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그림=조향숙

 

마음의 바탕 ‘불성=양심’
깨어난 양심 나눔에 익숙
사회복지·이상세계 구현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설법하셨습니다.

‘어떤 마을에 가짜 바라문이 살고 있었다. 한 장자가 자기의 숲에 초막을 짓고 그 바라문을 살게 하고 날마다 음식 공양을 했다.

가짜 바라문을 믿은 장자는 황금 목걸이 백 개를 초막 옆에 묻고 잘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출가자자는 남의 물건을 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바라문은 이틀 후 그 금을 훔쳐 다른 장소로 옮겼다. 그는 장자에게 “한 곳에 오래 머물면 집착이 생기므로 이곳을 떠나겠다”고 했다. 숲을 떠난 바라문은 잠시 후 되돌아왔다.“장자님, 당신 지붕에서 풀잎 하나가 내 머리에 떨어졌습니다. 주지 않는 것을 가질 수 없어 이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라문이 다시 떠난 후 장자 집에 묵게 된 상인이 물었다.“그 바라문에게 물건을 맡기지 않았습니까”

장자와 상인은 금 목걸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바라문을 뒤따라가 그 보물을 도로 찾았다.

“백 개의 금 목걸이를 훔칠 때에는 양심의 가책이 없고 풀잎 하나에 양심이 있었구나.” 상인은 바라문을 훈계하였다.’

부처님은 “전생의 가짜 바라문은 지금 저 바라문이고, 현명한 상인은 바로 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쪹요즘 양심을 속이는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며 양심을 두 번 속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판단합니다. 양심은 올바른 윤리도덕의 길을 제시해주는 거울입니다. 양심이 맑고 깊을 때는 옳고 착합니다. 양심이 번뇌에 덮이면 악이 나옵니다.

쪹금강경 사구게 중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산승은 이 가르침을 ‘모든 것은 허망하지만 결코 허망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뜻으로 봅니다. 우리의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생각이 들락날락하는 ‘마음의 바탕’이 있습니다. 그 바탕을 흔히 불성(佛性)이라고 하는데 산승은 그것을 ‘양심’이라고 명명합니다.

우리가 양심을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배부르고 등 따시다가 뼈저린 실패를 맛 봤을 때, 공들여 쌓아올린 것이 허망하게 무너졌을 때 뉘우쳐 참회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됩니다. 나의 존재가 덧없음을 알게 될 때, 향락의 허무를 느꼈을 때 그 사무치는 마음에서 톡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허망함을 통해서 허망하지 않은 양심의 자리를 발견합니다.

양심이 깨어나면 나눔에 익숙해집니다. 나눔 즉 보시는 대승불교의 첫 수행덕목으로 보살도 실천이며 중생복지입니다.

우리는 이웃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살고 있으므로 내 양심이 사회로 확산되는 그 자리가 사회복지이고 이고득락입니다. 중생 속에 잠든 불성을 일깨워 ‘깨어있는 양심’ ‘행동하는 양심’이 많아질 때 우리는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나아가 부처되는 이상세계에 한 걸음 더 다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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