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작가 김숙현(75)·기업인 배기수(80) 부부

배기수 회장은… 1963년부터 1979년까지 국회사무처 입법담당관으로 일했으며, 1979년부터 ㈜한독 대표이사회장을 맡고 있다. 1981년 일타스님으로부터 법명 ‘덕운’을 받았다. 한국불교연구원 부산구도회 고문, 은해사 거조암 신도회장, 양산 통도사성보박물관 후원회부회장과 강사, 통도사 반야암 거사림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한국불교연구원 부산구도회 포교사자격 시험을 통과했으며, 통도사성보박물관 불화연구반을 수료했다. 김숙현 작가는… 동국대와 경남대에서 연극영화학과 문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대문학’에 희곡 ‘잔영’으로 등단했다. 대한불교 기자로 일했고,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이다. ‘환화여, 환화여’ 등 30여 편의 희곡을 썼고, 4권의 희곡 선집을 냈으며 1980년 한국희곡작가협회로부터 한국희곡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88년 제33회 현대문학상, 2001년 봉생문학상, 2009년 한국여성연극인협회 ‘올빛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의 집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인연 속에서 살아간다. 한 순간으로 끝나는 인연부터 평생을 함께 하는 인연까지, 매순간 인연 앞에 선다. 한 생을 누구와 함께 하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빛깔은 달라진다. 그 인연 중에 같은 곳을 바라보며 오랜 세월을 함께 할 수 있는 인연을 ‘벗’이라고 한다. 그 벗 중에서 함께 불도를 향해 가는 인연을 다시 도반이라고 한다. 한 생에서 진정한 벗, 그 중에서도 ‘도반’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하고 값진 일이다. 부부의 인연에 도반의 인연을 더해 사는 인연이 있다. 희곡작가 김숙현 씨와 기업인 배기수 회장이다. 그들은 서로 각자의 길에서 불법(佛法)을 만났고, 각자가 지닌 불교로 살면서 ‘불도’라는 길을 나란히 걷고 있다.

김숙현 작가의 불연

동대 입학 후 불교 만나
대한불교 기자 입사
법정 스님 첫 유발상좌
대련화 법명 5계 수지
일타·지관 스님 등 인연
부산 연꽃모임 신행활동
1969년 ‘잔영’으로 등단
희곡 30여 편 선집 4권 발표
현 불교신문 논설위원
‘천수천안’ 15년 째 연재


