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時空)을 벗어난 시심마(是甚) 시(是) 자리는 면남간북두(面南看北斗)라, 동서남북이 탁 트인 십방(十方)이 공(空)인 시무애(時无涯)자리이며, 개화천지미분전(開花天地未分前) 화중생연(火中生蓮)이라, 우주가 벌어지기 전에 이미 불 속에서 연꽃이 피어난 처무애(處无涯)인 원각(圓覺)의 자리이다.

보리자성(菩提自性)인 시는 그대로 부처의 마음이고 참 생명이며, 항상 지혜광명(智慧光明)이 밝게 비추고 있으며, 자타의 간격이 없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무처무시(無處無時)한 절대(絶對)의 자리이다. 깨달으면 본래부터 갖춰진 그 자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범우불료자성(凡愚不了自性) 불식신중정토(不植身中淨土) 원동원서(願東願西) 오인재처일반(悟人在處一般) 소이불언(所以佛言) 수소주처(隨所住處) 항안락(恒安樂)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범부는 무식해서 자기 성품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몸속에 있는 정토를 모르고 동서로 해매고 다니며 찾고 있지만,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 있으나 그곳이 정토(淨土)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머무는 곳을 따라 항상 안락하다”라는 말이다. 또한 생처방교숙(生處放敎熟) 숙처방교생(熟處放敎生)이라고 했다.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설은 것은 익게 하라”라는 의미이다. 세세생생 익혀서 숙달된 습관(탐진치)은 설게 하고, 반야지혜를 생활 속에서 살려 쓰는 ‘이 뭣고?’ 수행을 익게 하라는 말이다.

중생들은 마음의 때를 씻어 자성청정한 본래자리를 밝혀 쓰려 하지 않고 겉 때를 벗기는데 하루하루를 헛되게 낭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분노 화 의심 신경질 후회 등 부정적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그 생각에 집착해 따라가지 말고 즉각 이 화(禍)가 과연 어디서 왔는고? 하며 알아차리고 ‘이 뭣고’를 관하면 그 즉시 ‘이 뭣고’가 자기 용광로 속에 넣고 바로 녹여 주게 되어 있다. 다생겁래로 아뢰야식(장식)에 저장해 놓은 업식(業識)을 그대로 다시 재생해 표출되는 감정을 억제시키며 한 박자 쉬게 되어 점차적으로 위기의 상황서 벗어나게 되며 쫓기지 않고 자동적으로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이 되어 평온을 유지 하게 된다. ‘이(是)’는 언전대기(言前大機)인 반야지혜로써 일체만법을 들이고 내는 당처이며, 일체 제불(諸佛)의 불모(佛母)로서, ‘이 뭣고’는 반야지혜를 살려 쓰는 대활구(大活口)인 것이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이 뭣고’ 하면 캄캄한 어둠을 뚫고 내면의 대광명(大光明)인 반야지혜에 바로 연결 시켜주는 긍정(肯定)과 확신(確信)의 코드(cord)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언제나 ‘이 뭣고’ 코드만 꽂으면 여의보주(如意寶珠)를 굴려 쓰게 되는 것이다. 지혜를 굴려야 반야이고 공덕이 따라야 바라밀이며, 절대궁극의 그 자리는 오직 모르고 또 모를 뿐이다. 그래서 ‘이 뭣고’인 것이며, 생활 속에서 ‘이 뭣고’를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누구나 굴려 써야 생사고해를 벗어날 수 있는 성불(成佛)을 이룰 수 있다. ‘이 뭣고’ 가 익숙해지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면서 본래의 고요한 성품인 자신의 본바탕(本地)에서 온갖 지혜의 작용이 저절로 흘러넘치게 되는 것이다.

무진성해가 한 맛이니 완전히 통해버린 무애법계이지만, 그 한 맛이라는 화엄(華嚴), 법화(法華), 일승(一乘)에서도 벗어나야 중도(中道)인 선(禪)이며, ‘이뭣고’인 것이며, 폭포수서 떨어지는 물길을 따라 생사고해의 바다로 떠내려가면서 하는 기도(祈禱)는 삼아승지겁을 지나 깨달을 수 있는 생사법(生死法)이지만, 간화선 ‘이 뭣고’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근원을 향해 역류 하여 정점(頂点)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사 없는 원각(圓覺)인 내 고향에 도달해 성불을 이루게 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부처님의 위신력인 것이다. 그래서 중생들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와 소리의 메아리에 집착하고, 평생을 흙덩이를 진주(珍珠)로 착각(錯覺)하고 살기 때문에, 속된 인연서 벗어나기 위해 ‘이 뭣고?’로 회광반조 하라는 것이며, 온갖 망상을 쫓아 경계에 집착 말고, 생각의 뿌리인 마음을 ‘이 뭣고’로 관(觀)하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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