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비경선(慈悲鏡禪) - 2) 소리 무상 관찰하기

현대인들은 자연의 소리보다 인위적인 소리에 포위되어 산다. 소리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다. 그 소리에 느낌과 감정이 첨가되고 의미가 부여되고 다른 것과 결부되면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오고가게 된다. , 소리에 언어문자가 입혀지면 현실적 현상은 왜곡과 착각이 일어난다. 그 결과가 긍정적이면 다행이지만 부정적이면 대인관계에서 감정의 골이 패이고 단절하게 된다. 심하면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아파트의 층간소음으로 인한 칼부림 같은 현상 등이 그것이다.

인위적 소리 둘러싸인 현대인
소리로 인한 스트레스 늘어나
소리를 소유할 수 없음 알면
흔적 없는 텅 빔깨닫게 돼

언어문자는 대상을 고정시키고 분리시키고 실체를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게 한다. 예를 들어, 눈앞에 찻잔이 있다면 찻잔이 있다고 이야기하거나 그렇게 보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시각적으로 고정되어 있고 변화가 없어 보여도 매순간 무상하게 변하고 있다. 찻잔을 바닥에 던지면 부서지고 찻잔이라는 이름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과 다르게 착각과 왜곡되는 것은 찻잔이라는 언어문자와 관계가 있다. 이름으로 이루어진 찻잔은 던져도 깨어지지 않는다. 찻잔이라는 말과 찻잔이라는 사물은 별개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어문자는 단지 의사소통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언어문자가 인식대상이 되면 이름 있는 사물은 고정되고 분리되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인다. 분리 독립되어 보이는 것은 언어문자의 성격이 타자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가게에 싱싱한 사과가 있다고 하면 다른 가게에는 싱싱한 사과는 없다는 뜻이 된다. 싱싱함을 빼고 사과가 있다고 해도 다른 가게에는 사과가 없다는 뜻이 된다. 언어문자의 타자에 대한 부정은 인식대상이 변하는 데도 고정·독립되어 보이고, 상호 의존하는 데도 분리되어 보이고, 시간적으로 변하고 공간적으로 상호 의존한 데도 실체를 가지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언어문자를 인식대상으로 삼지 않으려면 소리에 감각과 감정과 생각을 덧붙이고 의미부여하는 언어문자화부터 멈추어야 한다. 언어문자와 내적인 언어인 생각이 인식대상이 되면서 일어나는 왜곡과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언어문자가 인식대상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소리의 무상부터 관찰하는 것이다. 궁극에는 능엄경에서 설하는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의 경계까지 가는 것이다.

소리 따라 청각의식 확장
소나무에 기대거나 앉아서 명상자세를 취한다(坐鏡禪).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어깨에 힘을 빼고 허리를 펴준다. 눈을 반쯤 감고 시선을 코끝에 둔다.

눈을 감고 새소리 등 여러 소리를 듣되 가까이 들리는 소리를 먼저 듣고 차츰 멀리 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의식이 먼 소리를 듣는 데까지 확장됨을 의식한다. 확장된 청각의식 그 상태로 가만히 머문다.

(알아차림에 의해서)전체를 듣고 있는 가운데 부분들도 함께 동시에 들린다.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마음 거울이 생김) 집중하는 모습에서 발전하면 소리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소리의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듣는 것은 청각의식의 확장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와 부분의 동시 들음이 대상과 하나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과 하나 됨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견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상과 하나 되는 합일은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이며,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은 대상의 좋고 나쁨을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심을 낳는다.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하므로 본래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대상과 하나 되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둘째, 대상과 하나 되기 위해 감정이입하는 것은 알아차림이 동반되지 않으면 대상에 영향을 받아서 자기 마음도 따라 흔들리게 된다. 셋째, 사물의 무상, 상호의존적 이치를 망각하기 때문에 무지하게 된다. 무지하면 탐욕과 분노가 일어난다. 그런데 의식이 확장되어 의식의 공간이 넓어지면 굳이 병의 원인을 찾아 없애지 않아도 불안 증세나 우울증 등 정신장애 현상이 완화된다.

소리의 무상 관찰해 깨어있기
가까운 곳[내 몸에서 나는 소리까지 포함]과 먼 곳의 소리를 동시에 들으면 의식이 확장되어 지금 이 순간에 멈추게 되고 깨어있게 된다. 깨어 있어 분별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면 좋은 소리, 나쁜 소리의 구분이 없어진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일상생활에서 듣는 것처럼 좋은 소리, 나쁜 소리를 습관적으로 구분하면서 분별한다.