인생은 한바탕 연극
‘인생은 한바탕 연극’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모두는 무대 위에 선 배우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언어는 궁색하다. 지금 이 시간을 현실이라고 해야 할까. 연극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우리의 삶은 쉽지 않은 것이다. 한 마디 언어 따위로는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이기에 우리는 곳곳에서 답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바탕 연극이 벌어지고 있는 사바, 그 사바라는 무대에 그 답을 찾기 위한 한 편의 연극이 무대에 오른다.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부산 한결아트홀에서는 연극 ‘자물쇠는 뻐꾸기 소리에 맡겼다(부제-화반탁출(和盤托出)’가 공연된다. 김숙현 작가가 2015년 발표했던 희곡이 원작이다. 연극은 주인공 오세영의 공간인 소극장과 수좌들의 세계인 선방과 토굴, 두 개의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연기의 도’를 향한 연극배우의 치열한 자기 탁마와 ‘득도’를 위한 수행자들의 결기와 참구 자세를 함께 보여줌으로써 삶의 화두가 승속 간에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전작 ‘환화여, 환화여’가 원효라는 전설적 인물의 득도 해탈을 다뤘다면 ‘자물쇠는 뻐꾸기 소리에 맡겼다’는 고승대덕이 아닌 평범한 사람에게 던지는 의미심장한 선문답이다.
그 동안 김 작가는 작품 속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남다르게 갈등하며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통해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려 애써왔다. 김숙현의 사바에서의 한바탕 연극은 치열하고 진지한 수많은 연극을 들여다보고 다시 한 편의 연극을 짓는 것이다. 우리가 끝내 알 수 없을 지도 모를 ‘삶’, 김숙현은 그 삶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은 다름 아닌 불법(佛法)이다. ‘김숙현’이라는 한바탕 연극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꿈을 찾아서
김 작가는 꿈 많고, 끼 넘치는 소녀였다. 김 작가의 끼가 향하는 꿈은 ‘예술’이었다. 어떤 분야가 될지는 몰랐지만 소녀 김숙현의 혈관을 채우고 있는 것은 변화무쌍한 빛깔과 복제될 수 없는 감성의 언어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김 작가의 환경과 상황은 예술을 꿈꾸고 있는 김 작가를 돕지 못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 주머니를 뚫고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김 작가는 스스로 자신을 도왔다. 개인지도나 특별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김 작가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책 속엔 문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예술을 꿈꾸고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수없이 많았다. 김 작가는 책 속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다.
마침내 김 작가에게도 인생에 있어 첫 번째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왔다. 대학진학이었다. 김 작가는 서울사범대 영문학과를 지원했다. 예술을 꿈꿨던 김 작가였지만 그 꿈을 대학 진학으로 연결시킬 생각은 그야말로 ‘꿈’이었다.
김 작가는 낙방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일까. 지금의 김숙현을 생각하면 낙방이 김 작가를 도왔다고 할 수 있다. 김 작가는 영문학과 낙방을 계기로 홀가분한 결심을 할 수 있게 된다. ‘전화위복’이었다. 김 작가는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
“연극영화과에 가면 무엇이든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기왕 이렇게 된 것,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해보기로 했죠.”
김 작가는 그 때까지도 구체적인 꿈을 만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체적으로 공부를 해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역시 김 작가에겐 잘 된 일이었다. 김 작가는 구체적인 꿈이 없었기에 연극영화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훗날 희곡 작가가 된다. 김 작가가 처음부터 글을 쓰는 작가를 꿈꿨다면 연극영화과를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김숙현의 글쓰기는 다른 작가의 글쓰기와 태생이 다르다. 오히려 희곡작가로서는 김숙현이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다. 글에서 시작한 글(희곡)이 아니라 연극영화에서 비롯된 글(희곡)쓰기이기 때문이다.
1969년 희곡 ‘잔영’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김 작가는 지금까지 <환화여, 환화여> 등 30여 편의 희곡을 썼으며 4권의 희곡선집을 냈다. 대한불교를 퇴사한 이후에는 부산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하면서 법향 가득한 칼럼으로 보이지 않는 전법공덕을 쌓았고, 부산일보 정년퇴직 후에는 불교신문으로 돌아와 15년 째 ‘천수천안’을 연재하고 있다.

