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다고 했지만 바로 미래도 여기 있다

 

부산지원에서 여러 불자님들과 더불어 큰스님들을 모시고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러 스님들께서 이렇게 호응을 해 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기 스님들을 뵙고 보니까 너무 기쁘고 황송하고, 또 노스님을 뵈오니 아버님 같기도 합니다. 하여튼 여러분과 더불어 불법을, 아니 불법이라기보다도 세상 이치를 서로 얘기하면서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이 정말 기쁩니다.

여러분한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교, 불(佛)이라는 그 자체가 무엇인가부터 말씀드려야 되겠습니다. 불이라는 것은 아주 의미가 깊습니다. 여러 가지로 표현이 되지만 전체를 싸고돌면서 모든 생명을 생산해 내는 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 불이라는 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며 교(敎)라는 것은 우리가 서로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돌아가는 이 자체, 말하고 통하는 자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단어가 어느 한 군데에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전체, 끝없는 진리를 표현하는 방편으로서 불교라고 한 것입니다.

옳은 게 하나도 없고 그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쓸모가 있고 크면 큰 대로 쓸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쓸모없는 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든 가톨릭교든 어느 교를 막론해 놓고 불교 아님이 하나도 없습니다. 풀 한 포기도 물 한 그릇도 흙 한 줌도 역시 모두가 그 생명의 근본이 불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종교든지 간판을 붙여 놓고 내 종교, 네 종교라고 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좁은 마음으로 항아리 속에서 진드기가 공에 매달려서 살듯이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고, 지구 바깥으로 벗어나서 우주로 마음을 돌려 보실 수 있다면 우리 불교가 개선이 되고 발전이 되고 개혁이 돼서 앞으로 성스럽게 부처님의 뜻을 그대로 행하고 실천하면서, 실천 또 실천, 그리고 또 실행을 하면서 우리는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다, 불교가 아니다’라고 얘기할 게 없죠.

그런데 미국에 가서 보니까 기독교나 가톨릭교나 티베트 불교, 일본 불교, 통일교, 모든 종교들이 나서서 ‘내 거다 네 거다’ 하고 싸우는데 너무도 기가 막혔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와서 부산의 여러 스님네들을 뵈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스님이라고 하기보다 부처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왜냐? 그것은 법랍이 높고 낮고 간에 그 마음 때문입니다. 서로 위해 주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받들고 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법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외국에 가니까 부처님들이 가르쳐 주신 그 법도는 다 어디 가고 수행자들이 서로 싸우고, 그것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한인회관을 서로 팔아먹고 서로 잡아먹히고, 서로 한마음으로 뭉치지 않아서 외국에서도 비난을 많이 받는 것을 봤습니다.

하여튼 그건 그렇게 놔두고…. 참, 스님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불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제가 지금 말은 체계적으로 못하지마는 그 뜻은 아마 조금도 틀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물이 없으면 못 살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에 부산에서는 그렇게 피해를 보고 그랬지만 물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의 감사함을 느끼고 또 흙의 감사함을 느끼고 바람으로 인해서 공기의 감사함을 느끼셔야 합니다. 불은 물론이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애당초에, 생명이 생기기 이전에 지금 현재의 지수화풍에 의해서, 흙과 물과 바람, 이 세 가지가 한데 합쳐서 바로 거기에 따뜻한 원기를 줌으로써 생명체가 생기고, 그 생명체가 생김으로써 바로 우리는 불이라는, 생명이 생기기 이전인 불이라는 그 자체의 불성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가 뭉쳐서 그 한 가지로 인해서 생명이 나온 것인데, (컵을 들어 보이시며) 이것도 역시 세 가지가 뭉쳐서 불에 구워졌기 때문에 이 컵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인간으로 진화됐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가 그렇게 한데 합쳐서 온 누리에 어떠한 거든지…, 혹성이 돼서 그것이 부딪치고 또 깨지고, 부딪치고 모이고 부딪치고 모이고 그러면서 수억겁이 흘러서 미생물의 문제들이 나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미생물이 수없이 흘러나오는데, 묘한 것은 그 미생물은 넷이 동업자가 돼서 같이했지만 네 종류로 나왔습니다. 태로 나고 알로 나고 화해서 나고 습(濕)에서 나고 이래서 네 가지로 화현을 했는데, 묘한 것이 있어요. 물의 성품은 물의 성품대로 물에서 살게 했고, 바람의 성품은 바람의 성품대로 날면서 살게 했고, 습에서 난 것은 습의 성질이 있기 때문에 바로 습에서, 이 땅에서 살게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아주 기묘한 것이 불입니다. 불의 성질! 그런데 불의 성질은 뜨거운 것뿐만 아니라 인간 생명의 근본, 세상에 나기 이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불 자체는 모든 것을 포괄하게 돼 있고, 모든 것을 같이 이끌어 돌아가는 한마음의 끝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누구의 생명이든 더하고 덜함이 없이 그 소중한, 바로 불이라는 보배가 우리에게 전부 주어졌다는 겁니다. 미생물에서부터 우리는 쫓고 쫓기면서 단계 단계를 밟아 진화되었습니다. 즉 말하자면 미생물의 단계 또 곤충의 단계, 동물의 단계, 즉 인간의 바로 밑에 있는 코끼리라든가 소나 말 같은 단계를 거쳐서 제일 마지막에 우리 인간이 됐다 합니다.

