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억근 (사)대한불교삼보회 이사장 가족

유억근 이사장은 1986년 소금회사인 ‘마하탑’을 설립하고 1987년 (사)한살림 생산자회원으로 가입해 사업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살림생산자연합회 부회장, 한살림연합회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사)신안군 관광협의회 이사를 맡고 있다. 1985년 현성 스님을 계사로 5계를 수지했으며, 1986년 포교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2013년에는 법사 품수를 받았다. 2014년에는 보살계를 수지했으며, 1985년부터 삼보회 회원으로 재가불교 운동에 진력했다. 삼보법회 총무부장, 총무이사 등을 역임하고 2017년 삼보회 제8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97년부터 수방사에서 민간성직자로 위촉되어 청와대 대통령경호처 삼청법당 법사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임자도 화엄경전래 유적비 건립 추진위원을 맡고 있다. 2004년 자랑스런 전남인상, 2018년 초록섬마하탑 모범납세자 표창(광주지장국세청장) 등을 수상했다. 사진은 삼보정사에서 부인 이정심 씨와 함께 합장인사 하는 유억근 이사장.

 

30년 신행·수행의 만다라
2017년 삼보회 8대 이사장 취임
7년 준비 행정고시 실패 후 좌절
마음 잡기 위해 부처님법 공부
부처님과 대화 힘든 시절 견뎌
삼보회 인연 맺고 포교사 취득
삼보회 이끌며 재가불교 전범

 

불가는 사부대중이 이룬다. 출가하여 부처님 가까이 가는 것도 귀한 불사이고, 속세의 시간을 살면서도 삼보를 마음에 담고 산다면 그 또한 귀한 불사다. 출가(出家)와 재가(在家), 모두 각자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시절을 거슬러 오르면 여러 이름들이 그 사실을 이야기해 준다. 대승경전 중에는 <유마경>이나 <승만경> 등 재가의 대중이 주인공인 경전이 있다. 이는 불교가 출가수행자만이 이룰 수 있는 공부가 아닌, 재가의 신행과 수행을 통해서도 성불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삭발염의는 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부처님법을 따르며 재가불자로서 성불의 길을 가는 이가 있다. 우리 재가불교의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사)대한불교삼보회(이하·삼보회) 8대 이사장 유억근 거사가 그이다.

33년 만다라의 시작, 삼보회

2017년 1월, 유억근 이사장은 삼보회 8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유 이사장이 삼보회와 인연을 맺은 지 33년 만이었다. 유 이사장은 평 회원에서 시작해 교화부장, 총무이사, 이사장 권한대행 등을 거치면서 마침내 이사장에 취임했다. 유 이사장의 33년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세월을 세는 숫자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유 이사장의 만다라이기 때문이다. 유 이사장의 33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 모두 한 권의 경전을 쓰고 있는 것이고, 한 점의 만다라를 그리고 있다는 생각에 가 닿는다.

유 이사장은 1985년 삼보정사 법당에 첫 발을 디딘다. 그리고 삼보회 회원으로 가입한다. 유 이사장이 어려운 때였다. 가장으로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힘겨운 시절이었다. 유 이사장이 7년 동안 준비하고 시도했던 행정고시를 포기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유 이사장은 다른 길을 찾아 나섰지만 새로운 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미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유 이사장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모두 힘든 시기였다.

“마음이 힘든 시절이었죠. 그 때, 부처님이 생각났어요. 어려서부터 보았던 집안의 불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관세음보살’을 입에 달고 사셨던 할머니도 그렇고, 마음이 갈 곳을 잃다보니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을 찾아간 것 같아요.”

