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깨달은 곳, 직산인가 화성인가

원효 스님이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는 장면을 묘사한 사찰 벽화. 최근 원효 오도처를 놓고 학자들의 주장이 분분하다.

원효 스님은 2번에 걸쳐 구법을 시도한다. 육로를 선택했던 첫 번째는 실패했고, 두 번째에서는 해골물을 마시고 크게 깨달아 당나라로의 구법을 그만두게 된다. 그 유명한 해골물을 마신 자리, 다시 말해 원효 스님의 오도처를 놓고 학계 주장이 분분하다.

포문은 김경집 진각대학 교수가 열었다. 김 교수는 9월 14일 (재)한마음선원 대행선연구원(원장 이평래)이 안양본원에서 개최한 제1회 계절발표회에서 원효의 구법행로와 오도처에 대해 분석했다.

김 교수는 2차 구법행로가 ‘경주-경산-합천-함양-장수-진안-완산주-논산-공주-직산’으로 이뤄졌음을 주장했으며, 비를 피하기 위해 여러 날을 오랜 무덤서 보냈고 노숙이 가능했던 시기였던 만큼 661년 6월 즈음을 구법 시도 일시로 봤다.

대행선연구원 계절 발표회서
김경집 교수 ‘천안 직산’ 주장
서영일 “직산 범위 달라” 반박
선행 연구에선 ‘화성’ 주장들도


오도처에 대해 김 교수는 원랑선사 비문에 나온 ‘직산(山)’을 주목했다. 비문에는 ‘원랑선사는 배우고자하는 마음을 조용히 간직하고 미묘한 이치를 공부하고자 직산에 우거했다. 이곳은 신승(神僧) 원효대사가 도를 깨친 곳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김 교수는 현재의 ‘천안 직산(稷山)’이 오도처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완산주에서 보덕화상에게 수학한 다음 배를 타기 위해 당항진으로 가려면 논산-공주-천안을 거쳐 직산을 지나야 한다”면서 “직산은 경기도에서 호서지방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 삼국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다”고 설명했다.

지명이 ‘말뚝 직()’에서 ‘기장 직(稷)’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당시 직산 지역의 특산물이 기장이었고, 이런 이유로 지명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됐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평택 수도사 주변 포승면 일대를 원효 스님의 오도처로 주장하고 있는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장은 ‘직산’의 행정범위를 달리 해석해 김 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 서 원장은 논평을 통해 “평택 수도사 주변 포승면 일대는 조선시대까지 직산의 월경지(越境地·지방 행정 단위의 소속 영역 중 다른 지방 행정 단위의 영역을 넘어 들어가 위치한 지역)였다”면서 “농사는 어렵지만 항구로서 입지는 좋아 신라 말 고려 초 직산의 지방세력이 항구를 운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직산을 수도사 부근으로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앞선 선행연구들도 비슷한 주장이 이뤄진다. 평택시의 요청으로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가 2005년 발굴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2006년 발간했다. 보고서에는 “충남 직산은 신라시대 사산현이었고 직산으로 고려 초에 변경돼 원랑선사 비문에는 사용될 수 없다”며 “원효의 오도성지는 당항성 외곽의 직산이며, 평택 수도암지가 오도처일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연구원으로 참여한 엄기표도 후속 연구를 통해 “비문의 직산은 산 이름이며, 원효 오도처는 당주(唐州) 경계에 있고 이를 감안할 때 평택 포승면 수도암지가 주목된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화성을 오도처로 보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4월 열린 화성불교문화유적 학술발표회에서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는 원효 스님의 구법행로를 주목하며 ‘화성 당항성’부근을 오도처로 지목했다.

당시 고 교수는 “당시 남양만 당항포의 관할지가 당성이었고, 당성이 현재 경기도 화성에 있으며, 중부횡단항로로 나아가는 출발지점이 남양만 당은포라는 점을 고려하면 원효의 오도처는 당항성 인근 어느 무덤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라며 “또한 원효의 오도처가 무덤이었다면 그곳이 현재의 사찰이기 어렵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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