여러분이 먹히고 먹고, 쫓기고 쫓고 부딪침을 거듭하며 뼈아픈 그 세월을 지나오면서 진화돼서 인간까지 왔다 하더라도 인간 이 자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이름을 붙인 인간으로 세 번을 태어나 살아야 인간 됨됨이가 제대로 된다, 바로 부처님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짐승으로 살다가 금방 인간이 된 사람은 가끔 짐승의 짓을 잘해서 행동 자체가 거칠고 악한 문제들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생각을 돌려서 공한 자체를 알고 인간으로서 행해야겠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이 돌아가는 지금 이 시점의 공한 자체를 부처님께서는 바로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랬는데 아까 말했던 그 사생 자체가 얼마나 묘한지…, 물의 성질을 띠고 나왔기 때문에 물에서 살고, 또 흙에서 살고, 습한 흙에서 살고 또는 날아다니며 사는 사생들이 불성을 다 가졌지만 사람만이 좋고 나쁜 것을 알고 있는 인간이 되었단 말입니다. 나쁜 짓도 하겠지마는 좋고 나쁜 것은 다 압니다. 인간도 차원의 그릇이 있기 때문에 그렇겠죠.

그러나 여러분의 몸속에 있는 중생들은 바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잘 아는 게 아닙니다. 그건 왜냐하면 여러분이 과거에 인연 지은 대로, 악업 선업을 지은 대로 여러분의 몸속에 뭉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고덩어리라고 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속에 있는 그 자체 생명의 의식들은 스스로, 내가 잘못됐다 잘됐다 하는 걸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몸에 있는 자생중생을 제도하려면 여러분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이 바로 다스리며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안에서 나오는 것은 안에서 나오는 것대로 둘이 아닌 까닭에 바로 그 마음이 한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한마음에다가 놓고 다스려야 한다는 얘깁니다.

