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고 하는 게 그대로 법이요, 중용입니다!

 

마음을 밝히고 안으로 구하려면…

질문 스님께서는 늘 ‘오직 자기 마음 안에서 구해서 밝혀 나가고 깨쳐 나가야만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제가 생활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밖으로 치닫기 일쑤고, 보이는 물질세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어떻게 수행하면 그렇게 안에서 구하고 마음을 밝혀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지요.

답변 만날 한 말이 그 말인데요, 뭐. 하지만 진짜로, 여러분이 아주 진짜로 믿고 절감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내가 이렇게 말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주 급박할 때, 물에 빠져 다 죽어 갈 때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심정, 그 정도가 돼야 ‘아이고!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아주 그냥 절박하게 하죠.

자기 뿌리를 자기가 안 믿으면 누굴 믿을 겁니까?
이름을 믿을 겁니까, 형상을 믿을 겁니까?
당신을 이끌어 가는 진실한 당신을 믿어야죠.

미국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일본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요, 나한테 전화를 할 때는 아주 절박하게 합니다. “알았어. 절박하게 관해 봐!” 그러면 그 이튿날이고 그 다음 날이고 전화가 또 뚜르르 옵니다. “아이구, 전화하고 나니까 그냥 멎었어요. 스님, 참 감사합니다.” 이럽니다. 그러면 “응, 네 전깃줄과 내 전깃줄이 둘이 아니게 돼서, 둘이 아닌 까닭에 불이 들어왔을 뿐이지, 내 전깃줄이 제일이고 네 전깃줄은 아니고 이런 게 아니라 네 마음의 전깃줄하고 내 마음의 전깃줄하고 같이 합쳐 놨으니까 불이 들어온 거다. 그러니까 ‘네가 낫게 했다, 내가 낫게 했다’ 하는 것도 없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역시 진정으로 믿어야죠. 자기 뿌리를 자기가 안 믿으면 누굴 믿을 겁니까? 이름을 믿을 겁니까, 형상을 믿을 겁니까? 또 스님네들의 고깃덩어리를 믿을 겁니까, 네? 어떻게, 어떻게 할 겁니까? 당신을 이끌어 가는 진실한 당신을 믿어야죠.

그러니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경이나 각처의 스님네들이 이끌어 주는 그것은 역시 길잡이밖에 안 되는 겁니다. 나부터도 길잡이밖에 안 되는데 방편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죠. 스님네들이 방편을 안으로 두게끔 썼으면 좋겠는데 바깥으로 기도하고 빌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요. 가톨릭교고 기독교고 전부 그래요. 하여튼 모두 바깥으로 기도하게 하고 바깥으로 믿게 하거든요. 주처는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있는 건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진짜 자기부터 알아야 일체를 다 알 수 있다고 가르치셨는데 모두 타의에서 구하고 있고 바깥으로 기도하고 있어요.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세계적으로 봐도 다 그래요. 알라신교니 티베트 불교니 기독교니 가톨릭교니 그런 사람들 다 만나 봤고, 또 어떻게 하나 기웃거려 봤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엇나가는 격이 많거든요. 부처님이 가르치신 그 뜻을 아예 뒤바꿔 놓고 가르치는 거와 똑같죠.

그러니 우리가 경 한 번을 본다 하더라도 경을 달달달달 외워서 그 이름을 알고 말을 아는 게 아니라 그 진실을 알아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모두 진실한 자기, 못났든 잘났든, 정말 왜소하고 못나서 애쓰는 그러한 사람도 역시 자기 원소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원소 그 자체 불성은 변하지도 않는 거고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아주 영원한 겁니다. 그러니 그 영원한 자체의 불성은 사람이 못났든 잘났든 잘 배웠든 못 배웠든 그거를 떠난 자립니다. 그러니 실망하시지 말고 뒤로 물러서지도 마시고 공부 열심히들 하세요. 내면으로 믿고, 당장 ‘주인공 뿌리야! 너만이 알고 있어.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거길 믿고 진정코 진실한 마음으로 해 보세요, 안 되나 되나.

