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광풍에 사라진 도량, 信心으로 재건

불탑사 대웅전 전경. 제주 4·3사건 당시 소개령으로 전소됐다가 지역 주민들의 꾸준한 불사로 인해 현재 모습을 찾았다.

제주올레 제18코스를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도심 속 힐링 쉼터 원당봉. 그 안에는 고려시대 3대 비보사찰 가운데 하나였던 원당사지가 천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원당사지 터는 1914년 제주불교 중흥조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원당사지’가 ‘불탑사’로 개칭하면서 이 지역 불법의 뿌리를 내리게 된다.

특히 제주 지역 불교 유물로 유일하게 지정된 ‘불탑사 5층 석탑(보물 제1187호)’에는 고려 기황후의 설화가 담겨있다. 원나라 황제 순제는 후손이 없어 고민하던 중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친 삼첩칠봉의 터에 절과 탑을 세우고 기도하면 태자를 얻을 것이라는 현몽을 꾸고, 탑을 세워 태자를 얻어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는 이야기다.

토벌대 의해 대웅전 피해… 삼양동 민가서 불보살 모셔
한국전쟁 이후 못 하나까지 재사용하며 법당 다시 세워
사라호 태풍에 피해입지만 꾸준히 불사해 2015년 회향


천년의 설화를 배경으로 다시 중창됐지만 1948년 제주 4·3사건을 비켜갈 순 없었다. 소개령이 내려지자 신도들은 당시 법당에 모셔진 주불의 석가모니불과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탱화(독성·지장·산신) 등을 제주시 삼양동의 ‘엉덕앙물’ 용천수가 솟아나는 인근 민가로 이운해 임시 법당을 마련한다.   1938년생인 불탑사 회주 일현 스님은 15살 무렵인 1951년 음력 4월 불탑사에서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 당시만 해도 마을에 성담을 쌓아 낮에는 밭에 가서 불탑사 주변 농지에 콩, 보리 등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토벌대들이 죽창으로 얼마나 천정과 벽 등을 쑤셔놓았는지, 옛 법당은 형색을 갖췄다고 할 수 없었지요. 밤에는 다시 성안의 임시 법당에서 기도를 하면서 지내고 그랬어요.”

그리고 스님은 1951년 음력 7월 한국전쟁을 피해 제주도에 피신 왔던 경호 스님을 은사로 모시게 된다. 제주 4·3사건이 어느 정도 평정될 무렵인 1953년 불탑사는 대웅전 중창불사 계획을 세운다. 제주 4·3사건으로 너덜너덜해진 법당의 목재와 기와 그리고 못 하나까지 재사용했다. “법당을 해체하면서 구부러진 못 하나하나도 일일이 펴서 다시 사용했어요. 그리고 신도님들의 신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화북 별도천의 모래를 등에 짊어지고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 당시는 끼니를 굶지 않는 게 다행일 무렵입니다. 그렇게 일을 하고도 먹을 게 변변치 않으니 직접 신도들이 도시락을 싸서 다니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불탑사로 향하는 오르막은 당시 좁은 오솔길이었다. 불보살을 등에 지고 이운이 잦다보니 금관과 손가락 등이 부러지는 등 훼손이 되어 땅에 묻어 드렸지만 탱화 등은 지금도 불탑사 법당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해 내고 있다.

불탑사 회주 일현 스님.

“불보살이 훼손되면서 다시 부처님을 모셔야겠다는 신도들의 일념이 대단했지요. 그래서 은사 스님과 실상화 보살이 1957년 인연이 있던 부산으로 가서 시장을 돌며, 시주를 받았습니다. 지금의 대웅전에 봉안된 아미타부처님입니다.”

그러나 신도들의 혼과 땀이 서린 법당이 완공되는 기쁨도 잠시 1959년 9월 한국을 강타한 사라호 태풍에 의해 신도들의 꿈도 산산조각난다. 그 후 불탑사는 오뚝이처럼 1964년 대웅전을 다시 중건하고, 2011년 6월에 이르러 전통사찰의 면모를 쇄신하고자 대웅전 중창불사의 원력을 세운다. 불탑사는 5년 동안의 중창불사를 통해 지난 2015년 10월 대웅전 낙성법회를 봉행하고, 오랜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지닌 전통사찰의 위상을 높이고 정법가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 4·3- 불탑사

삼양리 소개 당시 함께 피해

불보살상 옮기다 파손되기도
 

보물 제1187호 불탑사 5층석탑. 제주의 주요한 성보 문화재다.

 

제주시 삼양 1동 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 말사로 원당봉 위에 자리하고 있다. 불탑사는 1923년 안봉려관 스님과 안도월 스님이 3간 규모의 초가 법당 1동을 건축하여 창건하였다. 1930년 3월 25일 대흥사 제주포교소 불탑출장소로 조선총독부에 신고하였다. 경내에 제주 현무암으로 만든 제주불탑사5층석탑(보물 제1187호)이 있다.

1948년 11월 원당봉 위의 불탑사는 삼양리 마을로 소개당했다. 토벌대는 사람이 사용할 수 없도록 기와 대웅전과 요사채를 모두 훼손하였다. 대웅전은 천정을 모두 쑤셔버려 돌집 모양만 남아있을 정도로 훼손되었고 요사채는 아예 훼손되었다. 1934년 와가(瓦家, 제주도의 토속적인 기와집) 4간의 법당으로 증설해놓았던 그 법당이다.

소개되면서 불상과 탱화를 삼양동 남의 집 방 한 칸을 빌려 모셨다. 불상은 목조 높이 1척 5촌의 석가여래좌상과 관세음보살상, 대세지보살상 삼존불을 모시고 있었다. 후불탱화와 신중, 칠성, 지장, 현왕, 독성, 산신, 감로탱화도 함께 소개되었다.

1955년 경호 스님과 일현 스님이 불탑사를 재건하기 시작하였다. 훼손되었던 법당 자재로부터 못을 빼내어 신도들이 못을 두드려 펴서 사용하였고 화북 원명사 옆 하천의 모래와 삼양 검은 모래를 지어 날랐다. 신도들이 도시락을 싸와서 먹으면서 일하였다. 제주 4·3사건 당시의 불탑사는 오층석탑 북쪽에 나란히 위치해 남쪽을 향하고 있었으나 위치를 서쪽으로 이동하여 20평정도의 법당과 요사채를 재건하였다. 불상은 소개되어 옮겨 다니며 손과 보관 등이 훼손되었으나, 어려운 시절이라 다시 봉안하지 못하고 한동안 사용하다 매불하였다. 탱화도 훼손되어 현재 산신, 지장, 독성탱화 3점만이 남아있다.

삼양리는 제주4.3사건 내내 많은 희생이 이어진 마을이다. 무장대와 토벌대가 서로에 대한 보복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일이 연속되었다. 무장대가 삼양지서를 습격하면 경찰은 동네 청년과 주민들을 연행 구타하고 감금하며 학살하는 일이 계속 되풀이돼 이어졌다. 4·3성이 구축되어 마을 사람들이 보초를 서야 했던 마을이다.
한금순(제주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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