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경북 중심사찰서 사라진 불교회화들

지금은 도난돼 사찰을 떠난 김룡사의 성보들. 사진 왼쪽부터 김룡사 아미타회상도(1803년 作), 김룡사 독성도(1888년 作), 김룡사 신중도(1803년 作).

현재 경상북도에 위치한 조계종 교구본사는 김천 직지사(8교구), 대구 동화사(9교구), 영천 은해사(10교구). 경주 불국사(11교구), 의성 고운사(16교구)이다. 그러나 근대 31교구 본사 체제에서는 김천 직지사를 대신하여 문경 김룡사, 불국사를 대신하여 경주 기림사가 교구 본사였다. 특히, 문경 김룡사는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경북 문경, 예천, 상주, 영천 등에 위치한 많은 말사를 거느릴 정도로 사세가 컸다.

김룡사는 문경시 산북면 김룡리 운달산(雲達山)에 위치한 사찰로, 조계종 제8교구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김룡사는 588년에 운달 조사가 창건하여 운봉사(雲峰寺)라 하였는데, 운봉사의 위치는 운달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었던 금선대(金仙臺)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鮮末~근대기 경북 본사 역할
임란 이후 중건 불사 이어져
1990년대 들어 불화 도난돼
종단 신고돼 대중 관심 요망

그러나 통일신라부터 조선 전기까지 사찰과 관련된 연혁을 밝힐 수 있는 있는 문헌이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임진왜란 중에 폐허가 된 김룡사는 1624년에 혜총과 그의 제자인 광제·묘순·수헌 등이 법당, 선당, 승당, 범종루, 정문, 동서 회랑과 향로전 등을 중창하였다.

1643년에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1649년에 의윤·무진·태휴 등이 중건하였다. 1690년에 연하당과 1695년에 만월당을 건립하고, 1703년에 괘불을 조성하였다.

그 후 1706년 수월료(水月寮)를, 1708년에 응진전과 1709년에 극락전, 원통전, 한산전(寒山殿)을 건립하고, 설잠이 상실(上室)과 중실(中室) 및 향적전을 세웠다. 1714년에 담유와 탁밀이 명부전과 동전(東殿)을 건립하고, 성천이 범종루를 중건하였다.

1726년에 자관이 영산전과 명부전을 중건하고, 1727년에 지원과 성정이 회전문과 홍하문을 건립하였으며, 1734년에 극윤이 산영루(山影樓)와 1740년에 수연이 청하전(靑霞殿)을 세웠다. 이후 1781년에 명부전을 중수하고, 1791년에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김룡사는 19세기에도 많은 전각의 중수와 불화의 조성이 이루어졌다. 1803년에 대웅전 영산회상도와 신중도, 응진전 후불도와 현왕도, 신중도 등을 조성하고, 1846년에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며, 1858년에 지장도 조성과 1867년에 침계가 응향각 중수가 이루어졌다. 또한 1880년에 사천왕도와 독성도, 금선암 후불도와 신중도, 양진암 후불도 등을, 1888년에 칠성도와 독성도를, 1894년에 산신도와 양진암 후불도를 조성하였다.

김룡사는 1911년에 31본산의 하나로 경북 북부 일대에서 40여 개의 말사를 거느렸으나, 조계종이 설립된 후 제8교구본사 직지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현존하는 전각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전, 응진전, 금륜전, 명부전, 상원전, 영산전, 원통전, 첨성각, 범종각, 수월당, 만월당, 연하당, 일주문, 천왕문, 요사 등이 있고, 부속 암자는 대성암, 화장암, 양진암, 금선대 등이다.

양진암은 1658년에 설잠 스님이 창건하였지만 1664년에 불탄 뒤 1749년에 환월 스님이 중건하였다. 그 뒤 1769년에 무영 스님이, 1825년에 해운 스님과 경봉 스님이, 1840년에 정봉 스님이, 1929년에 인택 스님이 각각 중수하였다. 대성암은 1800년에 영월 스님이 청하당을 옮겨 창건하고, 1886년에 혼성 스님이 중수하였다.