호국 불교 정신에 대해서

질문 부처님의 뜻을 받드는 불제자들은 항상 겸손하고 숭고하게 호국 불교를 염원하면서, 한생각을 호국 불교의 정신으로써, 나가서 몸뚱이로 돌아치는 게 아니라 항상 앉아서 염원하면서 게으르지 않게 정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스님께서 가끔 말씀하셨습니다만, 저희처럼 공부가 미천하고 이 마음공부의 길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초심자들은 호국 불교 정신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가르침을 구합니다.

답변 우리가 호국 불교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호국 불교라는 이름도 이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살고 있느니만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만큼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 하겠기에 하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여러분의 마음 하나가 하는 게 아니라, 바로 ‘주인공!’ 하면 천체 일체 만물만생의 그 마음이 한데 합쳐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분야든지 여러분이 잘 듣고 잘 봐서, 시각적으로나 촉각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오관을 통해서 볼 때에, 세계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있다면 한생각 낼 수 있는 그 마음이 바로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육신으로 찾아다니면서 했지만 지금은 한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한마음이 그렇게 무궁무진하게 참, 세계적으로 어느 생명이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내 몸이 아닌 게 없기 때문에 어느 분야에도, 만약에 과학자들의 몸이라면 바로 그 몸이 내 몸이 되는 그런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주인공 안에는 무지하게 수많은 법신과 보신과 화신이 있으며 진여의, 무루의 그, 정말 무궁무진한 자신의 그 신들이, 무형신들이 헤아릴 수 없이 있으니 내 한생각에 무조건 법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요량을 모른다면 앉아서 한생각을 내서 우주를 다룰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주를 다룰 수 없고, 내 마음 하나 다룰 수 없다면 모든 것을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정말이지 앉아서 호국 불교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그 도리를 아시게 된다면 바로 방방곡곡에 손이 안 닿는 데가 없고 발이 안 닿는 데가 없고 참, 그 마음의 향운공이 어디고 닿지 않는 데가 없고 양식이 안 되는 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 자체가 향과 같이 풍겨 나가면서 수없는 사람들을, 나쁜 사람들은, 독재는 평화스럽게 이루도록 다루어 나가고, 인색하지 않게, 풍요롭게 다루어 나가면서 사랑을 하게끔, 도의와 의리를 지켜 나갈 수 있게 하는 그 마음을 준다면, 바로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돼서,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서 우리나라를 잘 다스려 나갈 수 있고, 바로 우주와 더불어 상응을 할 수가 있으니 여기는 그대로 천국이 될 수 있는, 아니 물질과학보다도 정신과학으로, 또 문명으로도 발전이 되고 아주 풍부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가난하면 우리나라도 가난할 것이요, 전체가 나 아님이 없다는 소리는 언감생심 말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그 참뜻을 알아서 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유심과 무심이 어떻게 해서 유심과 무심이라고 이름을 두 개를 지었을까. 무심은 바로 무루의 그 참자기의 마음, 예전에도 얘기했죠, 금강 자석과 같은 거라고. 그러니까 그런 금강 자석과 같은 움죽거리지 않는 능력으로, 유심으로서는 아주 어떤 분야든지 가서 일을 할 때에 끊고 맺듯이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유(有)의 법으로만 기울어져서도 아니 되고 무의 법으로만 기울어져서도 아니 되고, 양 개체를 다 한꺼번에 한 주먹에 쥐고 주먹을 불끈 들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라야만이 천국을 만들 수 있고, 천국을 다스릴 수 있고, 이 세상을 다스릴 수가 있다. 그럼으로써 그 부처는 법신의, 또 법신의 그 능력으로, 화신으로서, 보신으로서 바로 호국 불교를 다룰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으로써 전자에는 그렇게 어렵게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앉아서들, 누가 하라, 말라 할 게 없이 내 자신을 밀고 나간다면 그대로, 그대로 될 것입니다. 