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리를 알고 보면 언덕 넘어갈 것도 넘어올 것도 없어!

 

자성이 어디에 있나요?

질문 스님께서는 항상 내 마음 안에 스스로의 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있으니 그 자성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저의 마음 안에 있다는 저의 성품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 생각으로만 알고 있기에 진짜 맡기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연적으로 있다는 자성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고, 어떻게 확고부동하게 믿을 수가 있을까요? 정말 내 안에 있다는 것이 확신이 선다면 진짜로 믿고 맡길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 저의 자성이 확실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지를 상세히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우리는 일면 생각하고 뛰면서, 뛰면서 생각하면서 집어먹고, 집어먹으면서 뛰고 이러는 세대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뜻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물질로써의 과학도 문화도 모든 게 발전이 돼서 우리 머리는 그때와 지금이 다릅니다. 그러니 오늘 요 대낮에 잠시 잠깐 빛이 비추는 걸 여러분이 아시죠. 어저께 밤에 또 주무셨죠. 매사 다 건건이 아시면서도 모른다고 하시겠습니까? 그 아시고 계신 그 자체가 자성(自性)입니다. 그래도 모르신다고 하시겠습니까? 불성이 어딨느냐고, 내놔 보라고 막 이러겠습니까?

관하시고 모든 걸 용광로에 넣듯이 거기다 놓으시면
바로 삼독이 무너지는 겁니다.
삼독이 무너지면 그대로 부처요, 그대로 법신이요, 그대로 화신입니다.

이 점에 뒷받침이 될 얘기가 있습니다. 예전에 오조 홍인 선사가 육조 스님이 행자일 때 삼경(三更)에 들라고 해서 금강경을 설하시니 그 끄트머리에 대답한 육조 스님의 말이 있습니다, 네 가지 종류. 여러분이 나보다도 아마 더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뜻이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뜻이 있습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함을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말의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래! “자성은 본래 생멸(生滅)이 없는 것을 어찌 알았으리까?” 그 ‘본래’가 참 중요합니다. “자성이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자성은 움죽거림이 없이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이겁니다.

아마 내가 틀렸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뜻은 똑같습니다. 예전에 들은 얘깁니다마는 그걸 듣고서 참, 여러분도 모두 감지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직껏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알고 있는 자성이 누군 줄을 모르신다면 어떡하겠습니까? 본래 스스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들이고 내는데 말입니다. 손색이 없고 여여하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죠. 잘못되고 잘된 걸 다 놔라 이랬습니다. ‘잘못되고 잘되고, 좋고 나쁜 걸 아는 거는 다 놔라.’ 잘못되는 것도 나오고 잘되는 것도 나오고, 잘하는 것도 나오고 못하는 것도 나오고, 높은 것도 나오고 얕은 것도 나오고, 일체 평등하게 거기에서, 그르고 옳은 게 다 거기서 나오니, 나오면은 바로 나오는 대로 재깍 자기가 알고 있단 말입니다, 또.

나오는 것도 알고 들이는 것도 알고 있단 말입니다, 자성이. 그 자성(自性)의 원력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다 싼다 해도 두루 할 수 있는 그런 광대무변한 자리다 이겁니다, 자성 자리가. 일체제불이 같이하고 있고, 일체제불이 있는 자리에는 일체 중생이 다 같이하고 있다 이 소립니다. 이 말을 20년, 30년 이렇게 되풀이하게 만들어야 합니까? 되풀이를 하되 그 되풀이하는 말이 끝이 없군요. 그 뜻을 아시란 말입니다, 뜻!

본래 청정하다. 자성은 본래 청정한 걸 알고 있는 거죠. 청정한 걸 알고 있는 그 자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고정됨이 없이, 청정한 거는 깨끗한 게 청정한 게 아니라 구정물, 더러운 물, 고름물, 핏물 다 한데 합치는 것이 청정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고정됨이 없이 한 찰나에 나투면서, 즉 윤회라고 해도 되죠. 반복하면서 제자리걸음 하면서 그저 찰나찰나 바꾸어 돌아간다. 이 사람 만났다, 저 사람 만났다 고정됨이 없어요. 만남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먹는 것도 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이 육체를 가지고 지금 살고 가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 그게 청정이라 한다. 그걸 거름 삼아서 내가 있는 것을 가지고 청정이라고 한다. 알고 있는 그 자체가 자성이다, 밝다, 지혜로워야 된다, 그 밝음을 깨닫는다. 이런 말을 나뿐만 아니라 수차에 거듭거듭 선조께서들 말씀하셨습니다. 사대 성인도 말을 했고요.

