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승 신겸 조성 추정 감로도 어디에

1984년 8월 21일에 도난된 안동 용담사 감로도(사진 왼쪽)와 용담사 신중도.(사진 오른쪽) 두 불화 모두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성보이지만 도난당했다. 현재는 조계종 문화부에만 신고가 돼 있는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경상북도는 민속학계에서 북부내륙권, 중서부권, 동부해안권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지역적인 근접성과 인간들의 활동 범위를 근거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권역의 구분은 조선후기 불교미술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이다.

이 가운데 북부내륙권의 중심지는 유교문화의 산실인 안동이다. 안동은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이지만 불교문화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특히 광흥사, 봉정사 등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많은 성보물이 남아있는 사찰이다.

이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면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사찰이 용담사(龍潭寺)이다. 이 용담사는 황학산과 금학산이 맞닿는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황학산, 화부산, 연점산, 금학산, 그리고 천지갑산(天地甲山)이 모여 있는 안동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골짜기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청정지역이다.

용담사, 안동 지역 중요 사찰
100년 전까지 191점 성보 존재
1984년 감로도·신중도 도난돼
산내 암자 조사 진영도 ‘묘연’
종단만 알려…문화재청 신고 안돼

사찰이 번창할 당시에는 많은 승려들이 수도를 하여 쌀 씻은 물이 멀리 7km 떨어진 묵계까지 이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용담사는 스님과 신자들이 많았고, 부속암자도 3개나 있었을 정도로 사찰 규모가 제법 컸던 것으로 보인다.

용담사는 1913년 2월 사찰령(寺刹令)에 의하여 고운사 본말사법(本末寺法)이 시행된 후, 현재 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의 말사이다.

용담사는 664년에 화엄(華嚴)이 창건하여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1574년에 혜증(惠證)이 중건하였다. 18세기 후반 이후에 편찬된 <신증안동부여지지(新證安東府輿地誌)> ‘불우(佛宇)’조에 용담사가 적혀 있고, 19세기 초에 위규(瑋珪)가 어려서 이 절로 출가하여 완첨(玩沾)의 법맥을 이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임란 이후에도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찰에 관련된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서 구체적인 불사 내용은 알 수 없다.

현재 사찰 내에 남아있는 성보문화재는 무량전(경북 문화재자료 40호), 금정암 화엄강당(경북 문화재자료 317호)이 시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무량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구조이고, 화엄강당은 앞면 8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왼쪽 2칸을 부엌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칸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으며 그 뒤에 법당과 온돌방, 창고를 배치하였다.

20세기 전반에 용담사에 소장되었던 성보문화재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조선총독부 관보본에 자세히 적혀 있다. 20세기 전반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 의하면 용담사와 암자에 봉안된 성보는 50건 191점으로, 이 중에 불상 4점, 불화 26점(아미타불탱 등 9점, 진영 10점)이 소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1932년 12월 24일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불상 4점, 불화 22점(아미타불탱 12점, 진영 10점)으로 4점이 줄어들었다.

20세기 전반 사찰에 봉안된 불화의 종류는 관세음보살도(1점), 아미타회상도(3점), 지장보살도(2점), 신장도(4점), 감로도(1점), 독성도(1점), 산신도(4점)과 금정암에 봉안되어 있던 진영인 청허선사(淸虛禪師)진영, 영허선사(映虛禪師)진영, 송계선사(松桂禪師)진영, 용파선사(龍波禪師)진영, 금파선사(錦波禪師)진영, 회성선사(晦惺禪師)진영, 웅파선사(雄坡禪師)진영, 풍암선사(豊岩禪師)진영, 남악선사(南岳禪師)진영, 반학선사(伴鶴禪師)진영이다.