마음을 좁게 쓰지 말고 좀 더 넓게 써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여러분에게, 모두 전체에게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제가 말씀드린 걸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요.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산으로 올라가다 보니까 그 돌팍 밑에 소나무가, 배배 틀려 가지고 올라간 소나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나무를 보는 순간 말입니다, ‘야, 너도 배배 틀려서 나와 똑같구나.’ 그런 생각이 무뜩 들면서 그 나무 한 그루가 내 몸과 같이 참 가련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련해서 가련한 게 아니라 그것이 둘이 아니어서 그런 생각이 드니까 “참, 너도 나와 똑같구나.” 하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소나무가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나는 비비 틀려서 이렇게 돌팍 속에 있는 거라고 생각이 되지만 당신은 왜 그렇게 비비 틀려서 걸음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그렇게 가면서도 가질 못하고 있습니까?”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랬습니다. “너 때문에 그렇다.” 그랬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다고 하니까, 그것에는 아무 소리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서 또 지나가다 보니까 토끼 한 마리가 깡충깡충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토끼가 이렇게 가다가 이쪽으로 홱 돌아서면서 나를 이렇게 힐끔힐끔 보면서 빨리 가지를 않고 무츰무츰하면서 돌아섰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 생각 없이 가는데 토끼를 쫓아가다 이렇게 돌아서면서 보니까 그 아래는 천야만야한, 즉 말하자면 덫을 놓은 자리입니다. 덫을 크게 놓고 거기에 짐승들이 빠지면 잡으려고 구덩이를 파 놓은 자리예요. 그 토끼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내가 거기에 빠졌을는지도 모르죠. 토끼가 어쩌면 그렇게 영리하게, 무츰무츰 가면서 나를 돌아다봐 가면서 그렇게 가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때에 아차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 ‘야, 토끼야! 너도 나하고 둘이 아니구나. 어쩌면 둘이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이렇게 편안하고 전부, 풀포기 하나도 내 친구 아님이 없으니 나는 참 기쁘다. 외로움도 없고 고독함도 없고 모두가 친구로구나!’ 하면서 참, 너무 기뻐서 토끼를 안아 주려고 쫓아가다 보니까 토끼는 토끼대로 놓치고 나는 나대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토끼는 갔지만 나하고 토끼하고는 항상 같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풀잎과 이 산천초목이 다 나와 친구고 벗이 돼서, 내 가슴에 언제나 항시 같이 있기에 나하고 항상 벗이 돼 줘서 내가 길을 잃으면 항시 일러 주었습니다. 나무도 길을 안 일러 준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몇 시나 됐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벌써 ‘지금은 어느 때쯤 됐지.’ 하는 그런 말을 전해 줬습니다. 그게 왜 그런가? 내가 나를 통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 여러 생명들하고 다 같이 통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다면 바로 앉은 좌가, 좌선이라는 것이 선방에만 앉아서 좌선이 아니라 앉았다 서고, 눕고 자고 깨고, 화장실에 가고 먹고 이런 것이 전부 참선이라는 뜻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모든 거, 하나하나가 선 아닌 게 없고 의정 아닌 게 없으니, 모든 것을 그렇게 해서 우리가 참선이라는 것이 감응이 되고 알아질 때, 비로소 모든 그 위력이, 천 가지 만 가지 헤아릴 수 없는 위력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는 거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재사 상에 올리는 우주떡의 의미

질문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워서 살아 있는 사람도 생활하기가 힘든데 돌아가신 조상님들까지 정성스럽게 모시고 살기에는 너무나 힘든 시절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큰스님께서 조상님을 위한 재사를 간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방편을 내려 주셔서 저희들은 자손들 힘들게 하지 않고 간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자손들은 이 마음공부를 하지 않아 선원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재사를 지낼 때 올리는 우주떡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재사를 지내고 천도재를 지내야 조상님을 진정으로 위할 수 있는지 저희 자손들을 위해 가르침 청합니다.

