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 조선 건국 다시보기 기획 ‘눈길’

일반적으로 조선시대를 ‘숭유억불(崇儒抑佛)’,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했던 시기로 인식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불교는 숭불에서 억불로 단절되는 역사를 겪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담론이 지나친 일반화이며, 과잉 해석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역사 전문 학술지 〈역사비평〉은 통권 제123호에서 ‘조선 건국 다시보기-불교, 유불교체의 파고를 넘다’를 기획으로 다뤘다.

기획에서는 사상·종단·승도·서적 등 4가지 주제로 각 분야 전문 연구자들이 여말선초의 왕조 교체 시기를 연속성적 측면에서 조명했다.

‘思·宗·僧·書’ 주제 나눠 분석
숭유억불 인식 1910년대 고착
지나친 일반화… 과잉해석 담론
고려·조선불교 단절 아닌 연속


숭유억불, 식민사관의 산물
사상적 측면에서 접근한 김용태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는 ‘숭유억불’ 담론이 정치·사회사적 측면은 어느 정도 부합하지만 사상·신앙적인 면에서는 단절이 아닌 연속성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숭유억불’이라는 조선불교의 수식은 그 태생이 당대가 아닌 후대의 인식이 반영된 일종의 ‘조어’임을 분명히 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숭유억불’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일본의 숭불 전통과 조선의 억불을 비교한 1906년 10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 사설에서다. 이후 1911년 일본인 학자 후루타니 기요시의 〈이조불교사경개〉 서언에서 ‘배불숭유’가 사용되는데 그는 조선시대를 ‘한 편의 불교 쇠망사’라고 단언했다.

또한 다카하시 도오루는 저서 〈이조불교(1929)〉에서 “조선불교는 억압과 쇠퇴로 발전이 정체되고 여성과 서민의 신앙을 제외하면 독자적 특성이 없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숭유억불이나 유불교체, 그로 인한 불교의 침체라는 조선불교에 대한 전형적 인식은 1910년대 이후 고착됐으며, 이는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면서 “‘숭유억불’ 개념은 정치이념, 주류사상, 시대의식에 한정시켜볼 때는 이해가 가지만, 가치관과 심성, 종교와 문화 등을 포괄하는 전통의 장기지속성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신앙적 단절없이 연속돼
그러면서 김 교수는 국가 의례를 제외한 고려의 불교신앙이나 재회의 상당수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단절없이 이어졌으며, 왕실에서도 숭불과 후원의 양상이 조선 말까지 계속돼 왔음을 예로 들었다. 조선 태조는 흥천사에서 우란분재를 열고 국행 수륙재를 설행했으며, 〈세종실록〉에는 우란분재를 당시의 세시풍속으로 소개하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여말선초기 정치이념과 시대사조는 분명 유교로 전환됐지만, 종교와 관습의 영역에서 불교가 가진 지속성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면서 “왕조 교체를 단절과 전환의 기점으로 획정하기보다는 이 시기를 변동과 연속의 두 관점에서 바라보고 보다 긴 호흡으로 역사의 흐름을 조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단절 아닌 변화로 봐야
조선 초기 불교 정책을 종단의 측면에서 살핀 박광연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교수와 승려의 관점서 분석한 양혜원 서울대 강사도 여말선초 시기의 불교를 단절이 아닌 연속과 변화로 해석했다.

손성필 한국고전연구원 선임연구원은 15세기 국왕과 왕실의 불교서적 간행을 재조명하며 기존의 연구 관행과 통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단선적 발전이라는 역사 인식이 가지는 맹점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손 연구원은 “유불교체, 숭유억불 등은 단선적 역사 발전 인식이라는 서유럽의 역사 모델을 한국사에 대입하면서 지나친 일반화·이분법으로 과장 해석된 담론”이라고 지적하면서 “단선적·결정론적 인식에 따라 역사 현실을 일반화하면 소외되는 분야·주체·사건 등이 발생한다. 조선시대 불교와 15세기 불교서적이 그러한 사례”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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