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차 우수성, 詩로 절창하다

금령 박영호가 지은 〈남다병서〉. 경화사족들의 차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초의가 이룩한 선차의 복원이 당시 선비들에게 어떻게 평가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초의의 명성이 경향에 알려진 것은 1830년경이다. 이 무렵 스승 완호의 탑명(塔銘)을 받기 위해 상경했던 초의는 추사 댁에 머물며 상경했던 계획을 추진하려 했다. 하지만 추사 댁에 변고가 생긴 것. 바로 추사의 부친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유배되는 어려운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추사 댁에 머물지는 못했지만 세상사 새옹지마라.

금령 박영보 지은 〈남다병서〉
차에 대한 경화사족 이해 담아
초의 이룩한 선차 복원 평가도
스승 신위도 화답하는 시 지어

師弟가 차 감상 후 茶詩 작성
한·중·일 차문화사서 드문 사례

홍현주(洪賢周, 1793~1865)의 별서 청량산방에 머문 초의는 이듬해(1831) 홍현주가 주최한 청량산방 시회에서 시재(詩才)와 초의차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참으로 사람에겐 때를 얻는 것이 이처럼 중요하다. 1830년 금령 박영보(朴永輔, 1808~1872)가 지은 〈남다병서(南茶幷序)〉는 경화사족들의 차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초의가 이룩한 선차의 복원이 당시 선비들에게 어떻게 평가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셈이다. 이 자료는 〈남다병서〉 이외에도 ‘몽하편(夢霞篇)’ 등, 몇 편의 시를 시첩(詩帖)으로 묶은 것인데, 크기는 16.8×23.5cm로 청대에 유행했던 화지를 썼으며, 박영보가 초의에게 증교(證交)를 위해 지은 것이다.

박영보의 약력을 살펴보면 금령은 그의 호이다. 암행어사로 이름이 높았던 박문수(朴文秀, 1691~1756)의 후손이며, 시서화 삼절로 칭송된 신위(申緯, 1769~1845)의 제자로, 시문에 밝았다. 1862년 동지사(冬至使)로 연경을 방문하여 청의 선진화된 문물을 경험했고 공조판서를 거쳐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파행적인 세도정국과 근대화 과정의 격랑 속에서 국가의 안위를 고민했던 문인이었고, 평소 차를 즐겼던 인물이다. 이산중이 초의차를 얻은 그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차를 스승 신위와 함께 즐긴 후 〈남다병서〉를 짓는다. 신위도 이 시에 화답하여 〈남다시병서(南茶詩幷序)〉를 지었다. 스승과 제자가 초의차를 감상한 후 서로 화운하여 다시(茶詩)를 지은 사례는 한·중·일 차문화사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이다.
 
〈남다병서〉의 판본은 필자의 소장본과 반남 박씨 문중에서 보관된 금령의 친필본 문집 속에 수록된 〈남다병서〉가 있다. 두 본의 〈남다병서〉에는 글자의 출입이 있다. 그러므로 필자의 소장본 〈남다병서〉의 소장본을 저본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남쪽에 나는 차는 영남과 호남 사이서 난다. 초의가 그곳에 사니 정약용 승지와 김정희 교각이 모두 문자로써 교유하였다. 경인(1830)년 겨울 한양에 예방하실 때 예물로 가져온 손수 만든 차 한 포를 이산중이 얻었다는데, 그 차가 여기저기를 거쳐 나에게까지 오게 되었다. 차가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마치 금루옥대처럼 귀하게 여긴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자리를 깨끗이 하고 앉아 차를 마시며 장시 20운을 지어 선사에게 보내니 혜안으로 정정하시고 아울러 화운을 보내 주소서.