답변 우리 식구가, 한 식구가 이 세상 식구라고 본다면 우리가 수박 하나를 갖다 놓고 그 수박을 짜개서 식구가 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씨는 되남았거든요. 그래서 그 씨를 심어서 또 중생들이 다 먹고 그 씨는 또 되남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떡 한 그릇이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되남는 떡이죠.

재사 지낼 때 얘기 좀 해야겠네요. 스님네들이 상을 차려 놓고 염불을 하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상을 차려 놓으면 스님네들이 공부를 했든 안 했든 스님네들이 아는 것만치, 스님네들이 ‘아, 돈 얼마를 내놔서 내가 이 음식을 이렇게 차려서 요렇게 해 놨다.’ 이걸 알고 있겠죠, 스님네들이. 그러면 영가가 들어와서 그것만 압니다. 공부를 못한 스님네들한테 밥 한 그릇을 올리고 재사를 지낼 때는 그 상에 차려 놓은 것밖에는 모르니까 영가도 들어와서 그것밖엔 모른다 이겁니다. 그러나 공부한 스님네들이나, 예전에도 선사들한테, 그 산 부처님한테 밥 한 그릇을 올리면 그 공덕이 수미산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공덕이 크고, 그래서 그 선사들이 문을 탁 열어 놓고선 이 세상 삼라대천세계를 전부 요리를 해서 그 밥 한 그릇에다 포함해서 탁 놓으니까 그 밥 한 그릇을 먹고도 되남더란 얘기죠. 그러니 ‘이 세상만사 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거 아님이 없는데 내가 뭐 부족할 일이 있겠는가.’ 하고 영가가 스스로 그냥 한자리를 하게 되는 거죠. 마음먹은 대로요.

그렇게 자유스러운 거를, 만약에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예를 들어서 진짜로 이걸 믿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 한해서만이 얘깁니다. 돈이 없어서 가난해서 그것을 못할 때는 “스님, 스님과 한마음이 돼서 천혼문만 써서 밥 한 그릇 놓고 저 좀 해 주세요.” 해도 그것은 됩니다. 우리가 가난하든지 가난치 않든지 이 불교를 배우는 데는 무슨 지식이나 학식이나 또는 이론이나 또는 가난한 거나 부자나 이런 거를 떠나서 배우는 것입니다.

옛날 얘기 하나 할까요? 어느 스님이 객승으로 어느 절에 갔답니다. 아, 가니깐 말이에요, 아주 춥고 그래요. 추워서 뭐, 잘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중들은 하나도 없더래요. 근데 그 절에 보니까 커다란 목불이 턱 있거든요, 뒤에는 탱화가 있고. 그러니까 탱화 하나면 족하겠다 하고 그냥 목불을 들어다가 도끼로 풍풍 패서 자기 자는 방에 뜨끈뜨끈하게 때고선 터억 잤죠. 스님네들은 천도식을 하고서 새벽녘에 온 거죠. 와 보니까는 아, 불상이 없어졌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객중이 그냥 네 활개를 쩍 벌리고 그냥 뜨끈뜨끈한 방에서 자고 있거든요, 자기네는 추워서 죽겠는데. 그러니까 멱살을 들어서 “이놈의 객, 이놈의 중놈! 아니, 불상을 갖다가 방에다 때고선 자는 놈이 어디 있느냐.” 그러면서 “아니, 부처님을 이렇게 없애 놨으니 어떡하면 좋으냐.” 하고 방방 뛰거든요. “그게 부처님이걸랑 저 아궁이에 가서 뭐 사리가 있나 좀 찾아 봐라!” 그랬답니다.

