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일간지에 학교 내 명상 제도화의 가능성을 진단하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명상을 공부하는 초등학교 교사들의 모임 소개와 학급에서 적용해본 사례, 앞으로의 과제 등이 실렸다. 수행의 종교로서 명상을 주도하는 불교계가 눈여겨볼 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기사에서 ‘걷기명상’을 처음 접해본 초등학생들의 소감이 눈길을 끌었다.

한 학생은 “천천히 걷다보면 관찰력이 좋아지고, 관찰력이 좋아지면 못 볼 것을 볼 수 있네. 천천히 걷다보면 안정이 찾아오고, 안정이 찾아오면 나쁜 생각은 없어져 버리네”라는 걷기명상 소감을 남겼다.

초등학생의 소감처럼 언제부턴가 명상수행 내에서 걷기명상이 대중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10여 년 전 틱낫한 스님의 걷기명상 책이 번역돼 국내서 발간되고, 이제는 걷기명상만을 주제로 한 책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걷기명상에 대한 긍정적인 분위기는 한국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올해만 따져 봐도 지난 6월에는 불교중흥실천협의회가 부산에서 ‘마가 스님과 함께하는 명상힐링 산책’을, 같은 달 한국명상지도자협회가 서울 한강공원서 걷기명상대회를, 10월에는 한국참선지도자협회가 파주 임진각 공원서 세계평화명상대전을 열고 DMZ평화걷기명상을 실시했다. 행사규모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걷기명상에 관심 있는 수천여 명의 대중이 몰려 인기를 실감케 했다.

불교계가 주최한 걷기명상 행사들은 비교적 성황리에 마무리됐지만 한편으론 진한 아쉬움도 남겼다. 바로 걷기명상이 가장 중요시해야 할 명상보다 걷기에 치중했다는 점이다. 어느 행사는 수행지도가 없었고, 또 다른 행사는 걷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명상 숙련자들에게는 무리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명상을 배우고 싶어 찾아온 초심자들은 걷기명상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해했다. 결국 행사 참가자들의 볼멘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한 참가자는 “행사가 지연되다보니 걷기명상이 급하게 진행된 것 같다. 앞사람 걷는 속도를 맞추느라 정작 명상은 제대로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다른 참가자는 “걷기명상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참가했는데 종일 걷기만 하다가 집에 돌아간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현상은 수천여 명의 대중과 걷기명상을 치러본 일이 없는 불교계가 원활한 행사진행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행사의 외연 확장만큼 내실이 따라가지 못한 셈이다. 걷기명상의 핵심은 걸으면서 느껴지는 발바닥 감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발바닥과 땅의 접촉은 상호의존을 의미하고, 이는 곧 독립된 생명체는 없다는 연기(緣起)로 이어진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소중한 이유다.

“걷기와 명상을 같이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대중의 지적은 불교계가 앞으로 걷기명상 행사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다. 다행히 한 차례 대형행사를 치른 주최 측들은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한 듯이 참가자들의 피드백을 수렴하고, 차기 행사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마련될 불교계 걷기명상 행사에 한 번 더 관심을 가져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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