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 사경가 (고려사경문화원 원장·71)

허락 사경가는… 1947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한국해양대학교 기관학과를 졸업하고 약 18년 간 외항선 기관사로 일했다. 1986년 통도사에서 금사경으로 된 〈법화경〉을 보고 금사경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화엄경〉 절첩본 81권 3회, 〈법화경〉 7권 7회, 〈금강경〉 80여 회, 〈지장경〉 2권 5회 사성하며 4대 경전을 모두 금사경으로 복원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미협)특선, 대한민국불교미술대전(조계종) 제19회 최우수상, 제22회 문화재청장상 등을 수상했다. 2004년 대한민국종교예술미술제 초대출품, 2011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사경전) 초대출품, 2011 대장경천년세계축제(금사경) 초대출품, 2017 법련사 불일미술관 개인전, 2017 한국문화정품관 개인전을 열었다.

30여 년 금사경 불사
6세 때 금석문에 반해 서예 입문
헌 공책으로 탁본 떠 체본으로
아내 권유로 절 찾고 불교 귀의
통도사서 금사경 〈법화경〉 만나


〈대방광불화엄경〉서 ‘삼겹지’ 발견
한지·금가루 등 스스로 기법 터득
1992년부터 금사경 본격 시작
〈화엄경〉 81권 3회 사성 등
4대 경전 금사경으로 복원
금으로 쓴 글자 250만 자 넘어

 

〈화엄경〉 절첩본 81권 3회, 〈법화경〉 7권 7회, 〈금강경〉 80여 회, 〈지장경〉 2권 5회 사성. 30여 년 동안 사경으로 수행과 전법불사에 정진해온 이가 있다. 더욱 주목할 것은 그의 사경이 모두 ‘금사경’이라는 것이다. ‘억불’이라는 불운한 시절로인해 사라져버린 금사경의 의미와 공덕의 가치를 다시 알아보고, 아름다웠던 우리 문화의 향수를 그리며 그가 지금까지 써내려간 부처님의 글자는 약 250만 자가 넘는다. 부처님의 4대 경전을 모두 금사경으로 복원하고 오늘도 금빛 붓을 들고 있는 고려사경연구원 허락 원장이다.

장엄한 금빛 화장세계로의 초대 - ‘허락의 금사경 특별전’
예술과 수행 그리고 기록문화의 감동을 전하는 금사경 특별전이 열린다. 10월 23일부터 11월 4일까지 서울 한국문화정품관(창덕궁 맞은편)에서 열리는 ‘허락의 금사경 특별전’이다. 금사경이라는 전통문화를 계승ㆍ창조하고 사경을 통해 수행과 전법을 실천하고 있는 허 원장의 30년 세월이 담긴 특별전이다.

〈화엄경〉 2호 병풍 완성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특별전에는 〈묘법연화경〉 14곡 병풍(법화경 전 7권ㆍ약 7만 자, 글자 크기 5mmㆍ185cm×6m), 〈대방광불화엄경(제1~6권)〉 12곡 1호 병풍(180cm×5m), 〈대방광불화엄경〉 절첩본 전81권(약 590만 자ㆍ길이 738.6cm), 〈금강반야바라밀경〉, 〈지장보살본원경〉 10곡 병풍, 〈반야심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액자 형태의 소품 등 1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약 7만 자의 글자와 7점의 변상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묘법연화경〉 병풍의 경우 글자 크기가 5mm에 불과하며, 마치 인쇄를 한 것처럼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의 크기와 간격이 일정하여 작가의 높은 필력과 깊은 정성을 보여준다.

각 경전의 내용을 함축한 변상도는 모본인 〈팔만대장경〉의 변상도를 참고하여 소실된 부분까지 복원한 것으로, 작가의 창의성까지 볼 수 있다. 허 원장이 현재 진행 중인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 162곡 병풍은 총 60만 자의 글자와 변상도 81점의 방대한 〈화엄경〉을 누구나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162폭 12틀의 병풍 형태로 완성했을 때 총 길이가 100m에 이르는 대작이다.

11월 3일 오후 3시에는 ‘작가와의 만남’도 예정되어 있다. 사경문화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자리이다.

허 원장은 서력 약 60년의 서예가로서 1986년부터 금사경 연구와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오랜 실험과 연구 끝에 작품의 변형 없이 오래 보존될 수 있는 한지와 금가루, 어교(접착제)를 비롯한 금사경 제작기법을 스스로 터득해, 불교 4대 경전을 모두 금사경으로 복원했다.

한국 미술협회 주관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대한민국불교미술대전 최우수상, 문화재청장상을 수상했고, 2011년 대장경천년세계축제 초대전 출품 등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약 250만 자 이상의 글자를 99% 순금분으로 사경해온 허 원장의 작품은 기술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예술과 수행적인 의미에서도 가치가 있다. 그것은 허 원장이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불제자로서 사경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빛으로 빛나는 그의 글씨는 한 글자 한 글자 부처님 가까이 다가가는, 구법의 여정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선재가 되어야 한다. 한 걸음 먼저 선재가 되어 길을 나선 허 원장의 만다라를 따라가 본다.