법정 스님을 만나다
김 작가의 불연은 동국대에서 시작된다. 김 작가는 1학년 때 불교와 처음 만난다. 김 작가가 동국대가 아닌 다른 대학에 진학했다면 김 작가는 불교와 만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김 작가는 불교학개론 시간에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던 ‘실존주의’를 부처님의 ‘무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김숙현은 어느 각자(覺者)의 한 마디에 가슴이 뛰었다. ‘佛’과의 첫 ‘스침’이었다.
그리고 김 작가에게 두 번째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왔다. 취업이었다. 김 작가의 선택은 글을 쓰는 기자였다. 김 작가의 인연은 대한불교(현 불교신문)였다. 대한불교 입사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불교공부를 하던 김 작가는 ‘팔고(八苦)’와 만난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 사고(四苦ㆍ희로애락)만 알고 있었던 김 작가의 가슴은 또 한 번 뛴다. 그렇게 불교는 계속 김 작가의 가슴을 뛰게 했다.
마침내 김 작가는 대한불교에 입사한다. 그리고 법정 스님을 만난다. 김 작가는 대한불교 공채 시험장에서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났다. 당시 법정 스님은 대한불교의 주간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김 작가가 입사한 후에는 상임논설위원으로 자리를 바꾼다. 법정 스님은 봉은사 다래헌에 계셨다. 새내기 기자였던 김 작가는 바지선을 타고 한강을 건너다니며 법정 스님의 원고 심부름을 했다. 그렇게 김숙현은 하루하루 법정 스님과 인연을 쌓아갔다. 하지만 김 작가의 대한불교와의 인연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듬해 김 작가는 결혼을 하고 회사를 그만 두게 된다.
“제가 불제자임을 자각하고 빛나는 불법을 수지하게 된 것은 불교계의 큰 그늘이었던 법정 스님과의 인연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작가의 불연은 다시 이어진다. 1975년, 김 작가는 법정 스님으로부터 ‘대련화’라는 법명과 오계를 받고 첫 유발 상좌가 된다. 당시 법정 스님에겐 승속을 합쳐 단 한 명의 상좌도 없을 때였다.
“보살은 원력으로 태어나고 중생은 업에 끌려 태어난다고 했다. 너는 내생에도 지금의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으냐?”
어느 초파일 김 작가는 두 아들을 데리고 봉은사 다래헌을 찾았다. 오랜만에 김 작가를 본 법정 스님은 부처님 곁으로 더 깊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김 작가가 안타까웠다. 불연의 길에 서있으면서도 그 길을 오롯이 걷지 못하고 있는 김숙현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스님의 일갈에 김 작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 작가는 발심했다. 김숙현으로만 살아선 안 되었고, 법은 다섯 가지면 되었다.
그 후 김 작가는 일타 스님, 지관 스님 등 여러 선지식들과도 인연을 맺으며, 불제자로서 진일보한 신행을 하게 된다. 1979년 부산으로 집을 옮긴 김 작가는 신행단체 부산 연꽃모임과 인연을 맺고 수행과 신행을 넓혀나갔다.

김숙현의 연극 '자물쇠는~ '
10.31~11.4 부산 한결아트홀

 

배기수 회장의 불연

춘원 소설 보며 불교 만나
부산구도회서 경전 공부
포교사 자격 시험 통과
일타 스님 인연 법명 받아
거조암 신도회장 6년 절수행

1981년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과 김숙현 작가(왼쪽).
1982년 김숙현 자택에서 김 작가(두번째)와 지관·법정·일타 스님(왼쪽부터).

 

다른 빛깔 배기수, 그 이름은 ‘도반’
김 작가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했고,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다. ‘가정’이라는 소중한 것을 얻었지만 불연을 생각한다면 조금은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아쉬움 뒤에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불연이 있었다. 다름 아닌 남편 배기수 회장이다.
배 회장은 어린 시절 불법과 만났다. 학자였던 형님의 방엔 책들이 가득했다. 배 회장은 그곳에서 불교와 만난다. 김 작가가 학창시절 도서관에서 자랐다면 배 회장은 형님의 서가에서 자랐다. 많은 책들이 어린 배 회장의 가슴을 지나갔지만 배 회장의 마음에 내려앉은 씨앗은 역시 ‘불교’였다.
배 회장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와 이광수의 작품 등에서 일찍이 불교를 만난다. 말이 필요 없는 일연 스님의 역작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 불교의 뿌리부터 알게 되었고, 이광수가 “나는 비로소 소설다운 소설을 썼다”고 했던 <무명(無明)>, 일제강점기 이후 반세기 이상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여러 차례 재출간되었던 <원효대사> 등을 통해 배 회장은 불법을 만난다.
그런 배 회장의 불연은 김 작가의 불연과는 다른 빛깔이다. 김 작가의 불연이 선명한 시절과 분명한 이유가 있는 불연이라면, 배 회장의 불연은 아이가 말과 걸음마를 만나듯 어느 날인지 모르게,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가랑비에 젖어버린 불연이다.
김 작가의 불교가 생활 속에서 피운 꽃이라면 배 회장의 불교는 구법으로 자란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작가의 불교가 시절마다 찾아든 불연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배 회장의 불교는 시절마다 찾아 나선 불연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작가가 ‘자물쇠는 뻐꾸기 소리에 맡겼다’를 탈고하는 데 약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특히 ‘간화선’은 높은 벽이었다. 선방에도 앉아 보지 않은 재가자가 수좌의 이야기를 통해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 자체가 ‘벽’이 아니라 난센스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작가는 한 편의 희곡을 완성했고, 희곡은 마침내 무대에 오른다.
김 작가가 작품을 쓰고 칼럼을 쓰면서 크고 작은 벽을 만날 때마다 김 작가의 곁에는 배 회장이 있었다. 막막한 시간, 도반으로서 마주 앉는 것만으로 막혔던 길이 트이고, 주고받는 부처님 이야기 속에서 벽은 허물어졌다.

