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고봉원묘(남송임제종 양기파선사)

북방 선종 대부분 쇄락
남방 선종은 활력 회복

고봉원묘(高峰原妙ㆍ1238~1295)는 원대 남방불교의 거두로서 임제종 양기파의 선사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선사로 〈선요〉를 지은 선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주장한 화두 참구는 대혜종고와는 조금은 다른 화두참구 방법을 주장하였다. 고봉원묘의 구법행각의 이력을 보면, 그는 북송시기의 대혜종고 이후의 간화선을 계승하였다. 그 후 간화선은 남송 이후의 선림의 주류 선학으로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고봉원묘의 선법은 바로 이러한 바탕을 배경으로 발전하여 왔다.

원나라시기의 중국불교가 처했던 시대적인 배경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원대의 조정은 티베트불교를 신봉하였고 동시에 종교억선(尊敎抑禪)의 정책을 펴고 있었다. 당시 북방 선종 가운데, 임제종의 해운인간(海云印簡ㆍ일명 印簡系) 계통, 조동종의 만송행수(萬松行秀ㆍ일명 萬松系)계통을 불문하고, 모두 장기간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쇄락하여갔다. 이와 동시에 남방 선종은 지리적인 위치 및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인해서 선종의 독특한 활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남방 총림의 오산십찰(五山十刹)이라는 구조와 방식은 비록 변하지 않았지만, 사상적인 방면에서의 변화는 비교적 뚜렷하였다. 당시 남방 선종은 전체적으로 모두 임제종에 속하였다. 예를 들면 대혜종고(1089-1163)와 호구소룡(虎丘紹隆ㆍ1077-1136) 양파가 있었다. 대혜 제자인 육왕덕광(育王德光)이후에 영은지선(靈隱之善)과 북간거간(北磵居簡)이 있고, 소룡 제자인 밀암함걸(密庵鹹傑)이후에 송원숭암(松源崇嶽)과 파암조선(破庵祖先)이 있었다. 위의 네 가지의 지파(支派)가 당시 남방 임제종의 주류가 되었으며,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 네 가지 파를 총체적으로 정리하면 공리선(功利禪)과 산림선(山林禪)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공리선(功利禪)의 목적은 적극적으로 조정과 정치권력을 의지해서 발전한 선종 파벌이며,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지선계(之善系)와 거간계(居簡系) 및 숭악계(崇嶽系)의 청무(茂), 수충(守忠) 등이다. 당시의 오산십찰(五山十刹)은 모두 이 계통에서 주지를 맡았다. 반대로 산림파(山林禪)의 선승 대부분은 산속에 은거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지만, 어떤 선사들은 부분적으로나마 민간에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매우 컸다. 다만 종정과 정치권력과의 관계는 거절하거나 멀리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파는 조선계(祖先系)였다.

조선계(祖先系)는 원대 이후 선종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지파(支派)이다. 유명한 선사도 매우 많다. 정치 방면에서 원대 조정과 거리를 두었고 관계도 소원하였다. 수 년 간 산속에서 수행 전념을 하였다. 그렇다고 이 파의 선승들이 지나친 여론을 조장하고 반원(反元)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또 북방 선종과 완전히 단교를 한 것도 아니었다. 이 파를 사람들은 ‘안거지식(庵居知識)’이라고 칭했다. 생활방식 역시 북방 선종이 조정에 의지한 것과 달리 하층민의 시주와 자급자족의 형태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비록 공안송고 등을 완전하게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공안송고 등에 대한 찬성을 반대하였다. 조선계(祖先系)는 대혜종고의 간화선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널리 간화선을 유포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른바 원대의 남방선종의 주류가 되었다. 때문에 조선계(祖先系)의 간화선은 강렬한 시대의 정신과 기백 및 농후한 지방색채를 지닌 새로운 선법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으며, 원대 전체 선종의 기조가 되었다. 원대 초중기의 이러한 특수한 시기에 정치적인 태도 내지 수행방식 생활방식과 선학사상을 두루 아울러서 실천에 옮긴 대표적인 선사로서 고봉원묘(高峰元妙)를 꼽을 수가 있으며, 이러한 특수한 환경적 배경의 중심에 역시 고봉원묘가 있다.