금석문에 반한 아이, 붓을 들다
허 원장은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허 원장의 고향인 충북 괴산 마을엔 조선시대 신도비(神道碑)가 하나 있다. 어린 허락은 어느 날, 신도비에 새겨진 글자들에 마음을 뺏긴다. 그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허락은 뜻도 제대로 모르는 한자들이 이유 없이 좋았다. 그리고 자신도 그 글자들을 써보고 싶었다. 그렇게 허 원장이 신도비의 글자에 눈이 가고 붓글씨에 대한 꿈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선친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신도비에 새겨진 한자들은 어린 허 원장에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매일 보는 것들이었다. 허 원장의 선친은 한학자였다. 그래서 허 원장의 집에는 책이 많았다. 그리고 그 책 속에는 한자들이 가득했다. 허 원장은 책 속에서 태어났고 붓을 들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컸다.
“신도비에 새겨진 글자들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저도 똑같이 써보고 싶어졌죠.”
허 원장은 신도비에 새겨진 글씨들을 똑같이 써보고 싶었다. 허 원장은 헌 공책과 크레파스를 이용해 신도비의 탁본을 떴다. 그리고 그것을 체본으로 삼고 아버지의 붓을 몰래 가져다가 글씨를 시작했다. 낮엔 산을 오르내리며 나무를 하고 밤이면 글씨를 썼다. 그렇게 허 원장은 여섯 살에 붓을 들었다. 서당 문턱에 가본 적도 없었던 허 원장은 그렇게 천자문을 뗐다.

“왜 그런지 어려서부터 글씨 쓰는 게 좋았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글씨체가 다른 아이들과는 많이 달랐죠. 그래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필체가 필요한 학교 일에 선생님을 대신하기도 했죠. 여섯 살, 그때 글씨가 지금의 글씨를 있게 한 것 같아요.”
허 원장의 서예는 그렇게 시작됐다.

금빛 글씨를 보다…금사경
마을 신도비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 서예를 시작한 허 원장은 불혹의 나이에 또 한 번 글씨에 마음을 뺏긴다. 이번엔 경전이었다. 금빛 글자로 채워진 〈법화경〉이었다.
“금으로 쓴 글씨였어요. 처음 봤죠. 아! 이런 글씨도 있구나. 또 한 번 글씨가 제 마음을 흔들었죠.”
1986년이었다. 허 원장은 양산 통도사를 찾았다가 절 입구에 전시해 좋은 〈법화경〉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마침 ‘금사경’이었다. 경전은 많이 봤지만 금사경은 처음이었다. 여섯 살에 ‘글씨’에 눈뜬 허 원장에게 경전 속의 금빛 글씨는 또 다른 신세계였다. 가보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길’이었다. 어린 시절, 마을 신도비에서 보았던 글자처럼 허 원장의 마음은 온통 금빛 글씨에 가있었다. 이제는 금빛 글씨를 쓰고 싶었다. 허 원장은 금사경에 대해 알기 위해 다시 통도사성보박물관을 찾았다. 그는 거기서 중요한 금사경을 다시 보게 된다. 〈대방광불화엄경〉이었다. 그는 거기서 고려 금사경에 대한 비밀을 찾아낸다. 허 원장은 그때 고려 금사경에 대한 중요한 몇 가지 단서들을 찾아낸다. 대표적인 것이 ‘삼겹지’였다. 유심히 경전을 살피던 중 경전의 종이가 한 겹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허락의 금사경은 종이의 비밀을 발견하면서 시작할 수 있었다.

‘금사경’이란 경전을 금가루로 베껴 쓰는 것을 말한다. 7세기 당나라에서 시작됐다. 우리 땅에서는 통일신라 때부터 유행했고,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많이 제작되어 전성기를 이루었다. 먹과는 달리 금가루는 종이에 두툼하게 묻어야만 발색이 여법하고, 시간이 지나면 접착제의 효과가 떨어져 소실되기 쉽다.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한 고려의 금사경은 따라올 나라가 없을 정도로 수준이 독보적이었다.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들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그 방법을 배워가거나 제작을 의뢰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억불정책으로 인해 금사경의 맥은 끊어지고 관련 문헌 하나 전하지 않는다. 극소수의 작품만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남아 있을 뿐이다. 허 원장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던 고려 금사경의 끊어진 맥을 찾아 나선다.

허락 作, 〈금강반야바라밀경〉 변상도, 감지에 순금, 22×52cm.
하루 일과를 ‘금사경’으로 보내는 허락 원장.

