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비경선 - 5) 수미산 걷기명상

명상에서 사유는 중요한 수단
잊고 있던 진실 드러나게 해
경선 중 밖으로 이끌리는 마음
계속 알아차리며 관찰해나가야

지난 연재 끝부분에서 수미산 성지순례 걷기선 명상의 후기를 소개했다. 여기에 또 다른 이의 후기를 추가한다. 앞서 소개한 명상법을 실천하며 자신이 느낀 점과 비슷한지 비교해보자.

78일 수미산 둘째 날
아침 일출을 보고 늦게 출발하려다 몸 상태에 자신이 없어 일행들과 출발하였다. 어제처럼 보이는 풍광과 한 공간을 이루는 전체보기가 잘 되니 호흡도 편안하고 몸이 가벼웠다. 점점 사람들과 거리가 생겨서 혼자서 걸었다. 집중이 잘 되니 저절로 걷는 것 같았다. 준비한 것을 티베트 순례자들에게 나누어주며 가는데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햇살이 없으니 조금 추웠다. 손가락 끝이 점점 오그라들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물을 한 모금 마신 것이 통증을 유발했다. 토할 것처럼 메스꺼움이 올라온다. 잠시 서서 자비수관을 하였다. 위통은 조금 줄어들었는데 손가락은 펴지지 않는다. 계속 감각을 관찰하며 자비손으로 쓰다듬으며 걸었다. 햇살이 비추기를 바라며 의식이 사물과 한 공간을 이루는 전체보기에 집중하며 걷자 손도 편안해지고 위통도 사라졌다.

쉬엄쉬엄 걸으며 여러 사람들을 보았다. 될마 고개를 넘을 때 힘들어 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미산을 넘으며 서서 관상공양을 올렸다. 일체중생의 고통이 덜하여지기를 발원하고 돌아가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더 배려하고 괴롭고 힘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나누며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고 평소에 하는 서원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부처님과 불보살님들 그리고 신중님들이 수미산을 둘러싸며 우주의 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 올바르게 수행하여야 하는 이유를 보여 주는 듯 했다. 금빛으로 장엄한 세계가 마치 경전을 보는 듯 했다.

보이고 들리는 풍광과 한 공간 속에서 발바닥 감각 알아차림 하면서 걸으니 마치 등 뒤에서 누군가 밀어주는 듯 힘들지 않게 넘었다. 서너 번 흙길에 미끄러지자 티베트 사람들이 손을 잡아주며 일으켜 주면서 함께 웃었다. 그 미소가 관세음보살이다. 정해진 길이 없어서 여러 갈래로 내려오다 보니 알아차림해도 흙길에 미끄러진다. 공양하는 텐트 있는 곳까지 수월하게 의식을 놓치지 않고 걸었다.

잠시 쉬고 숙소 있는 곳까지 다시 걸었다. 오는 도중 유목민인 아버지와 아들을 만나서 가방에 있던 간식을 주려고 하자 곰빠(사원)에 올리라고 하였다. 이들의 신심과 일상생활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전날 잠을 못자서 쉬고 있으니 다른 순례자들이 같이 가자고 한다. 힘들어서 쉬는 줄 알고 도움을 주려고 한다. 순례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다. 구별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반갑게 인사한다, 해맑게 웃는 모습으로.

들꽃을 따라, 시냇가를 따라, 순례자들과 함께 걸으며 스스로 생각해도 알아차림이 너무 잘 되어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서 수미산을 넘으며 힘들다는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상호의존하며 독립된 존재가 아님을 알아차림 한다. 발바닥 감각은 일어나면 반드시 사라지고, 지나온 순례 길은 되돌아오지 않으며 오지 않아 없는 미래의 순례 길도 오지 않아서 없고 현재 이 순간도 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차림하고, 사유하며 걸었다. 숙소로 오는 길은 몸이 가벼워 날듯이 왔다. 여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하루였다. 심장 안 좋은 사람 맞느냐고 했다. 너무 잘 걷는다고.

79일 수미산 셋째 날
밀라레빠의 동굴 수행터인 쥬들북 사원을 둘러보고 다르첸으로 향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손으로 받쳐서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 군데에 밀라레빠의 수행처가 있는데 신출귀몰한 그는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수행을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모두 앉아서 좌선을 했다. 수미산 주변이 점점 넓어져 끝없이 펼쳐지고 허공과 하나되어 있다. 들뜸이나 산만함이 없어 마음이 누그러진 탓인지 편안하다.

일체중생을 위해 오체투지를 하며 가는 순례자들을 보고 나를 돌아본다. 저들의 순수함에,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자들에게 감사의 차를 올렸다. 수미산에 오기 전에 영혼의 순례길이란 영화가 상영되어 보았다. 한 마을 사람들이 포텔라궁을 거쳐 수미산까지 오체투지를 하면서 순례하는 여정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어린이도 임산부도 있어서 순례길에 아이를 낳고 오체투지를 이어가는 모습이 오늘 만난 순례자들을 보자 떠올랐다. 평지를 걸어서 덜 힘들기 때문에 의식 집중이 흐트러질 줄 알았는데 오늘도 잘 되었다.

