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소용돌이가 몰고 온 비극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고 온 비극
  • 정리=김지원 기자
  • 승인 2018.11.0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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㉑ 무기수 나윤주

1960년대 말 대구교도소에는 사상범이 많았다. 내가 그곳에서 처음 만난 재소자는 한국전쟁과 ‘반공법’에 얽힌 비극적 운명의 무기수 나윤주다.

1967년 4월, 나는 대구교도소 재소자교화사업 회장을 맡고 있었다. 모범무기수라고 소개받은 나윤주(남·당시 42세) 씨는 교도소 내 불교신도회장이었다. 나는 이미 독실한 불자인 나 씨와 교도소 방문마다 비교적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인생사를 속속들이 알게 됐다.

6·25때 빨치산부대 강제 입산
기밀문서 훔쳐 경찰서에 자수
공헌 인정, 전 혐의 사면된 후
보안법 소급 적용 무기형 선고
22년 만에 대통령 특사로 출소
25년 뒷바라지한 아내와 이별


나 씨는 전남 함평의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동향의 아내 정복희 씨와 중매결혼을 했다. 나 씨 부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두 아들을 낳고 걱정 없이 사는 듯 했다. 나 씨 부부가 결혼한 지 5년 된 해인 1950년, 두 사람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역사적인 사건이 터지고 만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나 씨는 집이 시골인 데다가, 설마 초등학교 선생님인 자신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싶어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전란을 피해 고향을 떠나지 않은 일은 그에게 평생의 회한이었다.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 씨는 타의에 의해 빨치산 부대원이 됐다.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으면 처자식을 죽이겠다는 남로당 지하조직의 협박에 ‘빨갱이’가 되겠다는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나 씨 자신이 빨갱이가 돼도 가족들을 지킬 수는 없었다. 나 씨는 국군이 나 씨의 행방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가까운 가족 11명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산군 측이 민심을 잃으면서, 빨갱이와 연루됐다는 이유만으로 마을주민들의 화살마저 나 씨의 아내로 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빨갱이 남편을 둔’ 정 씨와 어린 아들들은 고향에서 쫓겨난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단 사실이다.

그 사이 나 씨는 영민한 두뇌로 빨치산부대 문화부 대장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나 씨는 열악한 산중 생활에 회의를 느꼈다. 국군의 공비 토벌작전이 본격화되고 경찰까지 가세하자, 나 씨는 ‘여긴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탈주를 결심했다.

지하조직망과 작전계획 등 빨치산 기밀문서를 훔쳐 반역을 저지르겠다는 작전이었다. 동시에 남은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계획이었다.

나 씨는 보름간 칡뿌리로 연명하면서 험준한 산을 탄 끝에 마침내 정 씨가 지내는 곳에 다다랐다. 나 씨는 칠흑 같은 새벽을 틈타 탈취한 기밀문서를 정 씨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정 씨가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나 씨는 “난 어차피 살 가망이 없는 사람이오. 이 문서를 경찰서에 갖다 주면 분명 알아볼 것이니 날이 밝는 대로 가시오.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니…, 난 오늘로 내 마지막 목표를 이뤘으니 죽을 때만큼은 편하게 죽고 싶소”라며 챙겨온 총으로 자결할 뜻을 전했다.

정 씨는 그 말을 듣고 나 씨에게 잠시만 기다리라 한 뒤, 자는 아이들을 깨워 자기 뒤에 일렬로 세웠다고 한다.

“총알이 몇 발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발이면 우리 셋 다 죽습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에요. 목숨을 끊으시려거든 우릴 죽이고 당신도 자결하세요.”

참으로 현명하고 속 깊은 아내였다. 차마 그럴 수 없던 나 씨는 마음을 고쳐먹고 가족과 함께 경찰서에 자수를 했다.

말 못할 가혹행위를 당할 것이란 온갖 각오를 하고 간 것이 무색하게도 나 씨에게 살 길이 생겼다. 경찰 당국은 나 씨가 멸공을 위한 결정적 역할을 할 중요문서를 조달한 공로를 인정했다. 나 씨의 모든 죄가 사면됐다. 이후 나 씨 부부는 수년 간 농사를 지으며 행복한 일상을 되찾는 줄로만 알았다.

1958년 자유당 말기, ‘신국가보안법’이 제정 통과됐다. 이로 인해 나 씨는 과거 부역행위가 소급 적용돼 다시 구속되고 말았다. 나 씨는 또 다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기약 없는 무기수가 됐다.

나는 이토록 기구한 운명으로 교도소서 불심을 닦은 나 씨와 만났다. 나는 나 씨와 다른 재소자들에게 “현재의 옥고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형극이나 이는 전생에 여러분 스스로가 저지른 인과에 의해 벌을 받는 것이니 저항하지 말고 부처님의 공덕을 쌓으라”는 설법을 할 뿐이었다.

나 씨 곁을 지킨 정 씨의 내조는 인간 이상의 지극함이었다. 정 씨는 빨치산 3년, 수인생활 22년 도합 25년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버텼다. 남편 없이 아이들을 책임지며 창살 없는 감옥에서 견딘 정 씨와 함께 나 씨 역시 묵묵히 모범수로서 복역을 이어갔다.

나 씨는 감형된 22년의 형기 가운데 3개월을 앞둔 1979년 12월, 당시 최규하 前 대통령 취임특사로 가석방됐다.

나 씨는 내 권유로 그간의 참극을 적은 수기 〈누가 반역자냐〉를 펴냈다. 참혹한 산중 생활부터 자신 때문에 총살당한 부모형제들, 빨치산 생활을 청산하고 자수해 문제없이 살다가 다시 무기수가 된 파란만장한 삶을 기록한 책은 많은 이에게 울림을 줬다.

이 같은 사연은 TV 6·25특집극으로 방송됐다. 나 씨 이야기가 해외 잡지에 실리는 등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나 씨는 결국 그의 아내를 저버리고 변심했다. 긴 세월 모진 수모를 감내하고 옥중 뒷바라지를 한 정 씨는 다른 여인과 몰래 동거하는 나 씨를 알아차리고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나 씨가 더없는 인품을 가진 아내 정 씨를 놓친 것은 다시없는 비극이었다. 남편을 위해 한평생 다 바친 정 씨에게도 나 씨의 외도와 배신은 슬픈 엇갈림이었다. 전쟁은 일단락됐지만 전쟁이 남긴 상흔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재소자와의 인연이었다.

무기수 나윤주 씨의 비극적인 투옥생활을 20년 이상 뒷바라지한 그의 아내 정복희 씨(오른쪽).
나윤주 씨의 비극적인 투옥생활을 20년 이상 뒷바라지한 그의 아내 정복희 씨(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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