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기수 나윤주

1960년대 말 대구교도소에는 사상범이 많았다. 내가 그곳에서 처음 만난 재소자는 한국전쟁과 ‘반공법’에 얽힌 비극적 운명의 무기수 나윤주다.

1967년 4월, 나는 대구교도소 재소자교화사업 회장을 맡고 있었다. 모범무기수라고 소개받은 나윤주(남·당시 42세) 씨는 교도소 내 불교신도회장이었다. 나는 이미 독실한 불자인 나 씨와 교도소 방문마다 비교적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인생사를 속속들이 알게 됐다.

6·25때 빨치산부대 강제 입산
기밀문서 훔쳐 경찰서에 자수
공헌 인정, 전 혐의 사면된 후
보안법 소급 적용 무기형 선고
22년 만에 대통령 특사로 출소
25년 뒷바라지한 아내와 이별


나 씨는 전남 함평의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동향의 아내 정복희 씨와 중매결혼을 했다. 나 씨 부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두 아들을 낳고 걱정 없이 사는 듯 했다. 나 씨 부부가 결혼한 지 5년 된 해인 1950년, 두 사람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역사적인 사건이 터지고 만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나 씨는 집이 시골인 데다가, 설마 초등학교 선생님인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싶어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전란을 피해 고향을 떠나지 않은 일은 그에게 평생의 회한이었다.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 씨는 타의에 의해 빨치산 부대원이 됐다.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으면 처자식을 죽이겠다는 남로당 지하조직의 협박에 ‘빨갱이’가 되겠다는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나 씨 자신이 빨갱이가 돼도 가족들을 지킬 수는 없었다. 나 씨는 국군이 나 씨의 행방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가까운 가족 11명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산군 측이 민심을 잃으면서, 빨갱이와 연루됐다는 이유만으로 마을주민들의 화살마저 나 씨의 아내로 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빨갱이 남편을 둔’ 정 씨와 어린 아들들은 고향에서 쫓겨난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단 사실이다.

그 사이 나 씨는 영민한 두뇌로 빨치산부대 문화부 대장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나 씨는 열악한 산중 생활에 회의를 느꼈다. 국군의 공비 토벌작전이 본격화되고 경찰까지 가세하자, 나 씨는 ‘여긴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탈주를 결심했다.

지하조직망과 작전계획 등 빨치산 기밀문서를 훔쳐 반역을 저지르겠다는 작전이었다. 동시에 남은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계획이었다.

나 씨는 보름간 칡뿌리로 연명하면서 험준한 산을 탄 끝에 마침내 정 씨가 지내는 곳에 다다랐다. 나 씨는 칠흑 같은 새벽을 틈타 탈취한 기밀문서를 정 씨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정 씨가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나 씨는 “난 어차피 살 가망이 없는 사람이오. 이 문서를 경찰서에 갖다 주면 분명 알아볼 것이니 날이 밝는 대로 가시오.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니…, 난 오늘로 내 마지막 목표를 이뤘으니 죽을 때만큼은 편하게 죽고 싶소”라며 챙겨온 총으로 자결할 뜻을 전했다.

정 씨는 그 말을 듣고 나 씨에게 잠시만 기다리라 한 뒤, 자는 아이들을 깨워 자기 뒤에 일렬로 세웠다고 한다.

“총알이 몇 발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발이면 우리 셋 다 죽습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에요. 목숨을 끊으시려거든 우릴 죽이고 당신도 자결하세요.”

참으로 현명하고 속 깊은 아내였다. 차마 그럴 수 없던 나 씨는 마음을 고쳐먹고 가족과 함께 경찰서에 자수를 했다.

말 못할 가혹행위를 당할 것이란 온갖 각오를 하고 간 것이 무색하게도 나 씨에게 살 길이 생겼다. 경찰 당국은 나 씨가 멸공을 위한 결정적 역할을 할 중요문서를 조달한 공로를 인정했다. 나 씨의 모든 죄가 사면됐다. 이후 나 씨 부부는 수년 간 농사를 지으며 행복한 일상을 되찾는 줄로만 알았다.

1958년 자유당 말기, ‘신국가보안법’이 제정 통과됐다. 이로 인해 나 씨는 과거 부역행위가 소급 적용돼 다시 구속되고 말았다. 나 씨는 또 다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기약 없는 무기수가 됐다.

나는 이토록 기구한 운명으로 교도소서 불심을 닦은 나 씨와 만났다. 나는 나 씨와 다른 재소자들에게 “현재의 옥고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형극이나 이는 전생에 여러분 스스로가 저지른 인과에 의해 벌을 받는 것이니 저항하지 말고 부처님의 공덕을 쌓으라”는 설법을 할 뿐이었다.

나 씨 곁을 지킨 정 씨의 내조는 인간 이상의 지극함이었다. 정 씨는 빨치산 3년, 수인생활 22년 도합 25년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버텼다. 남편 없이 아이들을 책임지며 창살 없는 감옥에서 견딘 정 씨와 함께 나 씨 역시 묵묵히 모범수로서 복역을 이어갔다.

나 씨는 감형된 22년의 형기 가운데 3개월을 앞둔 1979년 12월, 당시 최규하 前 대통령 취임특사로 가석방됐다.

나 씨는 내 권유로 그간의 참극을 적은 수기 〈누가 반역자냐〉를 펴냈다. 참혹한 산중 생활부터 자신 때문에 총살당한 부모형제들, 빨치산 생활을 청산하고 자수해 문제없이 살다가 다시 무기수가 된 파란만장한 삶을 기록한 책은 많은 이에게 울림을 줬다.

이 같은 사연은 TV 6·25특집극으로 방송됐다. 나 씨 이야기가 해외 잡지에 실리는 등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나 씨는 결국 그의 아내를 저버리고 변심했다. 긴 세월 모진 수모를 감내하고 옥중 뒷바라지를 한 정 씨는 다른 여인과 몰래 동거하는 나 씨를 알아차리고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나 씨가 더없는 인품을 가진 아내 정 씨를 놓친 것은 다시없는 비극이었다. 남편을 위해 한평생 다 바친 정 씨에게도 나 씨의 외도와 배신은 슬픈 엇갈림이었다. 전쟁은 일단락됐지만 전쟁이 남긴 상흔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재소자와의 인연이었다.

나윤주 씨의 비극적인 투옥생활을 20년 이상 뒷바라지한 그의 아내 정복희 씨(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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