지금, 천장에 등이 있습니다. 등이 있는데 등대 자체가, 예전에 선조들께서도 많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등대라고. 지금은 등잔이 아니라 전구가 있어서 불이 들어오죠. 이런 것도 바로 저 등대를 내놓을 자리가 있어야 내놓죠, 그렇죠? 그래서 이 몸뚱이는 등대와 비유했고, 마음은 등불에 비유했고, 또 믿음은 심지를 비유했고…. 즉 말하자면 계행(戒行)은 기름으로 비유했고. 여러분 나보다 더 잘 아시죠. 지혜는 밝음을 말했습니다. 그렇게 등대가 없었더라면 등잔을 어찌 매달아 놓느냐? 그러면 이 등대 자체, 몸뚱이가 화두인 것입니다, 화두! 그대로 전구도 저렇게 걸어 놓아지고 그 속에 선도 있고 밝음도 있고 전력도 있고. 기름을 계행이라고 했으니 전력을 말한 거죠, 지금으로 비유한다면.

그런데 얘기를 하면은 말만 듣지 마시고, 다섯 가지고 네 가지고 한데 합쳐서 공존하고 있다 이겁니다. 공존하고 있어요. 따로따로 이름은 있으되 공존하고 있다. 눈과 귀가 따로따로 있고 이름도 따로따로 있으나 눈 간 데 귀가 가고 귀 간 데 눈이 속해 가더라. 또 무슨 시각이니 청각이니 감각이니 촉각이니 하는 말들도 말일 뿐이지 같이 혼합해서 동시에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척 보면 척 돌아가, 벌써.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남이 우는 걸 보면 ‘아, 슬프구나.’ 이렇게 척 돌아가니까 시각이다 감각이다 할 것도 없이 그냥 돌아가죠. 그 말은 벌써 뒤돌아가 버려요. 생각하고 난 뒤에 말은 돌아가니 그 말이 무슨 필요 있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또 말을 하자면 시각을 통해 거쳐서, 감각을 통해 거쳐서, 청각을 통해 거쳐서, 촉각을 통해 거쳐서 두각을 통해서 심장으로 깊이 들어서 불성으로 규합이 돼서 타파가 된다, 돌아간다, 회전이 된다, 발끝까지 회전이 된다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죠. 그것도 옳은 말입니다.

허나 우리 지금 공부하는 것은 우는 걸 봤으면 ‘어이구, 저거 왜 울까.’ 하다가 벌써 주위의 환경을 보면 슬퍼서 우는지, 기가 막혀서 우는지, 또 반가워서 우는지가 척 들어온단 말입니다, 벌써. 그렇게 척 들어와 알고 있는데 구태여 그 말이 무슨 필요 있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이런 공부를 하는 겁니다, 지금. 말을 하기 이전, 우리가 알고 있는 자체의 자성, 그 자성은 묘각이라고 할까요? 아주 묘해서 여러분이 그대로 지금…, 내가 항상 하는 말이 그거죠. “마음을 좋게 가져라. 생각을 좋게 해라. 꿈을 꿔서 언짢더라도 좋게 생각하고 놓으면은 그대로 회전이 돼서 보이지 않는 50%에서 보이는 50%로 나온다. 그대로 믿고 그렇게 해라.” 하는 것이 말하기 이전입니다.

