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이 면사무소로…4.3아픔 佛心 극복

1960년 중반 이후 석조건물로 지어진 고관사 지장전.

조천포구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관문이었다. 육지와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문이기에 조천은 과거 연육의 교통 요충지였다. 그만큼 항일운동에 앞장선 조천리,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지켜보며 속수무책으로 감내해야한 일제 하 참담한 과거 안겨준 아픈 상처들. 역사의 피해자이면서도 고통받는 주민들의 의지처로써 역할을 담당하며 수행해온 사찰이 바로 고관사다.

옛 관음사라는 뜻의 사명이 보여주듯 고관사(故觀寺)는 고려 전기에 창건돼 19세기 중엽까지 존속한 옛 관음사의 명맥을 이은 사찰이다. 1927년 화주 고계부와 강정완 보살이 기와로 된 개인 주택을 매입해 선암사 제주포교사로 창건하게 된다.

전각 강제매각, 私家 불상 봉안
주민 의지처로 명맥, 1963년 불사
스님·신도 한마음으로 지장전 세워


1930년 고자선 보살이 전라남도 선암사에서 목조 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봉안하면서 사찰의 기반을 닦게 된다. 고관사는 신도가 증가함에 따라 1938년 마을 재가불자들과 함께 지장계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불교 활동을 펼치지만, 1948년 4.3이 발발하면서 그 여파로 조천면 사무소가 불에 타 고관사 대웅전이 강제로 매각된다. 고관사 대웅전이 조천면 면사무소로 이용되자 강정완 보살 등은 조천초등학교 인근 사가에 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명맥을 잇게 된다.

고관사 창건주인 강정완 보살의 외동딸 김영환(만 97세) 보살의 남편도 4.3 당시 ‘폭도’로 몰려, 제주시 박성내서 총살되는 비운을 맞는다. 남편을 잃은 슬픔도 잠시, 김영환 보살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무신 장사를 하며 자신이 낳은 자식들과 더불어 절과 인연이 된 어린 자녀 3명을 키우는 등 관세음보살의 화신처럼 삶을 살아온다.

김영환 보살의 딸 이명자 씨는 “석유 등잔불 아래서 어머니가 반야심경을 외우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면서 “사찰의 재일이나 안택기도가 있으면 어머니가 떡이나 묵을 쑤시는 등 정말 사찰 일을 자신의 일처럼 정성을 다하셨던 분”이라고 회상했다.

4.3이 안정을 찾으면서 강정완 창건주와 신도들은 강제로 매입당한 옛 법당을 찾아 나선다.

당시 1958년 주지로 부임했다가 지금은 환속한 향촌 거사에 따르면 “내가 1958년 5월경에 봤던 고관사는 한심스러웠다. 건물이라고는 전통식 기와집으로 면적은 알 수 없었지만 창고 한 채와 화장실 곁에 작은 초가집 한 채가 전부였다. 법당 건물 한켠에 작은 방 하나가 붙여 있었다”고 증언했다.

스님은 새롭게 법당을 짓고자 1963년 모연을 했으나 고관사 신도들의 주머니 사정으로 자신이 구상하는 법당을 세우기가 어려울 것 같아, 고심 끝에 손수 법당을 짓는데 온 몸을 바치게 된다.

스님은 “직접 인력거와 망치, 골채를 사고 자갈과 모래 등을 사다가 직접 집을 짓는데 공을 들이다보니 불사를 잘 마칠 수 있었다”면서 “불사를 내 손으로 마칠 수가 있어서 혼자 방에서 불보살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석조 건물로 다시 지어진 건물이 바로 지금의 지장전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가 넘쳐난다.

그리고 고관사의 도량 가운데는 부처님의 ‘불족’이 하얀 대리석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 사리 2과를 모신 3층 석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 4·3- 고관사

조천마을 피해 보듬은 안식처


고관사는 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 말사로 조천읍 조천리 마을 안에 있다. 고관사는 1927년경 화주 고계부와 강정완이 기와로 된 사가를 매입해 선암사 제주포교소로 창건했다. 1930년에는 고자선이 선암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와 봉안했다.

1948년 제주4.3사건시기에 조천면사무소는 무장대의 공격에 의해 불타버렸다. 이에 면장은 총을 들이대며 고관사를 매각할 것을 협박했다. 기와 법당과 초가 한 채를 40만원에 매각하고 불상과 탱화를 사가에 옮겨 모셨다. 돌아온 이후 1968년경에 재매입했다. 당시 함께 했던 기와 법당과 초가는 헐렸고 탱화 일부는 훼손돼 없앴다. 당시 아미타불상과 독성탱화는 지금 고관사에 남아있다.

고관사가 위치한 마을 조천은 제주4.3사건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한 마을이다. 조천리는 해방 이후 제주 사회 흐름에 적극 동참한 마을이다. 1948년 1월에는 남로당 조천지부 회의장을 제주경찰이 급습해 220여 명을 검거한 사실 등을 통해 조천 마을 사람들의 동향을 알 수 있기도 하다. 3월에는 조천중학원의 김용철 학생이 조천지서에서 취조를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학생과 주민들이 지서에 몰려가 항의 시위를 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이었다.

4.3이전에 고관사에 모셨던 아미타부처님.

1948년 5.10선거 준비 기간에는 투표소가 방화되기도 했다. 10월 23일 무장대가 조천지서를 공격했고 11월 4일에는 조천면사무소를, 다시 11월 11일에 조천지서를 공격했다. 조천면사무소는 불에 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무장대의 활동으로 토벌대는 마을주민들을 대상으로 보복학살을 벌였다. 이를 피해 주민들이 대규모 입산하기도 했다. 입산자가 있는 집안은 입산이 죄가 됐고, 다시 내려와 귀순한 사람들은 또 입산 경력이 죄가 돼 학살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다. 12월 21일에는 조천리가 무장대의 공격을 받자 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을 총살했다. 토벌대는 자수해서 내려온 조천면 주민 150명을 제주시 박성내로 데려가 집단 총살을 하기도 했다. 
한금순(제주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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