유 이사장은 어려서부터 집안 어른들의 불가적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불가의 인연 속에 있었다. 출가한 친구 덕분에 불가의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당연히 유 이사장의 마음 속을 들고 나는 것들엔 불가적 원소들이 많았다. 그런 유 이사장의 힘든 마음속에 찾아든 것 역시 그 원소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선을 담았던 종이에서 생선의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하고, 향을 담았던 종이에선 향 내음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유 이사장은 부처님법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었다. 그야말로 ‘발심’이었다. 비록 힘든 마음에서 비롯된 발심이었지만 그것은 진지하고 또 진지한 서원이었다. 초파일에 등 달러 가는 불교가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고 싶었다. 그 발심의 첫 인연이 다름 아닌 ‘삼보회’였다. 그리고 삼보회 회원이 된 유 이사장은 곧바로 전국불교포교사협회 부설 포교사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이듬해 공부를 무사히 마치고 포교사자격증을 취득한다.

출가(出家)와 재가(在家)

지성불교의 산실로 정법구현과 불교의 대중화를 선도해 온 삼보회는 1964년 4월 24일 덕산 이한상 거사(1917~1984)의 대한불교삼보장학회 설립으로 시작했다. 자비광명 불보, 무상진리 법보, 청정화합 승보인 삼보의 혜명을 받들어 1960년대 불교 부흥의 선각자였던 청담·성철 대종사를 비롯해 많은 대덕스님의 공덕과 백성욱·김동하·서돈각·홍정식·이종익 등 대석학들의 시대적 서원이 함께 했다. 이후 삼보학회, 삼보법회, (사)대한불교삼보회로 발전했으며, 현재는 법인 산하 8개 부속 기구를 두고 한국 재가불교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삼보회 산하의 8개 부속기구는 불교계 인재육성을 위한 삼보장학회, 부처님의 정법구현과 대중화를 위한 삼보법회, 어린이 불자 양성을 위한 연꽃어린이집, 불교 교리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삼보여름불교대학, 정보화 시대에 맞춘 삼보사이버불교대학, 선교쌍수를 위한 삼보선원, 불교의 전법과 홍포를 위한 삼보법사회, 수행정진 도량인 삼보정사를 두고 한국 재가불교 단체의 역할을 지속하기 위해 정진하고 있다.

“삼보회 회원이 되고 법회에 참석해 보니 이곳에선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큰스님들의 법문과 석학들의 강의가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유 이사장의 지난날을 보고 있자면 재가불교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결사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법을 구하고, 구한 법에 의지해 사는 것, 그리고 변함없이 오랜 세월을 사는 것, 그것이 불교이고 결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출가자가 출가자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재가자가 재가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한다면 오늘날의 갈등과 다툼은 없었을 것입니다. 원론적인 이야기로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것만한 답은 없다고 봅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출가자가 출가자로서 하지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재가자는 재가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여법하고 원만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결국 원론적인 그 실천 하나 하지 못할 때, 세상은 힘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 불교계의 현실에 대해 묻자 유 이사장은 위와 같이 답했다. 유 이사장이 삼보회 이사장이 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소리 없는 ‘재가불교운동’이었다.

임자도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고 있는 유억근 이사장.

 

소금, 삶의 소금이 되다

마음을 부처님으로 채우기 시작한 유 이사장은 이제 현실의 삶을 채워야 했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딸아이의 삶을 채워야 했다. 쉽지 않았다. 유 이사장이 부처님을 만난 처음 자리가 삼보회였다면, 유 이사장이 삶과 만난 처음 자리는 (사)한살림이었다.

(사)한살림은 사람과 자연, 도시와 농촌이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에서, 자연을 지키고 생명을 살리는 마음으로 농사짓고, 물품을 만드는 생산자들과 이들의 마음이 담긴 물품을 이해하고 믿으며, 이용하는 소비자들이 함께 결성한 생활협동조합이다. 기후변화와 자연재앙이 날로 심각해지고, 시장 개방이 확대되면서 우리 농업의 자급 기반이 더욱 위태로워지고 건강한 밥상을 차리는 일이 날로 힘겨워지고 있다. (사)한살림은 생명농업을 바탕으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직거래운동을 펼치며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노력, 절제된 소비, 자연과 조화를 이룬 생활문화를 통해 생명을 살리고 지구를 지키는 뜻깊은 생활 실천을 하고 있다.