그래서 내 말은 단 한마디라면 ‘당신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겁니다. 당신네들이 모두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간다는 그 자체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생멸도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알기 때문에 만법을 스스로 갖춰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스스로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내고 들이고 자유자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유자재하고 있는 그 자체를 알고 있느냐는 겁니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볕이 나고 지금 낮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진실한 마음으로서 우리가 진실하게 믿고 ‘자성불(自性佛)이란 바로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주인공이라고 그랬구나.’ 하는 것을 믿으세요, 좀. 믿고 모든 것을 거기다 맡겨 놓고 생각을 좋게 해라. 안 된다 하더라도 안 되는 게 어딨나? ‘안 되게 한 것도 거기서 한 거고 되게 하는 것도 거기서 한 건데 이번에는 되게 하겠지.’ 되게 하는 것도 안 되게 하는 것도 거기서 하는 거니깐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네? 되게 해 달라지 않아도. 그러니 더 잘 알고 있는 놈이, 자기가 지금 되고 싶어 하는 거를 자성이 알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 다시 돌아서 회전이 돼서 나온다 이겁니다.

그러니 ‘되게 해 주시오.’ 이럴 필요도 없죠, 알고 있으니까. 말로는 “난 그렇지 않아.” 이러면서도 속으로는 ‘아이, 고것 좀 가졌으면….’ 이러거든요. 허허허. “난 그렇지 않아.” 하면서도 ‘고거 잘생겼는데.’ 요러거든요. 그것이 바로 자성이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고놈이 있기 때문에,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자성이 알고 있죠. 그러니 ‘믿지 못하지.’ 하지 마시고 믿고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해서, 자주 이성계 얘기 했듯이 죽을 꿈을 꿨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어허, 죽는 것 사는 것이 따로 없는데 어찌 죽을 게 있노!’, ‘아, 좋은 일 생기겠구먼.’, ‘승진하겠구먼.’ 용도에 따라서 딱 생각을 해 버리는 겁니다. 그냥 밀어 던지세요.

그러니까 알고 있는 그 자성을 믿고 놓을 수 있고 생각을 잘해서 놓을 수 있다면, 회전이 돼서 50% 안 보이는 데서 50% 보이는 데로 나온다면 우리는 사람답고 흥겨웁게 삶의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얘기입니다.

본성 자리는 본래부터 청정하다는데…

질문 인간의 마음은, 본성 자리는 본래부터 청정하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마음을 닦아야 하는지요.

답변 그것이 닦아야 한다는 언어도 사실은 우매한 거죠. 닦아야 한다고 했는데 닦는 것이 뭡니까? 여러분이 모두 살고 또 죽고, 뒤집어졌다 바로 됐다 이렇게 하는데 뒤집어지고 바로 되는 것도 없어요. 우리가 그대로 생동력 있게 살아나가고 있고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지금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닦는다 하는 거는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용도에 따라서 닥쳐오는 대로 재료로 삼고 공부하시라는 겁니다. 닦는다고 해도 닦을 게 있어야 닦죠. 본래 닦을 것도 없고 먼지 앉을 것도 없고 옮겨 놓을 것도 없고 옮겨 놓지 않을 것도 없어요. 단 하나, 자기 마음으로 먼지를 붙여 놓고 떼려고 애를 쓰고, 구멍을 뚫어 놓고 메우려고 애를 쓰고, 마음으로 지어 놓고 마음으로 그렇게 받는 거죠.

그러니 마음으로 지은 것이 거죽으로 항상 나오게끔 돼 있거든요. 사람이 물질적으로 만든 컴퓨터는 모두 입력을 해서 쓰지만 우리 살아나가는 거는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요. 그래 “오신통이 바로 컴퓨터다.” 이렇게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니죠. 자동적인 컴퓨터! 이것이 자동적으로 입력되니까요. 행하고 말하고 살아나가는 그대로 그냥 입력이 돼요. 자동적으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자동적인 오신통이라는 그 자체가, 즉 자동적인 컴퓨터가 바로 여러분 각자 앞에 있는 거죠. 그래서 현실로 또 나오는 거거든요. 하여튼 지금 닦는다 안 닦는다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마시고요, ‘그냥 여여하게 그대로 살아나가는 게 그대로 그놈이 하는 거구나. 보고 듣고 들이고 내고 하는 것이 전부 그 한 놈이 하는 거로구나.’ 하고 믿고 생각을 잘하세요. 꿈을 잘못 꾸어도 ‘아이고, 이거 큰일 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마시고, ‘아, 꿈을 잘못 꾸었다.’ 이렇게 생각이 되더라도 ‘어, 이거는 꿈을 꾸게 하는 것도 너니까 꿈을 잘 꾸어서 지금 현실에 잘되게 하는 것도 너다.’ 이러고 쓱 돌려놓으란 말입니다. 그게 닦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선지식들처럼 될 수 있는지요

