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동불사, 13일 창건 100주년 학술대회

공주 동불사와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는 10월 13일 경내에서 창건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충남 공주 동불사(주지 현중)의 전신인 마곡사 공주포교당이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야학·구제·강연회 등 근대계몽운동에 앞장서며 활발한 전법활동을 펼쳤던 것으로 확인됐다.

공주 동불사와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는 10월 13일 동불사 경내에서 ‘공주 동불사 역사와 문화유산’을 주제로 창건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근대에 창건된 사찰인 동불사가 마곡사의 공주지역 거점 포교 사찰이었던 점과 이를 바탕으로 펼쳐진 다양한 신행운동과 포교활동 등이 조명돼 눈길을 끌었다.

1918년 마곡사 공주포교당 시작
만해 스님·이영재 포교론에 수용
소년회·부인회 등 계몽운동 전개
계층법회 성황… 지역 전법 주도
본사와의 갈등·일제 감시로 침체


이병욱 고려대 강사는 ‘1920년대 공주포교당의 포교 방향’을 통해 공주포교당의 포교관과 활동에 대해 살폈다.

이병욱 강사는 공주포교당이 <조선불교유신론>의 만해 스님과 <조선불교혁신론>의 이영재의 포교론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현실에서 구체화했음을 전제했다. 실제로 공주포교당은 1922년 처음 야학을 시작해 잠시 중단했다가 1926년 실달강습원(능인야학강습원)으로 재개했다.

<불교> 제30호(1926)에 따르면 공주포교당을 담당했던 현서봉 포교사가 돈이 없어 어려운 남녀아동을 모집해 가르쳤는데, 교사 모두 보수 없이 일할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고 기록됐다. 당시 학생 수는 남자 70명, 여자 80명이었고, 이는 공주에서 처음 세워진 ‘노동야학강습소’의 학생 수 35명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이에 대해 이병욱 강사는 “이는 만해 스님이 말하는 자선사업을 일으켜 포교하자는 주장, 구체적으로 이영재가 노동야학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한 것을 수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공주포교당은 청소년·청년·여성 등 계층법회 부흥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병욱 강사에 따르면 공주포교당에는 불교(부흥)청년회를 비롯해 불교소년회(능인불교소년회), 아리다라불교부인회가 구성돼 있었으며, 이들 단체들은 야학, 강연회, 구제활동 등 다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은 자연스럽게 공주포교당이 지역사회의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하는 요인이 됐다. 농인강연회(農人講演會), 상번회(商繁會), 충남공주소년동맹 창립대회 등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가 공주포교당에서 개최됐다.

이병욱 강사는 “이는 공주포교당이 공주 지역 사람에게 신뢰를 받았다는 것”이라며 “사찰이 지역문화와 민중생활에 기여한다면 자연히 해당 사찰은 지역에서 구심점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공주포교당은 활발한 활동에도 포교사 인선 문제 등 내부 갈등과 일제의 감시로 인해 차차 동력을 잃어갔다.

김성순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은 ‘공주 동불사의 근대 불교신앙결사’에서 능인불교소년회와 아리다라불교부인회의 활동 상황과 공주포교당의 한계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1925년 본산 마곡사 주지로 취임한 유인명이 포교당을 폐지하고 포교사 현서봉을 해임한다. 유인명은 도심 중심가에 있던 포교당을 한가한 초가와 바꾼 후 잉여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 했고, 이에 분개한 신자들은 일제히 반발해 폭력사태가 야기되기도 했다. 이후 공주포교당과 야학강습소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일제의 감시도 공주포교당의 한계로 작용했다. 마곡사는 500원을 출연해 공주포교당의 능인학원을 지역 유지들이 운영해줄 것을 1933년 공주 지역 신년 간친회에서 제안했으나 지역 경찰이 “분순한 단체에 학원을 인계하는 것은 불가하다”며 토의를 무산시켰다.

포교당 야학강습소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빈민층 자녀 대상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던 점을 일제 경찰들은 ‘불순함’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게 김성순 연구원의 추론이다.

이에 김성순 연구원은 “강습소 폐쇄 등의 사건은 본사 독단 이면에 일제의 감시 및 좌우익의 이념적 대립까지 맞물려 갈등의 배경으로 작동한 사례”라면서 “공주포교당의 활동은 지역 포교당에서 신행과 포교, 사회봉사까지 지향했던 의미있는 시도였지만 결국 시대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늘날의 한국불교의 자원들이 일제의 감시와 불합리한 제도의 압박을 견뎌냈던 근대불교의 산통의 축적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마곡사 공주포교당의 설립 의미(공주 원효사 주지 해월 스님) △공주 동불사 목조여래좌상 연구(최선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공주 동불사의 풍수지형(김규순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연구위원) 등의 연구 논문이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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