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火 피한 불화, 도굴범 마수는 못 피해

예천 명봉사에서 도난된 성보들. 사진 왼쪽부터 명봉사 아미타회상도(1863년 作)와 명봉사 신중도(연대 미상). 모두 1996년에 도난됐다.

경상북도 북서부에 위치한 예천은 효(孝)와 정절의 고향으로, 동쪽으로 안동시, 서쪽으로 문경시, 남쪽으로 상주시·의성군, 북쪽으로 영주시와 충청북도 단양군에 접한 지역에 위치한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는 장안사, 용문사, 서악사, 한천사, 보문사, 명봉사가 있었지만, 한국전쟁 중에 대부분 파괴되었고 용문사와 보문사만이 문화재가 잘 남아있고 법맥을 이어가고 있다.

명봉사는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 소백산에 위치한 사찰로, 조계종 제8교구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김룡사에 속해 있었다. 명봉사는 875년에 두운(杜雲)이 창건하였는데, 창건 당시 산 속에서 봉황(鳳凰)이 울어 사찰 이름을 명봉사로 지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941년에 자적능운 선사의 인격과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건립한 탑비가 남아있을 뿐 고려시대 명봉사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왕실은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전국의 명당을 찾아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거쳐 아기의 태(胎)를 봉안하는 태실(胎室)을 조성한다. 그리고 태실이 설치된 고을은 그 격(格)이 상승되기 마련이었다. 특히, 태실의 주인공이 왕위(王位)에 즉위하면 태봉(胎封)으로 봉해지면서 다양한 시설물이 추가로 조성되었다. 명봉사 뒤편에 문종의 태봉이 지정되면서 명봉사의 사격(寺格)도 전에 비해 현격히 상승하였다.

명봉사는 여러 차례 화재로 절이 소실되면서 중창한 기록이 전한다. 1662년에 화재로 사찰이 전소된 뒤 승려들이 중건하였다. 1668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신익(信益) 등이 중창을 위해 10여 년간 시주를 모아 크게 중창하였다. 1807년에 총섭 행선(幸善)이 중수하였다.

근대 명봉사는 1914년에 건립된 김천 청암사 사적비 후면에 당시 본사인 동화사와 고운사가 동일한 후원금을 지출하고, 1934년에 밀양 표훈사 대적광전 중건 시 예천 용문사와 상주 남장사 등과 같이 30엔(円)을 기부할 정도의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1937년 8월 5일 동아일보에 김덕성(金德成) 스님 외 10명이 국방헌금 1원60전을 기부한 것으로 보면 10명 정도의 스님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명봉사는 한국전쟁 중에 소실된 후, 1955년에 주지 만준(滿俊)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속 암자는 고려 태조 때 자적(慈寂) 선사가 건립한 내원암이 있다.

현존하는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과 요사채가 남아있으며, 대웅전 내 1680년대 영남 북부에서 활동한 조각승 단응과 탁밀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대세지보살좌상(木造大勢至菩薩坐像)이 봉안되어 있다. 지정문화재는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鳴鳳寺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유형문화재 3호)와 명봉사문종대왕태실비(鳴鳳寺文宗大王胎室碑, 유형문화재 187호)가 있다.

20세기 전반에 명봉사에 소장된 불교문화재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조선총독부 관보본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20세기 전반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 의하면 명봉사와 산내암자에 봉안된 성보 문화재가 54건 189점으로, 이 중에 불상 7점, 불화 21점이다.

그러나 1932년 12월 13일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관보 1780호에는 불상 7점, 불화 23점으로 불화 2점이 늘어났다.