질문 일찍이 한암 선사께서는 “탐진치 삼독만 멀리하면 성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앉은 자리에서 바로 부처가 된다.” 하셨습니다. 달마 조사께서도 “진성(眞性)은 조금도 어두운 바 없이 항상 밝고 자재하건만 중생이 스스로 생사고(生死苦)를 짓고 자기가 받는다. 마음 가운데 망념만 여의면 본래가 부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암 스님이나 달마 조사와 같이 될 수가 있는지 가르침을 바라겠습니다.

답변 그거 걱정 없어요. ‘삼세, 삼심, 삼독’ 이런 것이 과거 미래로 인해서 현재, 그러니까 사람이 죽어도 이렇게 죽는 순간과 나올 수 있는 순간의 교차로가 있거든요. 그래서 과거 미래가 오늘이죠. 그러니까 ‘과거, 미래, 현재’ 이렇게 되면 바로 삼세가 되고 삼심이 되니까 삼심이 그 무명을 벗지 못하고 인과를 벗지 못하면 바로 삼독이 되는 거죠. 삼독은 바로 현실의 일심 속에 들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삼독을 어디서 빼내느냐? 그 모두, 지금 내가 작업하라는 대로 그렇게 관하시고 모든 걸 용광로에 넣듯이 거기다 놓으시면 바로 삼독이 무너지는 겁니다. 삼독이 무너지면 그대로 부처요, 그대로 법신이요, 그대로 화신이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앉은 자리에서 그렇게 되는 거죠.

우리가 소를 하나 건진다, 무명을 벗겨 준다 하더라도 그냥 소의 마음을 나와 둘이 아니게 딱 한데 합치면 두드러지지도 않습니다. 그거는 형체가 없는 거니까 두드러지지 않고 그냥 나로 돼 버리는 거죠. 나의 그 속을 거쳐서 바로 탄생이 된다 하면은요, 꺼내도 줄지도 않고 넣어도 두드러지지도 않는 격이죠, 체가 없는 거니까요. 이렇게 자세히 가르쳐 드려서 될까 모르겠네요. 허허허…. 그래서 그렇게 한다면 바로 나고 드는 것이 없죠. 나고 드는 게 없이 내 마음이 항상 물질세계와 정신세계가 합류화돼 가지고 돌아가는 게 사무 사유(四無四有)를 한데 합쳐서 중용을 한다는 격이 되죠.

그러니까 그대로 앉아서 소의 무명을 벗겨 줘도 아프지도 않고 그냥 금방 죽어요. 그리고 죽으면 껍데기가 없어지는 거죠. 무명이 벗겨지고, 그 영혼은 내가 돼 가지고 바로 환생을 시키는 거죠. 그러니까 그대로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니 그 즉시에 무명이 벗겨지는 거죠. 어떤 때는 지나가다가 도살장에 가는 소들을 보면 불쌍한 마음에 그냥 그렇게 해 줘요. 그러면 소의 머리를 방망이로 쳐도 아픈 걸 느끼지 않아요. 그러고 무명을 벗어요. 돼지든지 닭이든지 모두가 그래요. 그러니까 좋은 인연들을 맺으세요. 악한 인연을 맺지 말고 좋은 인연과 선덕을 쌓아서 바로 선의 씨로서 이 세상을 두루 한다면 내가 고달플 때 모두 같이해 주고 모두 같이 들어 줄 수 있고 이렇습니다.

마음에서 다 창조를 하나요?

질문 심성(心性)을 빼놓고는 과학을 이룰 수가 없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의 모든 것이 그 마음에서부터 나오고 마음에서 다 창조를 하나요?