일반적으로 고봉원묘의 선사상은 개괄하면 세 가지 단계의 내용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화두의 출발인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日歸何處)이고, 두 번째는 ‘의이신위체, 오이의위용(疑以信爲體, 悟以疑爲用)’으로 운용된 방법이고, 세 번째는 최종의 목표로서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도달하는 것이며, 궁극적인 목표 실현은 바로 ‘무심삼매(無心三昧)’의 경계이다.

그림, 강병호

 

첫 번째 단계인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日歸何處)’화두는 고봉원묘가 득오(得悟)의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서 거치는 하나의 관문으로, 이 화두는 대혜종고의 ‘무(無)’자 화두와 같은 것이다. 때에 어떤 스님이 묻되,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고, 그 하나로 돌아간 곳은 어디입니까?” 라고 묻자,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내가 청주에서 하나의 가사를 만들고 있다. 무게는 7근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대혜종고는 이 조주의 공안에서 하나의 어구(語句)를 선택해서 화두를 참구하게 하였는데, 그 의도는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활구(活句)’로서, 조주선사가 해답한 의도와 같다. 즉 문자로 이해하거나 언어나 사량 분별로 이해하지 말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고봉원묘의 주장은 다르다. 고봉원묘는 직접적으로 문화(問話ㆍ물어본 문제)를 참구하기를 제시했다. ‘만법’은 일반적으로 세간과 출세간 일체사물 혹은 삼라만상의 일체 현상을 가리킨다. ‘만법’의 귀속처는 ‘일(一)’이며, 곧 ‘일심(一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일심은 만법을 생산하며, 만법은 결국에 일심으로 돌아간다. 이 ‘일심(一心)’은 절대적이며, 영원한 진여불성(本性淸淨 眞如:體)이다. 이러한 경계는 바로 주관(我)과 객관(법(物)ㆍ현상세계)의 세계가 모두 소멸되었을 때의 경계를 일컫는다. 즉 아공법공이 구공(俱空)한 상태를 가리킨다. 고봉원묘는 그의 어록에서 말하기를 “일귀하처는 도리어 무(無)자와 다르다. 또한 의정은 쉽게 발할 수 있다. 하나를 들면 문득 있다. 반복적으로 사유하거나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때, 비로소 의정이 생겨 점점 모여서 덩어리(의심덩어리)를 이룬다. 때에 문득 하려는(사량분별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없어진다. 이와 같이 하려는 마음이 없어지면, 사량분별의 마음이 곧 없어진다. 여기에 이르러서 만연(萬緣)을 쉬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쉬게 되고, 육근이 고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고요해진다.”고 하였다. 그의 제자인 천암원장(千岩元長ㆍ1284-1357)은 그의 어록에서 “만법귀일, 일귀하처, 이 8개의 글자는 천목고봉노조(天目高峰老祖老祖)가 자증자오(自證自悟)한 후에, 이 8개의 문자로서 사해의 학자를 가르치고 각각 그들로 하여금 자증자오하게 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볼 때 ‘만법귀일, 일귀하처’라는 8개 문자의 선법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두 번째 단계는 방법론으로 ‘의이신위체, 오이의위용(疑以信爲體, 悟以疑爲用)’이다. 곧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어떻게 참구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에 관한 문제인데, 먼저 ‘오이의위용’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곧 ‘의정으로 체를 삼는다.’고 하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장차 힘들이지 않고 쉽게 닦을 수 있다. 일찍이 화두를 경험해 보았다. 양손으로 분부하니,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로 돌아가는 곳이 어디인가? 