그러나 용담사에서 도난당한 불화는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에 신고되지 않았고,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에 감로도(1984년 8월 21일 도난), 신중도(1738년 제작, 1984년 8월 21일 도난), 독성도(1984년 8월 21일 도난)만이 도난 신고되어 있다.(<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 2016년 간행)

1984년 8월 21일에 도난당한 감로도는 영혼을 천도하는 불교의식을 화면에 표현한 불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6세기 이후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는데 목련존자가 돌아가신 어머님을 위해 천도재를 지냈다는 <우란분경>의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즉, 지옥 아귀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또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고자 하는 천도의식의 불화로 이해할 수 있다. 용담사의 감로도 또한 1811년(가경 16년) 영가천도를 목적으로 그려졌다. 불화의 크기는 세로 257cm 가로 229cm이다. 또 붉은색 바탕 위에 먹색으로 화면 하단 좌우에 화기를 적어두었다.

일반적인 감로도의 구성은 화면 상단권역에는 극락의 일곱 여래가 지옥중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와 있는 장면을 그리고 제단을 차리고 천도의식을 봉행하는 장면을 화면 중단에 그리고 하단부에는 풍속화 같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의 육도세계를 묘사한다.

용담사 감로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존형식을 답습하지 않은 화면구도와 채색을 통한 대담한 표현력과 역동적인 필선에서 경상도 문경 대승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신겸 또는 그 계보에 속하는 불화승이 제작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화승 신겸은 괄허취여의 법맥을 잇고 있는데 1788년 상주 남장사 불사에 참여한 스님들을 적은 <불사성공록>에 대승양공으로 적혀 있어 문경 대승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불화승임을 알 수 있다. 또 스님은 1820년에 의성 고운사 백련암 산신도 화기에 조실(祖室)로 나와 있다. 그의 진영은 문경 대승사 대성암에 남아있다.

용담사 감로도 상단에는 일곱 여래(다보여래·보승여래·묘색신여래·광박신여래·이포외여래·감로왕여래·아미타여래)와 함께 제단이 차려져 있는데 사발 가득 밥을 담아 공양올린 모습은 시식의례를 현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또 바라를 들고 춤을 추고 있는 작법승과 고깔을 쓰고 승무를 추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여 의식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소나무를 삽도해서 녹색을 두드러지게 사용하였고 불을 내뿜는 모습은 붉은색으로 강조한 용담사 감로도의 화면구성은 아귀와 지옥, 재를 지내는 장면, 북과 피리가 등장하는 굿판에서 춤을 추는 무당 등 각 내용마다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군도형식은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져 내려가는데 다양한 인물 군상표현을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감로도를 통해서 당시 인간들의 생활상까지 엿볼 수 있다.

감로도와 같이 잃어버린 용담사 신중도는 기존 연구에 따르면 1739년(건륭 4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크기는 세로 120.5cm 가로 94.5cm이다. 화면 하단부에는 삼지창과 보검 등을 손에 쥐고 있는 8금강 가운데 4위를 그려 넣었는데 화면 중앙 두 금강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게 하여 대칭구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옆의 금강은 화면 정면을 향하게 하거나 화면향좌를 향해 시선을 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 상단 좌우로는 원권형의 두광과 함께 합장한 모습의 위태천과 제석천을 표현했다. 천동과 천녀가 그 곁에 시립해 있는 등 단순한 구획의 신중도 화면하단 중앙에는 화기를 적어두었다. 녹색과 적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백토와 금분을 부분적으로 사용하여 채색하였고 여백없이 채운으로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부처의 설법을 듣고 감화 받아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에서 유래한 안동 용담사의 신중도는 화기를 통해 제작연대와 봉안처 그리고 제작과 관련된 시주자와 증명, 화원, 화주비구와 수화승까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18세기 신중도의 흐름을 분석하는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도 충분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그럼에도 문화재청에 도난신고가 되어있지 않아서 보다 더 세심한 사찰의 관심과 성보보존관리방안정책이 아쉽다. 그럼에도 현재 여러 경로를 통해서 추적해 들어간다면 충분히 소명되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기해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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