소암덕보는 비록 어릴 적에 글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도리어 강해(講解)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고, 또 적재적소에 알맞은 언행으로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았다고도 한다. 일찍이 명총(明聰)스님이 그에게 묻기를 “본래 모든 사람들에게는 부모가 있다. 그대의 부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人人有個本來父母, 子之父母今在何處?)”라고 하자, 그는 게송으로 화답하기를 “본래 진짜 부모는 일찍이 만겁을 여의지 않았다(本來眞父母, 萬劫不曾離)”고 했다. 이른바 ‘본래부모’는 곧 본심불성을 가리키며, 이 게송은 그의 불성본유에 대한 관점과 명견본심(明見本心)의 견해가 어떠한가를 표현한 것이다. 명총 스님이 이 게송을 본 후에 “오직 이 하나의 게송이 감히 나의 종을 이었다(只此一偈, 堪紹吾宗)고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또 그는 임기응변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서 수문수답(隨問隨答)을 잘 했을 뿐만 아니라 게송과 시가를 잘 짓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을 가진 것은 명대 중엽에 유행하고 있던 선사들의 자질을 두루 갖추었다고 할 수 있으며, 게다가 전법종사의 중요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던 선사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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