절대로 이렇게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문득 이렇게 의심을 해야 한다. (또)반드시 의심은 믿음으로써 체(體)를 삼고, 깨달음은 의심의 용(用)을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십분(十分:충분한) 믿음이 있으면, 십분 의심이 있고, 십분의 의심을 얻으면, 충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즉 화두 의심하는 것을 믿는 것으로, 믿음이 많으면, 의심도 많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에 믿음이 없으면, 의심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대개 참선을 하는 데는 승속을 나누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신(信)’이 결정을 한다. 만약에 바로 직하에 믿어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오롯하여 오욕에 흔들림을 입지 않고, 하나의 철막대기와 같아지면, 반드시 정한 시간 내에 성공할 수 있으며, 항아리 안에서 걸어가는 자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고봉원묘가 강조한 ‘신(信)’은 화두를 참구할 때 반드시 선행되어야할 조건을 강조한 것이다. 그 다음은 ‘오이의위용으로 즉 깨달음은 의심으로써 용을 삼는다는 것으로, 고봉원묘는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참구하는데 있어서 관건은 바로 ‘의정(疑情)’이라고 여겼다. 그럼 어떻게 의심을 일으켜야 하는가? 그는 이 점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먼저 육정 육식, 사대오온, 산하대지, 삼라만상 모두 하나로 녹여서(만들어서) 의심을 지으면, 몰록 목전에..., 이와 같이 행도 또한 하나의 의단(疑團ㆍ의심덩어리)일 뿐이며, 앉거나 옷을 입고 밥을 먹을 때도, 똥오줌을 눌 때도 또한 오직 하나의 의단일 뿐이다. 견문각지에 이르러서, 모두가 다만 하나의 의단으로서 의심해가고 의심해 오면, 의심이 수월해지는 곳에 이르러서, 문득 힘을 얻는 곳이 있다(득력처가 있다). (이 때가 되면)의심하지 않아도 스스로 의심이 되며, (화두를)들지 않아도 스스로 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고봉원묘가 말하는 ‘오이의위용’의 뜻이다. 위의 내용을 간단하게 다시 정리를 하면, 먼저‘만법귀일 일귀하처’의 화두를 간할 때, 반드시 ‘신(信ㆍ믿음)’을 바탕으로 의심이 이루어져야하고, 깨달음(悟)은 반드시 의심(疑情)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세 번째 단계는 ‘무심삼매(無心三昧)’이다. 이 무심삼매는 마지막 단계로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경계는 ‘의도정망심절처(疑到情忘心絶處)’이다. 즉 고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심이 정(情)도 잊고 마음도 끊어진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본인이 옛적에 개오(開悟)했을 때 정황을 회고한 것을 보면, “산승이 옛적에 쌍경(雙徑)에 있을 때, 당(堂)에 돌아가 한 달도 되기 전에, 홀연히 몽중에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의심하기 시작해서, 이로부터 의정이 돈발해서, 침식을 잊고, 동서를 분별하지 않고, 주야도 나누지 않고, 자리를 펴고 발우를 펼 때, 똥오줌을 누고, 어묵동정, 모두가 오직 하나의 일귀하처로서, 문득 조금만큼도 다른 생각이 없고…, 비록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마치 한사람도 없는 것과 같아서, 아침으로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맑고 깨끗하고(澄澄湛湛), 높고 높아서(卓卓巍巍), 순수하고 순수해서 하나의 점조차 끊어졌다. 일념만념에 경계가 적적하고 사람도 잊은(境寂人忘) 것이, 마치 정신이 나아간 것과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꼼짝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는 또 일찍이 학인들을 가리킬 때 이러한 경계를 해석하기를 “차를 마셔도 차를 알지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을 알지 못하고, 행하여도 행함을 알지 못하고, 앉아도 앉는 것을 알지 못해서, 정식(情識)이 몰록 깨끗해지고, 사량계탁을 모두 잊으면, 흡사 기는 있지만 죽은 사람과 같고, 마치 니소목조(泥塑木雕ㆍ꼼짝하지 않는 사람(태도))와 같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칭해서 ‘여치여올(如癡如兀)’ 니소목조(泥塑木雕)의 상태를 ‘무심삼매’의 경계라고 찬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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