유 이사장은 (사)한살림의 생산자회원으로 가입한다. 그리고 유 이사장의 생각은 고향에 가 닿는다. 바로 ‘소금’이었다. 유 이사장은 신안군 임자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염전을 보면서 자랐다. 그의 힘든 마음이 어릴 적 할머니의 ‘관세음보살’에 가 닿았듯, 그의 힘든 삶이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고향의 염전이었다.

그는 고향의 천일염을 받아다 간수를 제거하는 등 다시 유억근의 천일염으로 만들었다. 유 이사장은 (사)한살림의 생각에 공감했다. 당시는 천일염을 바로 가정의 식탁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유 이사장은 대량포장 밖에 없었던 당시의 유통구조와 천일염의 식자재로서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위생 등 당시 천일염의 성분을 개선하고 포장의 개념을 다시 생각했다. 유 이사장은 당시에는 없었던 좀 더 깨끗하고 작은 포장(3kg)의 천일염을 생각했다. 작은 매출에서 시작했지만 그의 생각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소금의 개념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소금은 삶의 소금이었다.

 

가족, 소중한 도반이 되다
힘겨운 시간 함께 한 아내
두 자녀 모두 불심 닮아
장녀, 불교미술·중관학 전공
2녀, 초5~고3 매주 법회 참석
피아노 연주로 음성공양

고향의 천일염으로 사업
소금 지고 계단서 “관세음보살”
볶은 소금 등 패러다임 바꿔
임자도에 화엄경전래비 추진

연꽃어린이학교 수련회 참가한 유지원, 유다원 씨의 어린시절.
2017년 삼보회 8대 이사장 취임식.

 

“부처님은 제 마음 아시죠?”

유 이사장은 삼보회 회원이 되고 난 후 지금까지 매주 법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 세월이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앞서 말했듯 그 세월은 거저 쌓인 것이 아니었다.
“부처님은 제 마음 아시죠?”
유 이사장은 힘들 때마다 부처님과 이야기했다. 유 이사장은 무엇보다 가족에게 미안했다. 특히 12년 교제 끝에 결혼한 아내에게 그랬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7년 동안에도 아내 이정심(61) 씨는 묵묵히 유 이사장의 곁에 있었고, 꿈을 포기한 한 남자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했다. 그런 아내와 천진하게 웃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면 너무나 작은 자신의 모습이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리고 주의의 시선 또한 유 이사장을 힘들게 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유 이사장의 사업은 신통치 않은 것이었다. 당시는 친환경이나 생명운동 같은 이슈에 가치를 두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농사에서 농약은 당연한 것이고, 공장 굴뚝의 연기 또한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유 이사장의 생각이 주변의 공감을 얻기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유 이사장의 생각엔 신념이 있었다. 그렇게 주변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고,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야 하는 가족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부처님을 찾았다.

유 이사장의 신심은 그렇게 자라고 또 자랐다. 소금 포대를 들고 승강기가 없는 건물을 오르내릴 때는 관세음보살을 찾으며 계단을 올랐다.

소중한 도반, 가족

“부처님, 아내와 딸을 지하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유 이사장이 힘겨운 시절을 딛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 공부의 공덕도 있었으나 그와 함께 가족의 힘도 컸다. 아내 이정심 씨와 딸 유지원(35), 유다원(34) 씨다. 유 이사장은 한 동안 지하 방에서 살았다. 그 시절 유 이사장의 바람은 가족을 지하 방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유 이사장의 사업도 부처님 공부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유 이사장과 그의 아내 이정심 씨는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낸 고향마을 이웃이었다. 유 이사장은 고등학생 때 이 씨의 중학교 진학 공부를 돕기도 했다. 유 이사장이 서울로 올라와서도 이 씨와의 인연이 이어졌고, 유 이사장이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이 씨는 유 이사장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유 이사장이 삼보회 회원이 되고난 후부터는 이 씨 역시 유 이사장과 함께 매주 삼보법회에 참석하며 불심을 키웠다. 유 이사장의 33년 만다라 속엔 이 씨의 33년도 함께 있음이다.