그래 불을 아무리 뒤져 보니 사리가 나옵니까, 목불인데? “그거 봐라. 그거는 나무지 부처가 아니다.” 이거야. 그러니 부처가 없으니 어떡하면 좋으냐고 방방 뛰는데 아, 난데없이 어느 여인이 어린애를 못 낳는다고 삼신 불공을 하러 왔어요. 그러니까 부처님도 안 계시니 이거를 어떻게 하느냐고 방방 뛰다가 할 수 없으니까 탱화 앞에다가 밥을 지어다 놨죠, 인제. 공양을 지어다 놓고 하니까 “야, 오늘 내가 뜨뜻하게 잔 대신 내가 불공을 드려 주지.” 이러고는 나가더니 이 장삼 자락을 척 쳐들더니 말입니다, 왜 다기 물 모셔 놨지 않습니까? 거기에 손을 턱 담그더니만, 허허, 그 공양 해다 놓은 거를, 공양을 척척척척 둥글려서 쥐어 가지고는 그 탱화 부처님 입에다가 말입니다, 타악 붙이면서 하는 소리가 “이거 생남불공을 하러 왔으니 사내애 하나 줘!” 그러고선 턱 붙여 놓고 “야, 인연 있으면 내년에 또 보세.” 그러곤 가거든요.

아, 그럭하고 그냥 가니까 뭐, 어쩔 수 없죠. 그 절의 스님네들은 졌죠. 사리 있나 보라고 그랬고, 하하. 그러니까 그렇게 그냥 턱 붙여 놓고 갔는데 그 달부터 애기가 있어서 생남을 했거든요. 그래 그 이듬해에 생일이 되니까 또 그 절에 와서 불공을 드리는데 그 스님이 나타난 겁니다, 그 객승이. 나타나 가지고 “허허! 입에다 밥을 한 뭉칠 넣어 줬더니 밥값을 했구먼.” 아, 이러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이게 우스운 게 아니라 그 속에는 참 무진 법문과 광대무변한 그런 법력이 있었다는 사실이죠.

그러니 모든 게 둘이 아닌 도리와 둘이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그 스님께서는 너무나 잘 알아서 일체 부처님이 한 찰나에 드시고 한 찰나에 나시는 도리를 다 알고 계신 거죠. 그러니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울 때 나 떠나서 부처님 법을 배우려고 하지 마시고 부처님 그 형상은 모두 내 형상이요, 부처님 마음은 내 마음이요, 부처님의 생명은 내 생명이니 둘로 보지 마시고 진실하게 일배를 올리더라도, 백팔배를 올리기 이전에 일배도 일배요 백팔배도 일배입니다. 아침에 마음먹었던 것과 저녁에 마음먹은 것이 어찌 시간과 공간이 비어 있겠습니까? 둘이 아닙니다. 그 도리는 무심 축지법을 안다면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도리를 알게 되고 나툼을 알게 되는 그 법입니다, 바로. 그러니 여러분이 그저 빚이라도 내다가 상을 잘 차려 놓아야만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고 가난하면 그냥 자기 먹는, 즉 말하자면 아주 급박하걸랑은 냉이죽을 끓여 놨더라도 그걸로라도 하시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삿된 마음이 죽 끓듯 하는데…

질문 스님, 저의 마음을 지켜보면 스님께 말씀드리기 죄송스러울 정도로 이런저런 삿된 마음이 한시도 쉬지 않고 죽 끓듯 올라옵니다. 그렇듯 마음이 죽 끓듯 올라오는데 어찌 제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요?