답변 그렇죠. 마음이 떠나고는 절대 이거는 허용되지 못하니까요. 이 마음으로 인해서 보는 것도 보고, 동시에 보고 듣고 말하고 몸을 움죽거리고 이러죠. 근데 그 마음이 말입니다, 자유스럽게 살라고 그 많은 말들을, 그 많은 생각들을 다 자유롭게 줬는데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생각지 못하고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고 자유롭게 살지 못해요. 마음 빼놓고 뭐 있을까요? 허허허. 그래서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상세계, 지금 우리가 사는 데 중세계, 하세계 이렇게 삼 세계가 같이 돌아가고 있죠. 마음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차원이 높아지고 차원이 얕아지고 차원이 아주 저 밑으로 떨어지고요. 이렇게 해서 모습도 그렇게 나오죠, 그대로!

될 수 있으면 여러분도 각자 자유권을 얻기 위해서 누가 그거를 말해 주기 이전에 모두 알고 있어야 되겠죠? 누가 대신 잠을 자 주고, 누가 대신 먹어 주고, 누가 대신 똥을 눠 주고, 누가 아파 주고, 누가 죽어 주고, 누가 깨닫게 해 주느냐는 얘기예요. 자기만이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예전에도 정수의 자동적인 컴퓨터라고 얘기했죠? 그건 자기 차원에 따라서 입력이 되는 거니까요. 우리가 살면서 항상 “내가 산다. 내가 했다. 내가 만들었다. 내가 먹었다.” 이렇게 말씀들 하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내 몸뚱이 속에도 생명체들이 잔뜩 들어 있는데 어떻게 물을 먹었는데 내가 혼자 먹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더불어 같이 먹었죠. 그래서 이거를 먹으면 주는 거죠. 그런데 그 생명체들은 나에게 또 작용을 해 줘요. 그러니까 항상 더불어 에누리가 없어요. ‘내가 주면 받는다’ 이런 거죠.

그래서 항상 생각을 건전하게, 즉 말하자면 둥글게, 좀 밝게 이렇게 생각을 하면 그대로 입력이 된 거니까 그대로 현실로 나오는 거예요. ‘난 이거 할 수 없다. 나는 이거는 도저히 할 수 없다. 요거는 할 수 있는데 요거는 할 수 없다.’ 이런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해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못하죠. 여러분한테 자유스럽게, 마음도 말도 생각도 자유스럽게 줬는데도, 고등 인간으로서 자유스럽게 쓰라고 했는데도 자유스럽게 쓸 수가 없죠, 여러분은.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 뭐…. 그러니까 여러분의 몸은, 몸이 움죽거리는 건 한계가 있는 거고요, 내 이 정신계의 보이지 않는 자기는 무한이에요. 그래서 자기 주인공에 ‘진짜 너만이 이 몸을 푸르게 살게 할 수 있다. 너만이 이끌어 줄 수도 있고, 너만이 해결사가 돼 줄 수 있고, 아프면 의사도 돼 줄 수 있다.’ 하는 거를 오직, 자기 이 몸이 싹이라면 자기 뿌리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말을 하고 또 그게 맞고 그게 진리고 그게 사람 사는 본의라면 모두가 좋아요. 모두가 좋은 거예요. 인간하고만 통하는 게 아니에요. 날아다니는 새하고도 말을 할 수 있고, 꽃하고도 말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소를 건지는 데는 내가 소가 돼야, 내가 소 속으로 들어갈 줄 알아야 소를 건질 수 있다고요.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소로 태어났으니까 소의 고기는 사람들이 먹어서 약으로 쓰고, 소의 영혼은 건져서 인간으로 형성시킨다’ 이거죠. 갖은 각색으로 천차만별의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풀 수는 없고 한꺼번에 알 수는 없으니까 차차 아시도록 하세요.