들꽃을 보고, 변하는 것에 대한 받아들임이 달라져서일까 황량한 사막 같은 주변을 보면서 연민심이 생겼다.

저녁에 스님과 순례대중과 함께 수미산 관상 순례를 하였다. 출발부터 도착할 때까지의 전체가 한 화면에 담기듯 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존재하지 않으며 보이는 것도 실재하는 것이 아닌 상호의존적이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사유했다.

금강경에 나오는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이란 사구게가 떠올랐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어리석음을 일깨워줬다.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데 붙들고 있다.

사유의 힘
소나무에 기대어 관계성 통찰 사유하기에서 삼라만상 우주까지 하나로 꿰뚫어 보는 것은 바로 사유의 힘이다. 사유는 대상을 겨냥하는 뜻이 있고 대상을 분석하여 해체시키고 진실을 드러낸다. 특히 모양도 색깔도 없는 것 즉,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공, 원각 등 존재의 궁극적인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궁극적인 것을 붙들고 놓치지 않는 힘도 있다. 그 궁극적인 것은 바로 모든 존재, 모든 것의 본성인 공적한 마음이다. 원각이라고도 하고 보리 법계라고도 한다.

그래서 걷기명상에서 사유는 매우 중요한 명상수단이다. 2012년에도 수미산 성지순례 걷기선 명상을 할 때 60대의 대덕월 법우님 한 분이 5600m 고지인 될마 고개를 넘을 때 한두 걸음을 걷고 쉴 정도로 숨이 차고 몸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원각경> 보안보살장의 적멸차제 5단계를 사유했다.

몸은 흙···바람의 4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몸의 4대가 흩어지면 몸이 소멸하고 몸이 소멸하면 몸 기운에 의해 형성된 마음이 소멸하고 마음이 소멸하면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경계가 소멸하고 소멸했다는 미세한 생각이 소멸하면 더 이상 소멸할 것이 없어 비환불멸(非幻不滅)이다. 환이 아닌 것은 소멸하지 않는 원각이다라고 반복 사유한다.

몸의 구성요소가 실체가 없어 공함에 이르러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몸의 아픔도 사라지고 가벼워지면서 가쁜 호흡이 부드러워졌다. 몸이 가벼워 쉽게 고지의 될마 고개를 넘어 두 번째 캠프에 도착하여 대중들에게 체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환희심을 내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의식의 한 공간 이루기
걷기선 명상의 기본적인 것만 이야기했지만 자비경선 명상은 경()-()-()-()의 네 단계가 있고 40여 가지의 명상방법이 있다. 여기서 산행할 때의 걷기선 명상 하나를 이야기하고 다선일미 차명상으로 넘어갈까한다.

산행할 때 다리가 아플 때는 마음의 손(자비손)으로 쓰다듬어주면 통증이 사라지고 다리가 가벼워진다. 숨이 가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을 때에도 심장 부위를 마음의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 몸 상태가 진정된다.

시선을 똑바로 앞을 향해 두고 걸으면서 항상 온몸의 움직임을 눈앞의 사물 보듯이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한다. 온몸의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발의 움직임부터 살펴본다. 온몸이 한눈에 들어오면 움직임을 보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 부위가 쉽게 관찰되기도 한다. 그러면 그 부위의 힘을 뺄 수 있다. 그것이 잘 안 되면 그 부위에 대해 부드러운 감정을 가지고 주시하여 부드럽게 만들거나 부드러운 마음의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 된다.

경선 중에 다른 사람과 만나거나 새로운 풍경을 보면 몸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마음이 밖으로 끌리게 되는데, 끌리는 마음은 움직이는 마음이다. 그때는 끌리는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또 주시하던 마음에 사물이 들어오면 곧바로 알아차리고 생각이 들어와도 놓치지 않아야 된다. 이러한 경지가 되면 몸과 마음의 움직임, 의도, 감각, 관찰자 등이 모두 관찰 대상이 된다.

걸어가면서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앞의 사물을 보는 것과 온몸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 의식의 한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안과 밖의 경계가 하나가 되어 경계선이 없어진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몸의 움직임 속에 신체의 비어 있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몸의 움직임 속에 신체의 형상이 텅 빔을 본다면 주시하는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여기서 빨리 걷거나 천천히 걸으면서 이 경계가 흐트러지는지 아니면 움직임 속에서도 거울같이 비춰보는 마음이 변함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걷기선 수행[경선]의 중요한 부분이다.

몸의 움직임 주시하면

마음 비워지나니

허공 속에 별빛만 가득하듯

마음엔 무상(無常)만 가득하네.

빈 마음 유지하려면

똑같은 형상 없는 그 자리가

빈틈이니

우주를 넣고도 넉넉하다네.

빈 마음으로 무상을 다시 보라.

어느 곳에도 머물 수 없나니

무주(無住)에 머물면

오직 마음뿐임을 알게 되고

마음의 본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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