옛적에 차를 마시면 신선이 되었고
질이 낮은 사람도 청현한 사람됨을 잃지 않았네.
쌍정과 일주 차, 세상에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고
우전과 홍곡이란 (명차의)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네.
아름다운 다기(茶器)에 명차를 감상하여
중국 차의 진미는 이미 경험했네.
우리나라에서 나는 차, 더욱 더 좋아
처음 돋은 차 싹, 여리고 향기롭다고 하네.
이르기는 서주시대요, 늦게는 지금이라
중외가 비록 다르지만 너무 서로 통한다네.
모든 꽃과 풀들은 각기 족보가 있으니
사람 중에 누가 먼저 차를 알았던 것일까.
신라의 상인이 당에 들어간 날,
만 리 길, 푸른 물결을 건너 배를 타고 (차 씨) 왔다네.
(강진 해남 땅, 호주나 건주지방 같다. 남쪽 바다와 산 사이에 흔히 있는데 강진과 해남이 최고이다.)
한번 파종하여 버려두곤
꽃 피고 잎 지는 세월 부질없이 지났더니
공연히 천 년 동안 靑山에서 보냈네.
기이한 향기 오래도록 막혔다가 드러나니
봄에 딴 찻잎, 대 광주리에 가득하네.
하늘에 뜬 달처럼 둥근 작은 용봉단차는
법제한 모양이 비록 거칠어도 차 맛은 좋다네.
초의노사는 옛날부터 염불에 힘써서
농차(濃茶)로 응체를 씻고 진선을 참구하네.
여가에 글 쓰는 일로 깊은 시름을 밝혀
당시의 명사들이 존경하며 따른다네.
눈보라 치는 천 리 길을 건너온 초의
두강(차 이름) 같은 둥근 차 가지고 왔네.
오랜 친구, 나에게 절반의 단차를 보내니
그냥 둬도 선명한 광채, 자리에 찬란하다.
나에게 수액인 차 마시는 버릇이 생겼으니
나이 들어 맑은 몸이 견고해졌네.
열에 셋은 밥을 먹고 일곱은 차를 마시니
집에서 담근 강초처럼 비쩍 말라 가련하구나.
이제껏 석 달이나 빈 잔을 잡고 있으니
물 끓는 소리만 들어도 군침이 도네.
오늘 아침, 차 한 잔에 마음과 몸을 씻어내니
방 안 가득 차 향기 자욱하게 피어나네.
도화동 신선에게 오래살기 비는 건 번거로우나
차가 없어 백낙천과 함께 시 짓지 못함이 부끄럽네.
1830년 11월  15일  금령 박영보 관수화남

南茶湖嶺間産也 草衣禪師雲遊其地 茶山承旨及秋史閣學 皆得以文字交焉 庚寅(1830)冬來訪于京師 以手製茶一包爲贄 李山中得之 轉遺及我 茶之閱人 如金縷玉帶 亦已多矣 淸座一作長句二十韻 以寄禪師 慧眼正之 兼求和
古有飮茶而登仙 下者不失爲淸賢
雙井日注世已遠 雨前紅穀名今傳
花瓷綠浪珍賞 眞味中華已經煎
東國産茶茶更好 名如芽出初芳姸
早或西周晩今代 中外雖別太相懸
凡花庸草各有譜 土人誰識茶之先
鷄林商客入唐日 携渡滄波萬里船
康南之地卽湖建 一去投種遂如捐
(南方海山間多有之康津海南其最也)
春花秋葉等閒度 空閱靑山一千年
奇香鬱沈久而顯 採春筐來緣
天上月小龍鳳 法樣雖味則然
草衣老師古淨業 濃茗洗積參眞禪
餘事翰墨倒寥辨 一時名士瓣香處
雪飄袈裟度千里 頭綱美製玉團
故人贈我伴瓊玖 撒手的光走筵
我生茶癖卽水厄 年深浹骨冷淸堅
三分飡食七分飮 沈家薑椒瘦可憐
伊來三月抱空椀 臥聽松雨出涎
今朝一灌洗腸胃 滿室綠霧烟
只煩桃花乞長老 愧無菊酬樂天
庚寅 十一月 望日 錦 朴永輔 水和南

〈남다병서〉의 체재는 서문과 장시로 구성되었다. 서문은 이 시를 짓게 된 동기나 초의가 어떤 사람인지를 간략하게 피력하였다.
그렇다면 ‘남다(南茶)’란 무엇인가. 바로 남쪽에서 나는 차로 초의가 만든 차를 지칭한 것이라 하겠다.
무엇보다 그는 차를 애호한 사람으로, “오늘 아침, 차 한 잔에 마음과 몸을 씻어내니/방 안 가득 차 향기 자욱하게 피어나네”라고 했다. 초의가 만든 차는 그에게는 군침이 돌게 하는 차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의노사는 옛날부터 염불에 힘써서/농차(濃茶)로 응체를 씻고 진선을 참구하”는 선승이라는 것이다.
“눈보라 치는 천 리 길을 건너온 초의/두강(차 이름) 같은 둥근 차 가지고 왔”던 초의가 속진을 씻어 주는 차를 이들에게 공여했던 사실은 이 시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결국 차란 사람에게 언제나 유익한 정신 음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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