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령 스님 주석처, 초토화작전에 희생

1951년 사계리에 다시 창건된 수덕암은 이후 영산암으로 이름을 바꿨다. 사진은 현재 영산암 모습.

한라산 기슭을 관통하는 제1산록도로 인근의 광령 소재 수덕암(修德庵)은 1948년 4·3이 발발하며 1949년 2월 관음사가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던 시기에 함께 불태워졌다고 한다.

수덕암을 창건한 마용기 스님은 후손들 2대가 부처님의 법을 잇고 있지만 당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마용기 스님은 ‘법사’ 혹은 ‘산신령’ 등으로 불리는 등 제주도민들에게는 신화같은 존재다. 아마도 풍수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키가 육척이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는 이미지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용기 스님 창건한 수덕암 4.3당시 법당 전소
텃밭 있던 부인 토벌대에 총살… 스님 화 면해
훗날 수덕암 명맥 이어가고자 사계리에 재창건


마용기 스님의 아버지 마희문은 헌종 무신년(1848)에 전라도 강진 비자동 집에서 태어나 의술과 점술, 주력 등에 능통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무자년(1988) 봄에 정의현감에 임명돼 제주도로 들어온 마희문은 1904년에 사망했다. 이 자료는 한라산 민대가리 동산에 봉안된 마희문의 묘 비석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이 비석은 1944년 아들인 마용기 스님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민대가리 동산은 한라산 어리목코스로 등산을 하다가 만세동산을 지나 윗세오름 가기 직전 북쪽으로 보이는 오름으로 제주에서 손가락에 꼽는 명당 묘 자리다. 이는 산신의 기운을 받고자 했던 마용기 스님의 의지로 엿보인다. 의술과 점술, 주력 등을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마용기 스님은 이 같은 능력으로 지역주민들에게 ‘산신령’같은 존재였던 것으로 미뤄 짐작된다.

스님의 며느리에 따르면 “아버님은 영산암과 수덕밭(수덕암)은 물론 육지에도 자주 오가셨어요. 그래서 아버님의 옷에는 없는 게 없었어요. 쌀은 물론 솥단지, 숟가락, 바늘과 실까지 갖고 다니셨다”고 증언했다.

또 며느리는 “밥을 한 번 지으시면 많이 했는데 밥의 양이 적으면 아예 숟가락을 뜨지 않으셨죠. 그렇게 드시면 3일 동안은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셨다”고 설명하며 “특히 산신기도를 잘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면서 “산이 병을 내고, 병을 보듬는데 산은 뭇 중생의 모체”라고 산신기도를 강조했다.
 

마용기 스님.

마용기 스님은 1912년 제주시 회천동 화천사 전신인 ‘만덕사(萬德寺)’를 창건한다. 화천사 창건 당시의 상황은 1973년 봄 화천사 주지 김운공 스님이 세운 ‘화천사 창건기’에 잘 드러나 있다.

“서기 1912년 임자년 봄에 마용기가 사찰을 창건하여 김보관·송재술·현갑생 스님 등이 여러 해 동안 온 힘을 다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오고가는 사람들마다 안타까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중략)”

화천사 창건기에서 보듯 마용기 스님이 만덕사를 창건한 후 후임 스님에게 사찰을 이양하고 한라산 기슭을 관통하는 제1산록도로 인근의 광령에 수덕암(修德庵)을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마용기 스님은 화천사에서 떠나 왜, 머나먼 한라산 기슭에 와서 수덕암을 창건했을까. 앞에서도 밝혔듯이 마용기 스님은 잃어버린 소와 말을 찾아주는 능력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마용기 스님의 아들인 故 마성공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제주시 광령리 산 173-1번지에 수덕암을 창건, 30평가량의 초가 법당을 짓고 15평의 요사채 등을 갖췄다고 한다.

하지만 1948년 4·3이 발발하며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한다. 그 당시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텃밭을 가꾸던 마용기 스님의 부인은 토벌대에 의해 총살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마용기 스님은 소개령이 내려지자 한라산 아흔아홉골의 천왕사와 영실의 존자암, 법정사 등을 고려하다가 지금의 안덕면 산방산으로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마용기 스님은 수덕암의 명맥을 잇고자 1951년 안덕면 사계리 산 15-2번지에 수덕암을 창건하고 이후에 사명을 영산암으로 개명한다.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 4·3- 수덕암

가장 악랄했던 초토화작전
중산간 마을과 수덕암 불타

 

마용기 스님이 조각한 석상.

수덕암은 제주4.3사건으로 잃어버린 사찰이다. 애월읍 광령리 산 173-1번지에 있었다. 지금의 한밝저수지 서쪽 산록서로에 있다. 인근에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던 곳이다. 마용기 스님이 창건하였다. 제주4.3 당시 수덕사는 30평 가량의 초가로 지은 법당과 15평의 객실 등이 있었다. 불상은 3자 크기의 석가모니불을 모셨으며, 각단 탱화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법당은 타버렸고 객실이 타다 남아있었으나 그 후 마용기 스님이 돌아가실 때 다시 불타버렸다. 지금은 폐사인 채로 다시 복원되지 않았다.

수덕암이 토벌대에 의해 불질러졌다. 마용기 스님은 피신해 있었고, 부인 김 씨가 토벌대에 총살당하였다. 절을 지킨다고 소개하지 않고 있다가 희생되었다. 불상은 피신시켜 두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수덕암이 소각된 것은 초토화작전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가가 드문 곳에 있던 수덕사의 위치로 보면 소개령에 의해 소개할 처지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가가 없는 위치이므로 소개령이 전달되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있다. 김 씨가 절을 지키다가 희생되었고 절을 불지르는 등을 보면 초토화작전 시기에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초토화작전 시기 토벌대는 사람이 보이기만 해도 무차별 공격을 가하였다고 한다.

초토화작전은 이승만 정부가 제주4.3사건을 조기 진압하기 위해 전개한 강경 진압 작전이었다. 소개령을 내리고 중산간 마을을 불태웠고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내려보냈다. 주민을 해변 마을에 모아놓고 주민감시 체제를 구축해 놓아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취지였다.

당시 이범석 국무총리의 국회 보고에 따르면, 제주도민은 ‘폭도의 정신적 가담자’라는 전제 아래 연대 책임식 주민감시를 위해 해변마을에 모아놓고 마을 밖으로는 성을 쌓아 주민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소개령이 전달되지 않은 마을도 있었고, 전달되지 않았어도 토벌대는 무차별 방화와 총격을 가하였다.

초토화작전은 제주4.3사건 전개 과정 중 가장 비극적이고 많은 피해를 남겼다. 1948년 11월부터의 초토화작전으로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한금순(제주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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