유 이사장의 큰 딸 유지원 씨는 유 이사장이 한참 힘겨웠던 시절에 이 세상에 왔다. 그런 지원 씨는 아버지의 불심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유 이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지원 씨 역시 향을 담았던 종이였다. 그는 동국대(경주) 불교회화과를 졸업했고, 동국대(서울) 일반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를 마치고, 동국대(경주) 일반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에 있다. 현재는 한국불교학회 편집 간사 소임을 보고 있다. 박사 과정 전공은 중관학이며, 연기와 공성의 논증 방법이 시대, 지역, 학파의 추이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미국 보스턴미술관 학예연구실에 근무하며 한국 불교미술 소장품 연구와 및 특별전시의 영문 보고서와 자료집 작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중관학 연구로 한국연구재단 2018년도 글로벌박사펠로우십에 선정되어 장학금을 받았다.

유지원 씨의 동생 다원 씨 역시 아버지의 신심을 닮았다. 다원 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법회에 참석해 피아노를 연주하며 음성공양의 공덕을 지었다. 공석이 되어버린 피아노 연주자를 대신했던 것이었는데, 그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삼보법회 피아노 연주를 맡았다. 여느 아이들 같았으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삼보법회는 매주 일요일에 열린다. 부모님을 따라 매주 절에 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며, 소임을 맡고 법회에 참여한다는 것 또한 쉽지 않았을 일이었을 것이다. 한창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시절의 휴일을 매주 법당에서 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 이사장이 삼보회의 이사장이 되기까지 30여 년의 세월 속 구석구석엔 가족이라는 도반의 향기가 있었다.

임자도 화엄경전래 유적비 추진

1986년 ‘마하탑’을 설립하고 사업을 시작한 유 이사장은 1995년부터 사업을 본격적으로 확장한다. 고향에서 받아오는 소금으로는 부족했다. 유 이사장은 고향 임자도로 내려간다. 그리고 자신의 염전을 일군다. 유 이사장의 마하탑 소금은 우리나라 소금의 역사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지금의 ‘볶은 소금’과 ‘구운 소금’ 등은 유 이사장의 마하탑에서 시작됐다.

“부처님 말씀 중에 마지막 말씀이 저를 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자등명법등명’, 부처님 전에 기도하고 부처님과 이야기하면서 힘든 시절을 지나왔습니다. 가피 많이 입었으니 제 삶도 이제 의미 있는 회향불사를 해야죠.”

유 이사장은 얼마 전부터 자신의 삶이 시작된 고향 임자도에서 자신의 삶을 회향하고픈 생각을 품었다. ‘임자도 화엄경전래 유적비 건립’이 그것이다. 임자도는 화엄경전래지로 전해온다. 조선 숙종 7년, 신안 앞바다 임자도에 난파선 한 척이 도착했다. 배 안 나무궤짝 안에는 불경이 가득했다. 그 중에는 중국의 화엄학자인 거사 섭기윤이 1625년 간행한 <화엄경소연의초>도 있었다. 임자도는 성지인 것이다.

하지만 임자도에 그런 흔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작은 법당 하나 없다. 유 이사장은 자신의 소금으로 재원을 만들고 뜻을 함께 하고픈 대중들과 함께 ‘임자도 〈화엄경〉 전래 유적비’를 건립하고 싶다고 했다. 또한 기회가 된다면 임자도에 작은 법당 하나도 세우고 싶다고 했다. 유 이사장이 원력을 세우고 기도를 올린 지도 벌써 10년 되었다고 했다. 유 이사장은 오늘도 임자도와 서울 삼보정사를 오가며 유억근의 만다라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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