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기수 김무한
친아버지의 모진 학대를 견디다 못해 천륜대죄를 저지른 이가 있었다. 무기수 김무한이다. 정당방위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살인은 살인이었다. 그것도 형이 가중되는 중죄의 ‘존속살인’이었다. 김 씨 본인이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김 씨는 친부를 살해한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속죄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무기수 김무한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늘 생각나는 인연 중의 인연으로 내 삶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무기수였다.
‘금강경’ 인연으로 신원보증 서
석방 후 출소자들과 사찰공동생활
은인에게 화 될까 스님과 작별
유일한 꿈 합동결혼식 직전 사고사
어느 날 대구교도소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김 씨가 내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 내용은 모범무기수로 20년 동안 형을 산 그에게 가석방 기회가 생겼다는 소식이었다. 복역기간, 수형태도 등 절차상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췄으나 딱 한 가지, 신원보증인이 없어서 문제였다.
“혹시 교도소에서 <금강경> 강의를 하실 때마다 칠판에 적혀있던 경구들이 기억나십니까? 매번 스님 도착하시기 전 정성껏 한 자 한 자 써둔 사람이 바로 접니다. 부디 스님께서 제 보증인이 돼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나는 <금강경> 인연으로 김 씨의 보증을 섰다. 가석방돼 출소한 김 씨는 나를 따라 김천 개운사서 다른 출소자들과 함께 지냈다. 김 씨는 여느 출소자와 달랐다. 대부분 출소자들은 청소 등 소일거리를 돕고 나서 어린아이가 칭찬을 바라듯 쪼르르 달려와 일일이 보고하려고 안달들이었다. 하지만 김무한은 드러나지 않게 묵묵히 일했다. 김 씨는 자신이 지은 업을 소멸하기 위해선 도량을 열심히 닦고 다른 사람에게 신세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김천서 6개월 쯤 지내다 부산으로 옮겨 자비사를 만들 때였다. 당시 사찰 재정상황은 포교당을 지은 일꾼들의 품삯을 못 쳐줄 정도로 어려웠다. 내가 여러 번 정산을 미뤘기 때문에 일당을 못 받은 일꾼들은 단체로 절에 찾아와 난동을 피우기 일쑤였다. 인건비 백만 원을 도저히 구할 길이 없던 때 김 씨가 불쑥 돈 봉투를 내밀었다.
“절이 시끄럽습니다. 이 돈으로 해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깜짝 놀란 내가 김 씨에게 이게 어디서 난 돈이냐고 묻자, 그는 훔치거나 얻은 돈이 아니니 마음 놓으란 말을 할 뿐이었다. 그 돈 백만 원은 김 씨가 감옥에서 일당 5원, 10원을 모아 만든 목돈이었다. 무기수가 감옥에서 피땀으로 번, 값을 매길 수조차 없는 귀한 돈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 돈을 거절했고, 심지어 그에게 야단까지 쳤다.
“이 돈을 가지고 당신 떠나시오. 당신 같은 사람과 같이 산다면, 내가 큰 업을 짓고 살 것 같소. 만약 이 돈을 쓰고 갚지 못한다면 나는 참으로 큰 빚을 지는 거요. 무서워서 이 돈은 받을 수 없소.”
남의 돈을 일절 받지 않고, 신세도 지지 않으면서 이제는 제 전부와도 같은 돈까지 나에게 내어준다는 김 씨였다. 난 그런 출소자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몇 달간 돈을 구하지 못한 나는 결국 김 씨의 돈을 받아 일꾼들의 품삯을 치렀다. 김 씨는 보시한 것이라 했지만 나는 반드시 갚을 요량이었다.
그러던 중 김 씨와 작별의 순간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어느 날 그는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팔에 깁스를 하고 나를 찾아와 떠나겠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김 씨는 묻지 말라며 이렇게 말했다.
“저 혼자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장 스님이 저를 석방시켜주신 은인인데, 차마 스님께 배은망덕한 짓을 할 수 없어 참았습니다. 다음에는 분심을 참지 못 할 것 같습니다. 저만 떠나면 스님이 편하십니다.”
내가 김 씨를 편애한다고 생각한 다른 출소자들이 그를 야산에 끌고 가 집단폭행한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김 씨의 요청대로 김 씨는 갱생보호회로 보내졌다. 그곳은 출소자들의 사회복귀를 돕는 공공기관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일 하는 곳이었다. 김 씨가 갱생보호회로 간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김 씨에게 마지막 꿈이 있다면 착한 여자를 만나 살림 한 번 차려보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김 씨 나이는 60세쯤 됐다.
나는 돈을 빌린 지 꼬박 1년 만에 김 씨에게 빚을 갚았다. 때마침 김 씨는 보호회서 소개받은 한 과부와 합동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김 씨의 신혼자금에 보탤 백만 원을 보낼 수 있어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끝내 김 씨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얼마 뒤 갱생보호회 지부장에게 걸려온 전화는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결혼식 며칠 전, 김 씨와 예비 신부가 함께 길을 걸어가다가 브레이크가 파열된 봉고차가 인도를 덮쳐 그만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예비 신부는 다치지 않고, 김 씨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난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김 씨가 모아둔 돈과 사고 보상금을 처분해야만 했다. 김 씨의 재산은 유일한 유족인 그의 조카에게 승계됐다. 김 씨의 49재를 치르는 내내 나는 그의 조카를 보지 못했다.
나는 감히 부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부처님은 어찌하여 이 자를 데려가신 것일까. 수행자인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산 김 씨를 왜 이렇게 무상하게 데려가십니까. 난 그렇게 하염없이 되뇔 뿐이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김 씨는 돈을 한 푼도 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죽은 뒤에도 목숨을 바쳐 만든 돈을 다른 이에게 줬다. 이로써 김 씨는 금생에 지은 업을 전부 소멸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김 씨는 지금쯤 어딘가에 다시 태어나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신장병을 얻어 병원을 다닌 지 벌써 6년이 됐다. 뱃속에 관을 삽입하고 투석액을 주입한 뒤 죽음을 만나는 고통의 4시간이 끝나면 특히 더 김 씨가 떠오른다. 어느 날인가는 내가 한 혼잣말을 들었는지 간호사가 말을 걸어왔다.
“고통스러운 것 압니다. 하지만 스님, 살기 위해 투석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조금 달라요. 내가 중이다보니까 생사를 조금 알아요.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든 안 죽으려고 하겠지만 난 싱긋 웃을 것 같네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일은 병원을 안 와도 되는구나 싶어서 웃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