‘허락의 금사경 특별전’
10월 23일부터 11월 4일까지
서울 한국문화정품관서 개최

허락의 금사경은
번뇌 없어야 바른 글자 쓰는
사경은 수행일 수밖에 없어,
수행이 전법되면 값진 공덕
사경만으로 경전 뜻 이해
5mm 글자 안에서 부처 만나
금사경으로 하루 일과 보내
또 다른 원력 상설전시장마련

 

아내 그리고 각연사
허 원장이 오랜 세월 부처님 말씀 받아 적으며 살게 된 것은 아마도 통도사를 찾은 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허 원장의 불연은 통도사였고 그 인연은 그의 아내에서 비롯됐다.
“여보, 우리 각연사 한 번 가요.”
허 원장이 결혼한 지 5년 정도 됐을 때였다. 외항선 기관사였던 허 원장이 오랜만에 휴가를 내고 고향집(괴산)에서 휴가를 보낼 때였다. 허 원장의 집안은 가톨릭이었다. 허 원장 역시 어린 시절 가톨릭의 이름을 받았다. 교리경시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던 허 원장이었다. 그런 허 원장에게 종교에 있어서는 또 다른 인연이 있었다. 바로 아내였다. 아내를 비롯해 허 원장의 처가는 모두 불교였다. 특히 허 원장의 장모는 불심이 두터웠다. 허 원장의 아내는 허 원장이 배를 타고 집에 없는 동안 절을 자주 찾았다. 그 날은 남편과 함께 절에 가고 싶어 처음으로 절에 가자고 했던 것이다. 허 원장은 아내와 함께 아내가 다니는 각연사를 찾는다.
“보살님의 부군은 이쪽(불교)이지, 그 쪽(가톨릭)은 아닙니다.”
아내와 함께 각연사를 찾은 허 원장은 주지 스님과 차 한 잔을 하게 된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깊어져 새벽까지 이어졌고 주지 스님은 허 원장의 불연을 본다. 절을 나설 때 허 원장 내외에게 던진 주지 스님의 한 마디였다. 그리고 그 한 마디에 허 원장은 바로 불교에 귀의한다. 그때 허 원장이 각연사를 찾지 않고 불교에 귀의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통도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배에 오르는 허 원장의 가방 속엔 늘 경전이 있었다.

사경의 목적은 ‘수행’
통도사에서 금사경을 본 허 원장은 그날부터 금사경에 빠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250만 자를 넘게 써왔다. 하지만 ‘금사경’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전적으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금사경의 끊어진 맥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허 원장의 원력은 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더욱 단단해졌고, 조금씩 그 답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2년도부터 허 원장은 본격적으로 금사경을 시작한다.
“사경의 목적은 수행이어야 합니다. 한 자 한 자가 수행의 길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수행으로 글자들이 쌓이고 그 글자들이 전법이 될 수 있다면 무엇보다 값진 공덕일 것입니다.”
처음엔 단순히 글 쓰는 것이 좋아 시작된 허 원장의 금사경이었지만 이제 허 원장의 사경은 ‘수행’이다. 그리고 공부를 위한 사경이다. 허 원장은 별도로 경전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쓰고 있으면 그 뜻을 알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쓰면 쓸수록 그 뜻이 새롭고 단단하게 다가와 쌓인다고 했다. 허 원장이 별도의 공부 없이 사경만으로 경전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선친의 덕이다. 어려부터 한자에 익숙했던 허 원장으로서는 경전을 쓰다보면 그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하는 것이 저의 사경입니다. 글씨에 몰두하여 한 자 한 자 쓰고 있으면 글자와 제가 하나가 됩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제 어깨 위에는 부처님이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잘못 쓴 글자가 나오면 부처님이 바로 짚어주십니다. 바로 알게 되거든요.”

사경은 기도이고 수행이다. 작은 생각이라도 다른 생각에 이끌리면 올바른 글자를 쓸 수 없다. 수행일 수밖에 없다. 부처님 말씀을 한 자 한 자 적어나가다 보면 부처님과 만나고, ‘나’와 만나는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을 다하는 것으로 번뇌를 물리치고, 온전히 ‘나’를 보는 것이다. 지금도 허 원장은 하루의 대부분을 사경으로 보낸다. 5mm 글자 안에서 부처도 보고 자신도 만난다. 그 작은 글자가 그에겐 법당이고 선방이다. 250만 자를 넘게 써온 허 원장이지만 그는 오늘도 쓴다. 지금까지 써온 250만 자는 오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쓰고 있는 한 글자 한 글자가 지금의 ‘나’를 만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허 원장은 최근에 또 하나의 원을 세웠다. ‘상설전시장’ 마련이다. 허 원장은 자신의 사경이 그저 금으로 쓴 글씨에 그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전법이 되고, 힘겨운 사바를 밝히는 등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상설전시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여법하게 전시하기란 쉽지 않다. 앞서 말했던 100m에 달하는 대작을 여법하게 전시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허 원장은 “여러 인연들이 엮어지면 이룰 수 있는 불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늘도 고단한 사바엔 부처님의 글자가 금빛으로 한 자 한 자 쌓이고 있다. 좋은 인연을 함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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