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부처님이 설한 돈의 활용

 

우리 옛말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다. 귀한 자식은 매 한 대 더 때려서 가르치고 미운 자식은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다. 오늘날 누구나 ‘돈, 돈’하는 시장자본주의 세계에서 미운 자식에게 돈 더 주는 부모가 있을까?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출, 1순위
강요하는 자에게 ‘보시말라’ 설법
헌금 등 강제규정 없는 근본 돼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는 마음을 들여다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어떤 증거가 있어 사랑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떤 커플은 연애하면서 남자가 전화도 자주 안하고 문자도 자주 안 보내주니까 여자가 사랑이 식었다고 불평한다. 웃고 넘길지 모르지만 전화가 자주 오고 문자가 자주 오면 나를 그만큼 사랑하는구나라고 느낀다. 달리 확인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누구든지 전화가 뜸해지고 문자조차 적막하면 사랑이 식었나라고 의심한다. 사랑이 식었다고 연인이 불평할 때 남자가 명품 백이나 보석을 선물하면 의심이 풀린다. 어쩌면 전화나 문자보다도 돈, 재물, 물질이 더 중요한 징표다. 고맙다고 말하면 자주 하는 농담 중에 “말로만 고맙다고 하지 말고 물질로 표시해줘”라는 농담이 있다. 정말 고맙다면 큰 선물을 하고 싶을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부모가 재산이 많을수록 자식이 부모를 방문하는 횟수가 한국이 전 세계에서 최고라고 한다. 한국은 자식이 오직 부모 돈을 보고 효도하는 국가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도도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도 이제는 돈에 의해 좌우된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에 오가는 물질로 사랑을 측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어떤 자식에게는 재산을 많이 물려주면서 다른 자식에게는 조금만 준다면 준 재산만큼 사랑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부모가 큰 아들을 불러 놓고 “내가 너를 가장 사랑하는 것을 알지? 너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을 물질로 판단하지는 않겠지? 내가 너를 가장 사랑하지만 네 동생한테 전 재산을 물려줄테니 너는 내 사랑을 의심하면 안된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돈 사용 순서도 정해 놓은 부처님

우리가 자본주의를 살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여 지금까지 긴 세월동안 사랑의 가장 중요한 징표는 돈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돈이 있다면 누구에게 제일 먼저 사용하고 누구에게 제일 나중에 사용하는가를 보면 누구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혹시 부처님은 이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실까? 돈을 사용하는 순서까지 정해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뜻밖에도 부처님은 돈을 사용하는 순서까지 정해 놓으셨다.

불교 경전은 지출에 있어서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을 거론하고 있다. 첫째 부모, 둘째 처자, 친척, 권속, 종, 품꾼, 하인, 셋째 수행하는 사문과 바라문이다. 불교에서는 보시하고 재물을 사용하는 것을 부처님을 공경하고 예배하며 받들어 섬기는 것으로 본다. 부처님은 첫째 그룹인 부모를 근본불, 둘째 그룹인 처자, 친척, 권속, 종, 품꾼, 하인을 집불, 셋째 그룹인 수행자를 밭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스님에 대한 보시를 복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밭’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이 세 그룹보다 더 중요한 대상이 있을까?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한 지출 대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나에게 먼저 지출하고 그 다음에 부모, 처자, 친척 권속, 종의 순서로 지출해야 한다. 〈중아함경〉은 “능히 자기도 기르고 또 부모, 처자, 노비, 하인들도 안온하게 하며…”라고 설한다. 〈잡아함경〉은 “착한 남자는 많고 값진 재물을 얻으면 스스로 써서 즐겨하고, 부모를 공양하며, …”라고 설한다. 불교는 자리이타를 추구하기에 남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위해 돈을 제일 먼저 사용하고 그 다음에 부모, 처자의 순서로 돈을 쓰면 된다.

불교를 보는 세상의 눈은 상식적이고 피상적인 견해에 갇혀 있다. 불교는 수동적, 소극적, 허무주의적 종교이며 무엇이든 양보하고 체념하고 포기하는 사람의 종교라는 고정관념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다. 불교가 자비의 종교이고 중생구제를 위한 종교지만 자기희생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다. 자리이타는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데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상이다. 자신을 위해 돈을 제일 먼저 사용하고 나머지는 타인을 위해 사용하는 순서는 바로 자리이타의 사상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게다가 불교의 논리적 합리적 성격은 누구에게 재물을 써야 하는가에서도 나타난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기부하고 자선하는 무조건적인 보시는 불교적인 것이 아니다. 〈장아함경〉은 “재물 쓰되 사치까지 이르지 말고, 마땅히 줄 사람 가리어주라, 남을 속이고 함부로 내 닫거든, 아무리 빌어도 주지 말아라.”고 설한다. 즉 나쁜 사람에게는 절대 보시하지 말라는 의미이니 돈이 넘쳐난다고 해도 줄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 나쁜 행위를 하지 않았어도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은 보시를 받을 수 없다. 〈장아함경〉은 “보시라고 해도 사견(邪見)을 가진 대중에게 보시하면 그것은 깨끗한 복이 아니다.”고 설한다. 어떤 보시든지 좋은 것은 아니다. 나쁜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 나쁜 견해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 보시해야 깨끗한 복을 얻는다. 일단 그런 사람에게 보시를 하고 깨끗하지 않은 복이라도 얻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잘못이다. 부처님은 아예 그런 사람에게 보시를 하지 말라고 금지하셨기 때문이다.