모든 마음들을 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옳다고 하시겠지만 그거는 여러분의 생각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입니다. 다 여러분의 생각이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게 하나도 없고 그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작으면 작은 대로 쓸모가 있고 크면 큰 대로 쓸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쓸모없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하찮은 허망함 속에 진짜 참자기가 있으며 참진실이 있고 실행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둘이 아닌 까닭에 한 사이가 없이 하고, 또는 하고도 한 사이가 없이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멋진 마음의 도리를, 스스로 고정됨이 없이 한 발 한 발 떼어 놓으면서도 짊어지지 않고 가는 그런 도리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지고 다니는 것처럼, 놓으면 죽는 것처럼 이렇게 여러분은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나오기 이전의 배낭을, 악업 선업이 들어 있는 마음의 배낭을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니 과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짊어지고 나왔으니 말입니다.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다고 했지만 바로 미래도 여기 있습니다. 정신계로부터 물질계로 나오니까 정신계와 물질계의 그 깊은 사연들은 삼합이 한데 합쳐져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도 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50% 정신세계를 추구하지 않고 부처님의 본뜻을 받지 않고 오직 그렇게 물질세계에서만 끄달리고 있습니다. 착, 욕심, 아만, 아상, 아집 이 모두를 한꺼번에 짊어진 채 거기서 나오는 대로, 배낭 속에서 나오는 대로 온통 성질을 내고, 별 거 아닌 거 가지고도 온통 싸우고 분통을 내고 또는 병고를 앓고 온통 야단들이죠. 왜 그럴까요? 그 수많은 악업 선업들이 나오기 때문인데, 그게 무엇인가? 영계성, 유전성, 세균성, 업보성, 인과성이 수없이 거기에 들어서 팥죽 솥에서 팥죽 방울이 끓어오르듯이 온통 나오는데, 그 방울 방울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마음 배낭 속에서 바로 여러분이 산 것만큼, 행한 것만큼, 바로 자기가 저지른 것만큼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바로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짊어지고 나왔고, 짊어지고 나왔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것을 어떻게, 누구의 탓을 하며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바로 이 세상에 내가 짊어지고 나온 탓이니까 말입니다.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세요. 바로 내가 이 세상에 나온 탓이고 그게 화두입니다. ‘내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도 직선적으로, 직결적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내가, 공한 이 자체가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게 하나요,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을 점프해서, 뛰어넘어서 그냥 ‘내가 이렇게 나왔다는 건 지수화풍을 바탕으로 해서 생명체가 생겼고 그래서 이렇게 진화돼서 나왔구나. 그랬으니까 그 나온 거는 나온 거로되 무조건 놓고 가야겠구나!’ 하는 거죠. 즉 ‘내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거하고 바로 맡겨 놓고 가는 거, 이 두 가지가 정신계의 지름길이 될 수 있으며 그런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 또 붙이고 또 붙인다면 그건 영원히 참자기의 그림자도 보지 못할 것이고 또 맛도 못 볼 것입니다. 그 맛을 알아도 남한테 일러 주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맛을 모르고 내 몸 하나 이끌어 가지 못한대서야 어찌 불자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정신세계로 치닫게 되는 교차로에 놓여 있는데 물질세계 50%만 가지고 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지금 천체물리학이니 과학이니 철학이니 지리학이니 천문학이니 하고 무수히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구를 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게 있죠. 그럼 요거부터 말씀드릴까요? 미국의 하버드대학 박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교수님들하고 전부 같이 모여 있을 때입니다. “스님! 지금 우리는 우주에서 전파를 통해서 외계인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해서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건 천부당만부당하다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무전전화를 내 마음속에서부터 놓아야 남한테 무전전화도 하고 무전전화도 받을 수 있지만 나를 떠나서는 그 통로가 막혀 있다. 모두 각자 나에게 통로가 있으니까 그 통로를 바로 틔워 주어서 물리가 터지고 모든 게 파악이 된다면 내가 두루 탐험할 것이고 볼 것이고, 두루 들을 것이고 찰나찰나 만날 것이고, 내가 결정지을 것이고 내가 안팎으로 통신하는 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라는 그 이름 없는 부처님 자체는 바로 진드기 발 하나도 내 발 아닌 게 없기 때문에 바로 평발이라 했고, 모든 손도 내 손 아님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바로 평손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 ‘어느 곳에 내 손 아님이 없고 내 손 없는 데가 없고 내가 없는 자리가 없다’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두 당신네들 마음속에 통로가 되어 있으니까 만약에 그 마음속의 통로를 안다면 벽도 봇장도 없어서, 자기 마음으로 창살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갇혀 있던 자기가 창살도 없다는 것을 알고 감옥에서 탁 틔어져 나오니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를 두루 볼 것이다.” 이랬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두루 보는 것도 도가 아니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는 것뿐만 아니라 듣는 것도 도가 아니니라. 즉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도 도가 아니라고 그랬는데, 마음의 귀로 듣는 것도 도가 아니라고 그랬어요. 또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온다,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한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라 그랬습니다.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님 여러분께 죄송합니다마는 제 의견으로는 그렇다 이겁니다. 제가 더 잘 알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제 의견에 그렇다는 얘기죠. 그리고 실생활 속에서 그것을 체험하고 실험하고 했더니 그렇더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과거 현재 미래까지 알아도 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과거를 다 안다고 하더라도 도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미거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 물그릇을 보고 있으면서도 만약에 이것을 갖다 먹을 수 없는 형편이라면 보나마나니까요. 가고 온다 하더라도 아무 실천이 없다면 가고 와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들어도 행하지 못하면, 진실된 행을 못한다면 한데로 떨어지고 그건 소용없는 거니까요. 과거를 안다 하더라도 아는 것만으로는 도가 아니죠. 그러나 과거를 알아서 현재의 그 다섯 가지를 굴리면서 모든 거를 실천하고 자비로써 한마음이 돼서 발전시키고 개혁해 나갈 수 있다면 바로 함이 없이 해 나가는 겁니다.