이 가운데 명봉사에서 문화재청과 조계종 총무원으로 도난 신고를 한 문화재는 아미타회상도(1863년 제작, 1996년 12월 9일 도난)와 신중도(연대 미상, 1996년 12월 9일 도난)이다. (<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2016)>)

현재 사찰에 남아있는 성보문화재는 보살좌상 1점과 현왕도(1890년 작), 산신도(1점), 문수동자도(1점)이 직지사성보박물관에 기탁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쟁 중에 명봉사 소장 대부분의 불상과 불화는 소실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전에 성보문화재연구원에서 영산회상도(1863년 작), 신중도(1863년 작), 현왕도(1890년 작), 산신도(1890년 작과 연대미상)가 조사된 적이 있어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한국의 불화 화기집(2011)>)

명봉사 아미타회상도은 중앙에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서방정토의 교주 아미타불을 크게 그리고, 좌우에 8대보살과 10대 제자, 그리고 사천왕이 아미타불을 에워싸듯이 화면 가득 배치되어 있다. 푸른색의 연화좌 위에 가부좌한 자세로 한쪽 발을 내보이며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 아미타불은 보상화문이 시문된 붉은색의 대의를 걸치고 있다. 육계는 솟아 있으며 원만한 상호를 갖춘 아미타불의 머리와 몸 뒤에는 상서로움을 극대화하고 지혜의 빛을 나타내기 위해 여러 가지 색으로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표현했다. 아미타불의 설채법은 적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고 부분적으로 청색과 호분을 사용했다. 이 아미타회상도는 도난 이전에 화기(畵記)가 조사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제작된 영산회상도(同治二年」秋八月初」新畵成後」幀」奉安于本庵」緣化秩」?明 就起??」誦呪比丘 ??」金魚 說荷瓘幸」片手比丘」 … 以?」?? …)와 신중도(同治二年秋八月初新畵成奉安于…)의 화기를 통하여 1863년 8월 초에 금어 설하관행(說荷瓘幸)을 비롯한 불화승이 조성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금어 설하관행은 의운자우(意雲慈友)의 계보에 속한 불화승으로. 1861년 경남 밀양 표충사 아미타후불도 조성에 출초(出草)로 참여하고, 1861년에 수화승으로 경북 청도 운문사 아미타회상도를 그린 후, 스승인 의운자우와 1862년에 경북 영천 은해사 운부암 아미타회상도와 1863년에 영천 묘각사 아미타회상도, 1864년에 수화승 응월선화(月善和)와 부산 범어사 대성암(大聖庵) 아미타회상도를 조성하였다.

문화재청에 도난신고 되어 올라와 있는 명봉사 신중도는 화면을 세 단으로 나누어 여러 존상을 배치하였다. 우선 윗부분에는 원형의 두광을 두른 대자재천과 범천, 제석천을 상반신만 보이게 그리고 얼굴 바로 아래에 두 손을 모아서 비스듬하게 오른쪽 방향으로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가운데 부분에는 신중의 권속 가운데 북, 장구, 바라, 피리 등 악기를 연주하는 천동과 천녀를 배치하고 있다. 아랫부분에는 깃털이 장식되어 있는 투구를 쓰고 갑옷으로 무장한 위태천을 중앙에 세운 구도로 좌우에 신장을 표현했다. 그런데 이전에 조사된 신중도의 크기는 가로 142cm, 세로 191cm이고, 문화재청에 신고된 신중도 크기는 가로 204cm, 세로 154cm로 두 작품은 크기가 차이가 난다. 일제강점기 재산대장을 보면 명봉사에 봉안된 신중도 3점으로, 세로 4척4촌과 가로 4척6촌, 세로 7척5촌 가로 7척2촌, 세로 4척, 가로 5척5촌 이라 적혀 있어 거의 정사각형 2점과 직사각형 1점이 소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신중도는 거의 200㎝가 넘는 크기로, 문화재청에 신고된 불화의 크기를 가로와 세로를 오기(誤記)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신중도 화면 구성으로는 1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기존 조사된 동치 2년명 신중도와 다른 작품일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도난 신고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세심하고 정확한 내용으로 도난성보를 찾아내는 일에 신중하게 접근해 가야 할 것이다.

1996년 12월에 도난당한 예천 명봉사의 불화 2점은 문화재청과 종단에 신고가 되어 있다. 종단 관계자뿐만 아니라 사찰이 앞장서서 도난 성보의 행방을 찾아내는 방안을 모색해나가야 할 것이다. 도난성보가 하루 빨리 제자리에 봉안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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