아무리 못된 인간이지만 불쌍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할까? 경전은 도움을 받지 못하면 걸식할 정도로 가난한 자라고 하더라도 강요하는 자에게는 재물을 주지 말라고 설한다. 보시는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법칙인 셈이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불교는 참으로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라는 사실이다. 부처님을 논리의 화신이라고 말할 정도로 불교 교리는 이성에 합치한다.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를 위해 사용해야 하고 못된 놈에게는 한 푼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얼마나 맞는 말인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교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보시 하는자, 받는 자가 이득되는 불교

부처님 당시에는 부자가 불교교단에 많은 돈을 보시하여 불교의 발전을 도왔기에 상업불교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오늘날도 부자의 보시로 사찰에서 불사가 많이 이루어진다. 보시할 때 보시 받은 사람의 재정만을 염두에 두면 안되고 보시 받는 사람과 보시하는 사람의 재정의 합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보시 받는 사람의 재정 극대화를 목표로 삼지 말고 보시 받는 사람과 보시하는 사람의 재정 합계를 극대화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어떤 기독교인이 교회에서 건물을 신축하는데 헌금을 많이 내라는 목사의 압력에 힘들다며 불교에서는 그런 고통이 없느냐고 물었다. 불교라고 다를 것은 없다. 스님이 불사를 하면 신도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기독교는 십일조라는 제도가 있어 소득의 10분의 1은 반드시 교회에 바쳐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있는데 반하여 불교는 그런 강제규정이 없다. 성경에는 분명 소득의 10분의 1을 바치라고 명시되어 있다. 다만 그때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십일조는 세금에 해당하므로 오늘날 정부에 세금을 내는 기독교인이 다시 교회에 소득의 10분의 1을 내면 이중 과세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 명시적으로 그런 설명이 없기에 목사가 소득의 10분의 1을 교회에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면 교인은 내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기독교보다 보시를 더 강조하는 종교이다. 경전을 보면 보시에 대한 내용이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설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를 내야 한다는 수리적 표현은 없다. 대승불교에 오면 보시를 더욱 강조하고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과다한 보시를 칭찬하는 구절이 경전에 있지만 초기 불교 경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보시에 대한 태도는 이와는 다르다.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불리우는 초기 불교 경전이야말로 부처님의 의중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문헌이다. 문헌학적으로 밝혀졌지만 대승불교 경전은 후기의 불교학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인 것처럼 저술한 경전이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부처님의 제자 아난의 말인 것처럼 경전이 시작되고 있지만 사실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이 아니라 후세의 탁월한 불교 수행자가 저술한 경전이다. 물론 대승불교 경전이 부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니 불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뜻에 맞게 확장 발전해온 측면도 있고 불교라는 것이 부처님 혼자 만들었다기보다 수천년 동안 수 많은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공동으로 만든 종교이기 때문이다.

〈사분율〉은 “어떤 집에 가기만 하면 언제나 밥과 여러 가지 공양거리를 주었으므로 그 집이 가난해졌다. 사람들이 ‘그 집이 먼저는 큰 부자이어서 재물이 많았는데 사문 석자들에게 공양하기 시작한 뒤로부터 재물이 다하여 빈궁함이 이와 같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문에게 공경 공양하면 도리어 빈궁함을 얻을 뿐이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이를 아시고 ‘너희들은 어찌하여 자주자주 거사의 집에 가서 음식 공양을 받아 그 집이 이처럼 가난하게 하였느냐’고 꾸짖으셨다. 그리고는 그 집에 가서 갈마(磨)를 하여 여러 비구들이 그 집에서는 밥을 받아 먹지 못하게 하고, 나중에 집의 재물이 다시 많아지면 갈마(磨)를 풀어 주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계신다.”고 설한다. 초기 불교 경전 곳곳에서 출가자가 재가자의 경제에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려는 부처님의 배려가 나타나 있다. 재가자의 보시에 의존하여 출가자의 경제생활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처님은 재가자와 출가자를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셨다. 만약 재가자의 생산력이 훼손되어 생산이 감소하면 출가자에게 가는 미래의 보시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출가자에 대한 보시는 재가자의 생산력이 증가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미래 보시도 증가한다.

보시받음도 중도 강조

음식도 지나치게 많이 받으면 안되지만 부처님은 고가품이나 사치품은 아예 받으면 안된다고 금지하셨다. 〈사분율〉은 “어떤 믿음이 있는 장인바치가 뼈, 상아, 뿔 같은 것으로 바늘 통을 만들어주었는데 그로 인해 가난해졌고 사람들이 ‘사문 석자에게 공양한 뒤로부터는 집이 가난해져서 먹을 것이 없게 되었다. 공양을 하는 까닭은 복덕을 바라는 것이었는데 도리어 재앙을 얻었구나’라고 비구들을 비난했다. … 부처님께서 ‘어찌하여 바늘 통을 만들게 하여 그의 재물을 다하게 하였느냐고 꾸짖으셨다.”고 설했다. 사치품이나 고가품은 소욕지족으로 살아가야 하는 출가자에게는 맞지 않기도 하지만 이러한 보시는 시주하는 신도를 가난하게 만들기 때문에 금지하는 측면도 있다. 뭐든지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출가자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을 보시하면 된다. 그렇다면 얼마를 보시해야 할까? 경전에는 이에 대해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증일아함경〉은 “자기의 소유에서 남는 것이 있으면 남에게 나누어 준다.”고 설하고 있다. 불자는 여유 있게 생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남는 것을 보시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경제력에 걸맞지 않게 거액의 보시를 한다면 비록 가상하기는 하지만 부처님이 생각하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경제공동체를 훼손하는 보시다. 사찰이 재가자의 경제생활을 도와가면서 보시를 받은 인도, 중국, 한국, 일본의 역사적 사례가 많다. 불교도 앞으로 과거의 불교경제공동체의 경험을 현대적으로 되살려서 재가자와 사찰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는 상생의 불교경제를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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