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념인 한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리고
그생각이 제 8아뢰야식에 저장된 전생 업식을 재연
못하도록 그 한 생각의 뿌리를 ‘이뭣고’로 잘라내고
사(邪)가 아닌 반야지혜를 살려 쓰는 것이 참 수행"


참선(參禪)은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 그 한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 뭣고’로 돌아 오는 것이다. 육조 스님의 일행삼매에 “일상시(日常時)에 가거나 머물거나 않거나 언제 어디서나 항상 직심을 행해야 한다. 마음에 아첨하고 굽은 생각을 갖고 입으로만 법의 곧음을 말하지 말라, 오직 직심으로 행동해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한다”고 하였다.

직심은 순수한 마음이요, 분별을 떠난 마음이며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소리에 접하되 그 소리에 구속되지 않는 마음이며, 어떤 형상을 접하되 거기에 매달리지 않는 마음이다. 자신이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삼매를 실현하고 지혜를 발현하는 일, 공부, 운동 등 일체처 일체시에 어디에서도 ‘이 뭣고’로 걸림이 없고 분별, 집착을 끊으면 그것이 생활선의 실현이고 평상심의 시도인 것이다.

남악 회양선사께서 마조 스님이 항상 좌선만 고집하는 것을 고쳐주기 위해 하루는 좌선중인 마조 스님에게 물었다.

“수좌는 좌선만해서 무엇을 하려는고?”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회양 선사는 앞뜰서 벽돌을 하나 집어와 마조 스님 앞에 놓고 앉아 정진하기 시작했다.

한참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여쭈었다.

"스님, 벽돌을 갈아서 무엇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소를 수레에 매서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쳐야 옳을까 아니면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마조 스님이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는가?”하고 다시 물었다.

“앉아서 참선 하는 것을 배운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선을 잘못 아는 것이고, 앉은 부처를 배운다면 부처님은 어느 하나의 법이 아니니, 자네가 부처님을 잘못 알고 있음이네. 무주법(無住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림이 없어야 하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求)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고, 앉은 모습에 집착 한다면 선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조 스님은 여기서 크게 뉘우치고 좌선만을 고집한 생각을 버리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가운데서 일여(一如)하게 화두를 참구하여 순일(純一)을 이루어서 마침내 크게 깨쳤다.

우리가 생활속에서 망념(妄念)인 한 생각이 일어나면 즉시 알아차리고 그 생각이 제 8아뢰야식에 저장된 전생의 업식을 재연 못하도록 그 한 생각의 뿌리를 ‘이뭣고’로 잘라내고 동시에 사(邪)가 아닌 반야지혜를 살려 쓰는 것이 참 수행이 된다. 즉 번뇌가 사라진 청정한 본래의 자기로 회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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