답변 그래서 그 한 방울 한 방울 나오는 게 전부 문수라고 그랬죠. 요놈! 이게 주자거든. 주걱이 아니라 주자거든요. 그건 비유해서 말한 겁니다. 액면 그대로 듣지 마세요. 주걱이 주자고 바로 이 방울방울 나오는 것이 요놈도 그놈이고 요놈도 그놈이고 요놈도 그놈 속에서 나오는 거고 전부 그놈이구나. 아니, 팥죽 속에서 다 나온 거지, 팥죽 방울이. 그러니까 내 살림살이가 팥죽 끓듯 하는 거거든요, 지금. 이 생명들이요, 아주 간략하게 쳐서 15억이라고 해도 되고 16억이라고 해도 돼요. 그런데 이건 숫자로 셀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식 하나가 수천도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 마음 하나가 우주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 거니까요. 내가 선생님이 된다면 되지 못할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이 하도 구름을 타고 연애를 걸러 다니거든요. 사형이 보니까 아, 요놈이 또 연애 걸러 가거든. 하하하…. 그런데 몸뚱인 놓고 진짜가 가는 거죠, 가짜가 가는 게 아니에요. 아, 구름을 타곤 그냥 연애 걸러 가니까, ‘요놈 또 봐라.’ 그러고선 구름을 타고 가는 거를 그냥 탁 막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인젠 안 그럴 테니 살려 달라고 그래서 놔 줬다는 얘기가 있듯이 말입니다.

아니, 지금 이게 말입니다, 이게 죽 솥에 죽 끓듯 하는 것입니다. 그 모두가 인과로 인해서 업이 생기고 그 업이 뭉쳤기 때문에 고덩어리니까요. 그러니 거기서 그 방울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그 방울마다 나오는 대로 속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 방울을 바로 그 마음으로 다스리고 나가야 할 텐데 그걸 다스리지 못하고는 말도 그냥 나오는 대로 해 버리고 “이 죽일 놈 살릴 놈, 급살을 맞아라.” 뭐 어쩌고…. 그리고 미우면 “어유, 그거 차에도 치여 죽지 않아?” 성가시게 하면 그런다고요. 아이, 사실이에요. 그런다고요. 그러나 그것이 외려 죄업이 벗어져서 잘되는 게 아니라, 고쳐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욕을 하니까 ‘이 둥우리는 냉랭한 둥우리구나. 추워서 못 들어가겠다.’ 이러고는 거리로 나돌다가 점점 더하는 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도둑질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나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공부를 안 한다 하더라도, 자고 들어왔다 하더라도 외박을 한다 하더라도 들어오면 “얘, 너 어디 가서 뭐 춥지나 않았니?” 또 더울 때는 “덥지나 않았니? 뭐나 좀 먹었니? 얘, 너에게 주기 위해서 냉장고에 이렇게 음식을 해 놓고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하고 부드럽게 해 주고, 여기다 맡기고 부드럽게 해 주고, 또 자기가 나갈 때는 종이에다가 뽀뽀 한번 해 놓고 “당신을 사랑해!” 또 “너를 사랑해!” 요렇게 해 놓고 나가면, 그거 조금만 노력하고 조금만 이해력을 가지고 넓게 쓴다면 그 보금자리는 너무나 따뜻하기에 화목해지고 딴 데로 이탈이 되질 않아요.

맷돌에 심봉을 딱 끼고선 맷돌을 돌리고 거기다가 음식을 넣을 때, 물건을 넣을 때 잘 갈려 나오지만 심봉을 잘 꽂질 않고 하면 그냥 그게 맷돌이 이탈이 되죠. 그리고 그 물건도 갈리질 않아요. 인간도 그렇게 살면 이탈이 되고 잘 갈리지 않고, 그러니까 죽네 사네 하는 겁니다. 우리가 심봉만 딱 이탈되지 않게 꽂아 놓고 그대로 잘 돌린다면 뭐라도 넣어서 갈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갈아지는 게 어디 있습니까. 안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고 하는 게 그대로 법이요, 중용입니다. 인간이라면 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삶의 보람도 가져야만이 인간이 산다고 볼 수 있지, 만날…. 그래서 부처님께선 안에도 노예가 되지 말고 바깥에도 노예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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