이 다섯 가지를 우리 지금 언어로 말하자면 숙명통은 컴퓨터, 타심통은 탐지기, 신족통은 팩시밀리, 천안통은 천체망원경, 천이통은 천체무전통신기인데 이 다섯 가지를 다 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거는 제가 하고 싶어서, 자랑 삼아 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한마디의 뜻이 열 가지, 백 가지의 뜻으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지금 누진통이라는 것이 뭘 뜻하는가? 지금 시쳇말로 레이더망이라고 해도 됩니다. 레이더망은 이 대기권에서 벗어나서 안에서 나오는 거,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 그것을 무전통신기로써 다 통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해야 할 문제를 결정합니다. 이것을 바로 우리 인간의 몸이라고 한다면 누진통으로 비유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다섯 가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조금 맛만 봤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전부 알았다.” 이런다면 벌써 그건 그른 거예요. 내가 부처를 이루겠다고 해도 그른 거고 안 이루겠다고 해도 그른 겁니다. 그대로 실천하면서 묵묵히 걸어가는 묵언! 묵언 행! 남의 탈을 잡고 원망하고 이러지 말고 모든 거를 내 탓으로 돌리며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거기에 맡겨 놓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한데 합쳐진 한마음의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 한마음으로 해결할 수 있기에, 이열치열이라는 그런 속담의 말도 있듯이, 모든 것은 거기에 맡겨 놓는 겁니다. 모든 것은 거기서 하는 것이니 나는 시자일 뿐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종이라고 합디다.

그러면 내 마음이 움죽거려서 이 몸을 움죽거리게 하는 거지, 몸이 마음을 끌고 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차를 타고 오신 분이 많겠죠. 운전수는 중간에서 차를 잘 이끌어 가지고 가면서 고장이 났으면 고쳐서 가고, 한데로 빠졌으면 다시 돌려서 빼 가지고 건져서 가고, 또 위로는 기름을 넣고 이렇게 하죠. 그것이 바로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 몸을 다스리면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 나오는 대로 다 제일이라고 하지 마시고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모든 것은 다, 좋은 거는 감사하게 놓고 나쁜 것은 ‘아하, 나쁜 것이 거기서 나온 거니까 좋은 것도 거기서 나올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놓고 이렇게 돌아갈 수 있다면 바로 어언간 밝은 자기를 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올 줄 믿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50% 물질세계에 물이 들어서 요만큼도 여유가 없이 남이 화나는 소리 하면 화를 벌컥 내고 안으로 굴릴 줄도 모릅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게 의학적으로도 지금 정신세계, 즉 말하자면 무심세계의 의학이 돼야 되는 거지 학술적인 이론의 의학이 돼서는 바로 30%, 35%밖에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나머지 65%는 누가 감당을 하느냐? 여러분이 그것을 감당하고 나가야죠. 말을 하다가도 이렇게 자꾸 샙니다. 딴 데로 나가거든요, 문이 하도 많아서요. 허허허…. 문이 많아서 문이 없고 문이 없어서 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문이 없어서 문이 없고 문이 없어서 문이 많습니다.