조용한, 그러나 금강 같은 걸음
김 작가가 법정 스님을 만났다면 배 회장의 큰 인연 중의 하나는 일타 스님이다. 배 회장의 법명 ‘덕운’은 일타 스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배 회장의 일타 스님과의 인연은 김 작가에서 비롯됐다.
“불교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절에 가서 절만하고 오는 불교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업가의 길을 걸었던 배 회장에게 하루하루 화살처럼 지나가는 시절이 늘 아쉽고 안타까웠다. 사업을 하면서 힘든 시간을 만날 때마다 배 회장이 서성인 곳은 ‘불교’였다. 불교의 위대함을 경험한 바 있는 배 회장으로서는 힘든 시간이 올 때마다 늘 불교가 그리웠다.
배 회장은 어느 날, 신문에서 불교교리 강좌에 대한 공고를 보게 된다. ‘한국불교연구원 부산 구도회’의 강좌였다. 배 회장은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강의를 들었다. 새롭게 만나는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배 회장은 점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배 회장은 일타 스님을 만나게 된다. 이미 김 작가는 일타 스님과도 인연을 쌓고 있었다. 배 회장의 경전공부가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배 회장은 김 작가로 인해 가끔 일타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 회장의 불교공부는 ‘경전’이 전부였다.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배 회장은 일타 스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경전에만 불교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활자 속에서 만나는 불교와는 다른 불교가 있었다. 서로 나누는 눈빛과 음성 속에도 불교가 있었다.
“불교공부라는 것이 경전만 보면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의 불교는 여러 스님들과 인연을 쌓아가며 공부하던 아내의 불교와는 조금 달랐죠. 그런데 새로운 불교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불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배 회장과 일타 스님의 인연은 하루하루 깊어졌고, 배 회장의 불교도 새로운 시절을 맞는다. 배 회장은 일타 스님과의 인연으로 인해 6년 동안 거조암 신도회장을 맡기도 했다.
“거조암에는 육백나한이 있어요. 신도회장 하는 동안 일주일에 두 번 씩 거조암을 찾았어요. 갈 때마다 육백나한 한 분 한 분께 일일이 절을 올렸죠. 그렇게 6년을 살고 나니 ‘하심’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공부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배 회장의 불교는 그렇게 나이테를 늘려갔다. 조용하지만 금강 같은 걸음으로 부처님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도반의 향기
“서로 이야기하다보면 이 친구는 말 두 마디 만에 불교 얘기가 나오니까 생활 자체에서 많은 공부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업한다고 틈 없이 살면서도 불교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을 수 있었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 작가와 배 회장은 불연에 있어서는 오랜 세월 서로에게 동기이고 계기였다. 서로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서로의 길이 되어준 것이다. 오늘도 글을 쓰고 있는 김 작가 곁에는 오랜 벗 배 회장이 있고, 늘 공부를 찾아나서는 배 회장 곁에는 다른 빛깔의 김 작가가 있다. 다른 빛깔로 곁에 있는 두 사람은 오늘도 같은 길 위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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