세존유산범찰에 대하여

질문 『선리채근』에 나오는 ‘세존유산범찰(世尊遊山梵刹)’에 대하여 여쭙겠습니다. 한때 부처님이 사부대중을 거느리시고 어느 산을 지나가시다가 한 자리에 앉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여기가 좋은 명당이니 이곳에 큰 범찰을 하나 지으면 좋을 것 같다.” 하시니 제석천왕이 앞에 나타나서 풀 한 포기를 땅에 꽂고는 “범찰이 다 지어졌습니다.” 하니 부처님이 빙그레 웃으셨다고 합니다. 웃으신 뜻이 무엇인지 또 제석천왕은 무슨 뜻으로 땅에 풀 한 포기를 꽂았는지 가르침 주시길 바랍니다. 그 제석천왕의 법거량이 벽지불의 경지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경지인지, 저희들이 공부하는 데에 도움이 되게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부처님이 여기다 절을 짓겠다 한 것도 그놈이 한 것이고, 제석천왕이 풀 한 포기 꽂은 것도 그놈이요, 사찰을 지은 것도 바로 그놈이요, 웃은 것도 그놈입니다. 다른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벌써 이 풀 한 포기 딱 꽂을 때는…, 제석천왕이라는 것은, 비유를 하면 선생님 몸 안에 선생님이 많이 들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님이 제석천왕이 아닙니까? 혼자 사찰을 짓는 게 아니죠? 사과 하나를 잡숴도 혼자 먹지 않죠? 여러 명이 먹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석천왕이죠. 그러니까 모든 일체제불의 마음, 그 일체 중생의 마음이 한데 합쳐진 거를 제석천왕이라고 합니다. 천왕이거든요. 이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거를 말합니다. 그래서 풀 한 포기 딱 꽂았다 하는 건 생각을 딱 거기다가 집중했다 이거죠. 그러니까 한마음이 집중을 한 거죠. 한마음이 집중을 하니까 그 사찰이 그대로 지어졌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빙긋이 웃었다. 바로 그놈이 그놈이요, 그놈이 한 거니까 그냥 웃는 게 대답이죠, 뭐. 그러니까 혼자 웃은 게 아니죠, 또 그것도.

아, 여러분! 말이 났으니 말이지 지금 끄떡끄떡하는 것도 혼자 끄떡거리십니까? 하하하…. 아니, 혼자 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 먹는 것도 없고, 혼자 입는 것도 없고, 혼자 사는 것도 없고, 혼자 일하는 것도 없고, 혼자 사랑하는 것도 없고 전부 헤아릴 수 없는 자기가 그냥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자기가 그렇게 나투기 때문에 아버지로도 나투고 또 남편으로도 나투고 또 형으로도 나투고 아들로도 나투고 사위로도 나투고 이렇게 다양하게 나투는데 한 몸을 가지고 그렇게 여러 얼굴을 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부처님 얼굴을 한 몸에다가 수없이 해 놨죠. 손으로 천차만별의 일을 다 하죠. 손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거 할 때 내 손이 했다고 할 수 없으리만큼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안에 있는 나도 얼마나 많습니까? 수억겁 광년을 내려오면서 미생물에서부터 이 인간으로 화했다는 걸 알고 싶으면 내 속을 들여다봐라 이겁니다. 증명서가 바로 여러분 몸 안에 있으니까요. 그러니 우리가 그 도리를 넓히면서 알면서 이렇게 해야 어디 가든지 서슴없이 팍 쪼개서 맛을 보고 먹고, ‘아! 참 맛 좋고 시원하다.’ 이렇게 먹을 수 있고, 그렇게 먹고도 그 씨는 되남아서 이듬해 또 먹어요. 그러니 아주 영원토록 먹는 거죠. 이 도리가 얼마나 광대하고 묘하고 영원한지 모를 겁니다.

우리가 마음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요, 이 정신세계의 마음을 못 배우면요, 영혼이 죽어서 말입니다, 죽어서 아휴, 자기 몸체가 있는 줄 알아요. 옷을 벗었어도 벗은 걸로 알지 못한다니까요. 그래 가지고 물에 빠져 죽을까 봐 못 가고, 불에 타 죽을까 봐 못 가고, 또 귀신들 많고 짐승들이 많은 데는 잡아먹힐까 봐 못 가고, 이렇게 넘어서질 못하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했고, 부처님께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저 언덕을 넘어서야 하느니라.” 하셨는데, 이 도리를 알고 보면 언덕을 넘어갈 것도 넘어올 것도 없단 얘기죠. 그 도리를 알면 산 부처죠. 산 법신이고요. 가만히 있으면 산 부처고 생각을 냈다 하면 법신이고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이에요, 그냥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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