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기수 김병호

형 집행대기 상태로 언제 생명이 박탈될지 알 수 없는 사형수, 그리고 이미 종신형이 선고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수인생활이 지속되는 무기수. 앞서 소개한 18명의 사형수에 이어, 이번 19번째 재소자부터는 무기수의 삶을 조명한다.

‘감옥에서 맞는 죽음’을 둘러싼 그들의 삶은 상반된다. 형 집행이 불시에 정해지기에 항시 불안과 초조 속에 사는 사형수와 달리, 무기수는 중병 환자 등 특수상황을 제외하고는 본인도 자신의 죽음 시점을 예견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하루하루 막연하게 이어지는 삶을 감내해야 된다. 무기수의 삶은 그렇게 출소의 희망도, 죽음의 기약도 없이 교도소에 몸이 묶인 채 교정일상을 반복하는 삶이다.

첫 번째로 소개할 무기수는 수인생활 내내 가난이란 멍에를 지고 황소처럼 살다간 김병호(55) 씨다. 김 씨는 교도소에서 쉼 없는 26년을 보냈다.

6·25때 억울한 반역 혐의
26년간 무기수로 징역살이

가난 대물림 끊기 위해
죽기 전까지 노역에만 몰두

손자 위해 일당 전액 저축
“황소처럼 성실하게 살거라”


김 씨와는 1970년대 초 대구교도소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가난한 농사꾼 출신의 사형수였다. 6·25전쟁 당시 적군을 도운 혐의로 투옥됐다.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고 포탄을 지게에 나르라는 적군의 협박 앞에 김 씨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그때 김 씨가 협박에 맞섰다면 김 씨는 감옥이 아니라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은 김 씨는 모범적인 재소생활 덕분에 9년 4개월 만에 무기로 감형됐다.

김 씨에게는 손자가 있었다. 김 씨의 아들은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죽었다. 아버지를 여읜 손자를 둔 김 씨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대대로 가난에 시달린 김 씨는 손자에게만큼은 그 지독한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죽은 아들대신 아버지의 마음으로 손자를 위해 남은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김 씨는 나와 만나는 개인교회(敎誨)시간 외에는 일절 작업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하루 급여 5원을 받고 주어진 모든 시간을 일에만 쏟았다. 교도소 내 그를 아는 이들은 김 씨가 지독하다고 손가락질했다. 돈을 모을 줄만 알지 도무지 돈 한 푼 쓰는 법이 없는 인색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어느 날은 인기가수 이미자 씨가 대구교도소로 위문공연을 왔다. 당시 최고 인기를 누렸던 이미자가 온다는 소식에 그 날은 온 교도소가 들썩였다. 지옥 같은 수감생활을 하는 재소자들에게 공연은 흔치 않은 즐거움 중 하나였다.

공연을 서로 보겠다고 설치는 3000여 명의 재소자들을 강당에 모두 앉힐 순 없었다. 따라서 교도소는 매번 모범수를 우선 입장시키곤 했다.

조용히 일만 하는 김 씨는 모범수 중의 모범수였다. 가장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도 김 씨는 강당에 발 한 번 붙인 적이 없었다. 이미자가 아니라, 어떤 유명가수가 와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김 씨의 사연이 궁금해진 나는 그에게 물었다.

“돈을 어디에 쓰려고 그리 일만 하십니까.”

“저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스님. 제가 수감되기 전 아들놈을 잃었는데, 손자가 눈에 밟히고 또 밟힙니다. 그 손자에게만은 꼭 어떻게든 돈을 모아 황소 한 마리를 사주고 싶어서요. 사형수로 들어와 이젠 무기수가 되었는지라, 죽을 때까지 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제 남은 마지막 소망이자, 할애비가 손주놈에게 해줄 수 있는 아비노릇이겠지요.”

사연이 알려진 그는 ‘황소 할아버지’란 별명을 가지게 됐다. 이 황소할아버지는 5년 동안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꼬박 모아 결국 송아지 한 마리 값을 마련했다.

김 씨는 모은 돈을 자신의 며느리에게 전하며 말했다.

“이 돈으로 송아지를 사서 키워다오. 다 키운 황소를 팔아 아이 몫으로 해 주었으면 한다. 게으름 피우지 않는 황소처럼 살라는 뜻에서 할애비가 주는 것이라고. 내가 손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구나.”

이후 그는 병을 얻어 교도소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가난의 대물림에 한 맺힌 김 씨는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쟁기질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아들대신 아버지 노릇을 다하고 기꺼이 눈 감은 황소할아버지의 죽음을 잊지 못할 것 같다.

‘황소 할아버지’로 불린 김병호 씨는 하루도 쉬지 않고 교도소에서 5년간 일한 돈을 모아 손자에게 황소 한 마리를 선물했다. 사진은 고령의 재소자들을 만나고 있는 삼중 스님(왼쪽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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