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대둔산 태고사(太古寺)서 100일 동안 체중이 15kg이나 빠지면서 하루 3천배씩 30만 배를 시작으로 100만 배 감사회향(感謝回向)을 한 뜻깊은 날이다.

멸아만시하심즉성불(滅我慢是下心卽成佛)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가 최고다 하는 아만심서 벗어나 머리가 땅에 닿게 낮추어 하심(下心)이 되어야 부처를 이룬다. 즉 아무리 도(道)에 이르렀다 해도 조금이라도 아만병(我慢病)에 걸려 있다면 그것은 성불(成佛)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중생이 아만서 벗어나는 길은 그 원인이 되는 사번뇌(四煩惱)인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를 다스려서 거짓 나(我)이자 제 7 말라식인 자아(自我)를 죽이고 본래 청정한 참나(眞我)가 되는 것이다. 그 자아는 대상(對象)과 연(緣)이 합(合)이 됐을 때 생기는 것이고, 그 반대이면 무아(無我)인 것이다. 또한 무명으로 참나를 모르고, 자아(自我)의 상(相)놀음에 머무르며 탐욕과 어리석음을 근본으로 삼아 항상 거짓 자기에 집착한다.

뱁새는 깊은 숲속에 앉아 있어도 일지(一枝), 한 개의 나무 가지면 족하고, 고래가 대해(大海)의 물속에 산다 해도 그 배만 채우면 그만인 것이다. 무엇이든 자기의 그릇을 모르고 비우려 하지 않고 더 채우려 하는 데서 화(禍)가 따르는 법이다.

중생은 불성의 평등함을 망각하고 타인에게 교만하고 경시하며 스스로 지고하다는 마음을 일으켜 자기 잘난 맛에 도취된, 즉 목에 기브스하고 사는 사람들이며, 자기만의 독특한 사량(思量) 분별심(分別心)의 안경을 끼고 시기와 질투로 온갖 시시비비를 만들어 낸다. 또한 너무 많은 것을 지녔음에도 더욱 더 채우려는 욕심이 강해 언제나 더 채우려는 욕망만큼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이다.

무명(無明)인 내 한 생각이 자신의 습관을 익혀놓고 그것에 중독돼 업(業)이 되면 그것이 육도 세계로 나를 끌고 다닌다. 즉 자기가 생각의 덫을 놓고 그 속에 갇혀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 중생 허물이며 기약 없는 윤회이다. 그래서 연기의 씨앗인 그 한 생각을 지우면 그 자리가 바로 그렇게 그리던 생사 없는 내 고향(故鄕)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장 난 생각들을 치유하려면 그 생각이 나온 그 근본 자리에서 ‘이 뭣고’로 바로 고쳐 돌려놓아야지, 그 생각을 고치려면 뜬구름 잡는 것과 같아 생각의 업(業)만 더욱 더 쌓여진다.

그래서 나의 육근으로 인(因)하여 다겁생래로 익혀진 습(習)의 집에서 나오는 것이 진정한 출가이며 깨달음인 것이다.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 번뇌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수행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고, 하기 싫어도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잠깐 머물다 가는 이 욕계에 태어난 이상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비우고 또 비워서 생사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수행법은 오직 ‘이 뭣고?’ 뿐이다.

<원각경>에 이환즉각(離幻卽覺)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환영(幻影)을 여의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또한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 했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진리를 의심 없이 믿고 신심이 바탕 되어 탐욕이 일어날 때 그 대상이나 마음의 욕망에 빠지지 말고, 탐욕의 근원을 ‘이 뭣고’로 녹이며, 괴로움 즐거움 슬픔 기쁨 등의 경계에 직면할 때 염기즉각(念起卽覺), 각지즉무(覺知卽無)라는 말처럼 그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리고 ‘이 뭣고’ 하면 바로 지워 지면서 그 주체인 참나와 하나가 된다. 그것이 바로 참된 반야바라밀의 행(行)이 되는 것이며, 지혜광명을 생활 속에서 쓰게 되는 것이니 무엇을 밖에서 구할 것이 있겠는가?

모든 근심은 애욕서, 재앙은 물욕서, 허물은 경망에서, 죄(罪)는 참지 못해서 생긴다. 오늘 하루도 생활속에서 인욕의 산을 넘어 해탈의 길로 가는 ‘이 뭣고’의 지혜를 청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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