이러니 여러분이 그 뜻을, 우리 부처님의 골수의 뜻을 잘 아셔야 할 겁니다. 고깃덩어리를 믿을 수도 없고 이름을 믿을 수도 없고 형상을 믿을 수도 없고 허공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뼈저리게 마음이 아파도 도와주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듯이 아픈 것도 누가 대신 아파 줄 수도 없고 먹는 거, 똥 누는 거, 자는 거, 죽는 거 모두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대신해 줄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50%의 그 물질세계에 아주 그냥 배어서 조금도 용납이 없고 용서할 줄 모르고, 또는 남의 탓을 하고 남을 원망을 하고, 내 종교 네 종교만 따지고 이럽니다. 한 그릇 안에서 사는 다 같은 구더기가 더 잘났으면 얼마나 더 잘났겠습니까, 네? 그 항아리 속에서 벗어나려고는 안 하고 항아리 속에서 네 집 내 집 하고 들입다 싸우고 있으니…, 이런 소리가 나오게끔 되면 안 되죠.

여러분! 그냥 졸졸이 졸졸이 물질계에 붙어서 사니 여러분이 이 몸에 착을 둬 가지고, 내가 공해서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있다는 생각에 착이 꽉 들어차서, 아픈 것도 아픈 게 붙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아프다 뭐다 하니까 더 아플 수밖에 없죠. 왠 줄 아십니까? 몸속의 악업 선업들이 원수 갚으려고 나오기도 하고, 인연에 따라서 모든 걸 갚으려고 요거 나오고 조거 나오고, 때를 찾아서 잘 나오는 것을 아, 그것을 모르고 자꾸 속는단 말입니다. ‘그것도 그놈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것도 숙명통 컴퓨터에 입력이 돼 가지고 나오는 거니까 내가 요놈의 거를, 나오는 거를 컴퓨터에다 다시 입력을 해 넣어야겠다.’ 왜 요런 생각을 못하십니까? 그래서 컴퓨터에다 다시 입력을 해 놓으면 앞서 입력됐던 게 아주 없어지는 법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그 업보라는 게 어디 붙을 자리가 있습니까? 그것을 여러분이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구가 일 초에 몇 바퀴씩 돌아갑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그리고 또 부처님께서 “너희가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니라.” 하셨는데, 우리가 고정된 게 하나라도 있습니까? 여러분 이름은 많지만 그건 이름대로 이름일 뿐입니다. 아버지가 됐다가 금방 남편이 됐다가, 금방 자식이 됐다가 금방 형님이 됐다가, 아우가 됐다가 금방 사위가 됐다가 이렇게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금방 어떤 것이 됐을 때에 나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여자고 남자고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나라는 걸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데 여러분은 나라는 걸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냥 거기서, 팥죽 그릇에서 팥죽 끓듯, 팥죽 방울 나오듯 그냥 나오는 걸 가지고, 제 솥에서 팥죽 나오는 걸 가지고 꼭 조상 탓이나 하고, 딴 데서 무슨 세균이 붙어서 병에 걸렸다고 하고 또 딴 데서 마가 들어서, 가난이 들어서, 병고가 들려서 이렇다고 하시니 여러분은 참으로 나같이 어리석습니다. 허허허, 나같이….

나도 사실은 못나고 못나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무지렁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한테 이런 길을 걷게 했나?’ 하는 생각에 하늘을 쳐다보고 악을 쓰면서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마는 그럴 때마다 ‘사람의 콧구멍은 내리뚫렸는데 소 콧구멍은 치뚫렸기 때문에 먼지가 끼어서 막혔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뭘 그러느냐?’ 하는 말씀을 듣고는 뼈저린, 그 못난 생각을 다시 한번 돌려서 이렇게 생각했죠. ‘못났으면 못난 대로고 잘났으면 잘난 대로고 크면 큰 대로고 작으면 작은 대로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1년 9월 1일 부산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 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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