20세기 전반에 김룡사에 소장된 불교문화재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조선총독부 관보본에 자세히 적혀 있다. 20세기 전반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 의하면 김룡사 전각과 암자에 봉안된 성보 문화재가 220건 538점으로, 이 중에 불상 64점, 불화 118점(미타탱 등 44점, 고승진영 74점)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1932년 12월 10일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관보 1778호에는 불상 69점, 불화 83점(진영은 개제되지 않음)으로 적혀 있다.

이 가운데 김룡사에서 문화재청과 조계종 총무원에 도난 신고된 문화재는 아미타회상도(1803년 제작, 1994년 4월 3일 도난), 독성도(1888년 제작, 1994년 4월 3일 도난), 사천왕도(4점, 1880년 제작, 1994년 8월 15일 도난), 신중도(2점, 1803년과 1880년 제작, 1994년 8월 15일 도난), 불망비 귀부(2008년 10월 5일 도난)이다.(<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 2016년 간행).

1803년에 조성된 아미타회상도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재산대장 두 곳에서 소장하고 있었음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아미타후불도 화면 구성을 살펴보면 중앙에 아미타불이 보상화문과 여의두문으로 구성된 붉은색의 대의를 걸치고 정면을 향해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한쪽 발을 내보이며 앉아 있다. 수인은 오른손에 백련 한 송이를 들고 있다.

서방정토의 교주라고도 알려져 있는 아미타불은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미타유스, 극락정토를 주재하기에 무량광, 무량수불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토삼부경(<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의 옆에는 8대보살이 함께 등장하는데 화면에서도 중앙에 위치한 아미타불을 에워싸듯이 배치되어 있다. 화불이 표현된 보관을 쓰고 있는 관음보살을 비롯해서 대세지, 지장, 미륵, 보현, 문수, 금강수, 제장애보살이다.

보살 바로 옆, 화면의 좌우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외호하듯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존자까지 그려 넣어서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설채법은 적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부분적으로 금니와 호분을 사용했다.

독성도는 1888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조선 전기에는 독성도, 산신도, 칠성도가 함께 삼성각에 봉안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나반존자를 독립적으로 조성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화면의 아래쪽에 명문곽을 구획하고 묵서된 화기가 있어 조성시기와 발원자 등을 알 수 있다. 소나무 아래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있는 노인의 얼굴을 한 나반존자 옆으로 폭포수가 흐르고, 바로 옆에 동자가 존자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려는 표정으로 나반존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나반존자의 얼굴에 표현된 눈썹은 희기도 하지만 너무나 길어서 어깨 아래까지 내려와 있다. 수행으로 해탈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의습과 자세에서 부드러운 필선으로 자유스럽게 묘사했다.

신중도 2점 가운데 1803년 작으로 알려진 불화는 채운(彩雲)으로 크게 화면을 상·하단으로 구분한 뒤, 상단에 두광과 신광을 두른 대자재천과 범천, 제석천을 상반신만 보이게 그리고 일월천자, 보살 등 천부중을 배치하였다. 하단에는 깃털이 달린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위태천을 중앙에 세운 구도로 좌우에는 호법신 천룡팔부 등을 그리고 상단 아래 신중들 사이에 성군(星君)을 표현한 형식이다. 호법신장들이 지니고 있는 무기를 금니로 칠하여 강조한 듯 보인다.

근대 김룡사에 소장된 신중도는 조선총독부 관보본에 5점이 확인되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서 7점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수량에서 2점이나 차이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재산대장이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재산대장을 통해서도 소장유물의 변동 상황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들이다.

다행히도 1994년 4월과 8월에 도난당한 김룡사의 성보들은 문화재청과 종단에 신고가 되어 있어서 관심을 기울이고 눈여겨 살펴본다면 도난 성보의 행방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보를 찾고자 하는 지속적인 활동과 더불어 관련 연구자들이 학술적으로 조명해보는 작업도 필요하다. 종단과 사찰 관계자뿐만 아니라 김룡사 신도와 일반 재가불자들도 함께 도난성보가 제자리에 다시 봉안될 수 있도록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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