가까운 소리, 먼 소리를 동시에 들음은 좋은 소리, 나쁜 소리 구분이 없어진다. 이것은 무분별에 의해서 일어난다.

소리의 무상을 관찰하면 좋은 소리, 나쁜 소리 모두 변함을 알면서 구분이 없어진다. 변함을 아는 지혜에 의해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소리의 무상에 실체가 없음을 알면 좋은 소리, 나쁜 소리 구분이 없어지고, 무상 속에서 모두 실체가 없음을 아는 깊은 지혜가 생긴다. , 소리의 무상함 속에서 자아 없음과 자성(自性) 없음을 아는 지혜가 생긴다. 그 지혜가 곧 자기마음임을 자각하고 그 마음에 집중해 들어가면 마음의 본성인 본래면목을 깨치게 된다. 이제 실천해보자.

머묾 없음에 머물기
나무에 의지하여 잘 들리는 소리 하나를 대상으로 하여 관찰한다. 소리를 잡을 수 있는지 머물게 할 수 있는지 시험 삼아 시도해본다. 만일 소리를 소유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면 소리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체험할 수 있다. 20여 초 시도한 후에 다시 과거의 소리는 지나가서 없음을 관찰하고 특히 소리가 되돌아오는지를 살펴본다. 미래의 소리는 오지 않아 없음을 살핀다. 과거의 소리도 없고, 미래의 소리도 없음을 알고, 현재 소리도 지나가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음을 살피고 소리의 머묾 없음에 머물러 본다. 머묾이 익숙해지면서 의식은 과거와 미래로 흐르지 않고 현재 순간에 깨어있게 된다.

이렇게 소리의 무상을 알아차리는 명상을 계속하게 되면 상대로부터 빈정거림을 받고 비난받거나 화난 소리를 들을 때 올라오는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러나 소리 속에 있는 감정이나 의도가 먼저 본인의 감정을 자극할 때 본인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이때는 소리의 무상을 알아차리는 명상의 힘이 소리의 무상을 알아차리게 한다.

이 명상의 힘은 누가 비난을 하거나 분노를 터뜨리는 소리에 들어있는 상대의 감정과 의도를 알아차리게 하고, 그 감정과 의도도 무상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소리와 감정과 의도가 무상이라는 이치를 이해하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현재 순간에 깨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스트레스를 차단하거나 줄일 수 있는 소리의 무상 관찰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 명상하고자하면 다음 단계를 이어 명상하면 된다.

마음의 텅 빔 체험하기
소리의 머묾 없음에 머무는 명상을 익숙하게 한다. 익숙해지면서 머묾 없음에 머물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익숙하게 되어갈 때 일상생활에서도 대상에 반응하는 감각, 감정, 생각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된다. 마음은 차분해지고 감정과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다음은 머묾 없음에 머물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한다. 이제 비로소 반문문자성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면 몸에 진동이 일어나거나 밖의 소리가 차단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집중이 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때 머묾 없음에 마음이 머물 때 소리의 흔적이 없는 텅 빔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본다. 이러한 현상이 생기면 마음의 본성에 들어가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본성이 무생불변임을 깨닫기
소리가 지나가면서 매 순간순간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흔적 없는 그 텅 빔을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을 때, 텅 빔을 알아차리는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면 밖의 모든 경계도 찾을 수 없고 마음의 모습도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한 덩어리가 된 마음이 심불견심(心不見心)의 시작이다. 주객이 한 덩어리 된 상태는 선가(禪家)에서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하고 경론에서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는 마음이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평정상태가 유지되는 선정이 일어나며, 선정 속에서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한 경안이 생긴다. 이 경안이 생기면 마음이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비 오고 난 뒤의 맑은 하늘과 같은 마음상태가 된다. 또한 한 덩어리의 마음에 자유롭게 머물기가 된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면 한 덩어리의 마음만 있는 그 마음에 집중하여 살펴볼 때 순간순간 마음은 사라지면서도 존속함을 알아차리게 된다. 마음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불연속의 연속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쯤 되면 마음이 죽지 않음을 이해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시 마음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 관찰한다. 과거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음을 알고 그 경계에 이르면 머묾 없음에 머물고 있는(有住) 마음도 무주(無住)가 되면서 마음의 본성이 무생무멸하여 공적하며 조작이 없는 본래면목임을 깨치게 된다. 이 공적한 마음이 번뇌망상을 만나면 번뇌망상을 없애는 힘으로 작용하며 이 공적한 마음을 마치 진금(眞金)을 단련하여 장식구를 만들 듯이 법신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숨 쉬지 않고 땀 흘리지 않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깨닫는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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