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전 상서] 17. 우활과 성활의 편지

안국암 종정 우활이 초의에게 보낸 서간(사진 왼쪽)과 표충사 총섭을 지낸 성활이 보낸 공문서(사진 오른쪽). 모두 표충사 주지 직을 놓고 갈등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닭벼슬보다 못한 중벼슬’을 놓고 벌이는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했었던 것 같다.

시대마다 다르지만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1840년경 대흥사에서는 총섭첩 문제로 갈등이 있었던 듯하다. 1840년 3월 17일에 안국암 종정 우활(宇, 생몰연대 미상)이 초의에게 보낸 편지와 이 해 7월에 도내 승통 성활(性)이 초의에게 보낸 공문서는 바로 이 분쟁이 무엇 때문에 야기된 것이며 그 결말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 하겠다.

표충사 주지 임명 문제로 다툼
“예조 보고, 지난 내용과 달라”
우활, 서간으로 초의 문제 제기

성활 편지엔 우활과는 입장 차
“처리말고 이관해 달라” 요구
예나 지금이나 권력 놓고 갈등

초의와 우활의 분쟁은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 우활의 편지는 그 실마리를 풀어줄 단서일터다. 우활은 어떤 승려일까. 그의 생애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략 1840년경 안국암에 거처했던 승려로, 직위는 종정이었다. 당시 초의도 대둔사·표충사의 원장(院長)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활의 편지 겉봉에 ‘대둔사 원장사주 예좌하 입납(大芚寺院長師主 猊座下入納) 안국암 종정 우활 근후장(安國庵宗正 宇 謹候狀)’이라고 쓴 것에서 드러난다.

편지의 크기는 대략 가로, 세로 26.6×45.2cm이다. 단아한 서체는 그의 품성을 짐작하게 한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꽃향기가 두루 향기롭습니다. 서울에서 정사를 겸한 이래로 문후를 살피지 못했습니다. 뜻밖에도 복되고 길하시며 무(茂) 스님이 온 이래로 더욱 좋다고 하시다니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실로 깊을 따름입니다. 저(우활)는 관문과 길 사이에 겨우 후미지고 막힌 곳에 머물고 있는데 무엇을 번거롭게 말씀드리겠습니까. 벼슬길에 나감은 위태로움이 많아 근심의 파고가 더욱 높아서 산에 사는 사람에게 시비가 전파되지만 입으로 기약했기에 매번 마음이 불편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예조(禮曹)관청에 나가보니 즉, 본사 원장 스님에 보고한 것입니다만 지난번 예조에 보고한 후, 간사(幹事) 스님이 망기(望記)에 개인적으로 고쳐 첩을 내기 때문에 간사한 상황은 잘못된 보고이며 망기(望記)도 거짓된 것이라 조치할 수가 없습니다. 원안대로 고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받은 첩문을 바로 보내겠다고 하니 즉, 세상에 어찌 이런 놀랠만한 일이 있습니까. 일이 결과적으로 이와 같다면 그 책임자를 바꾸어 하나라도 논란될 단서를 없애야합니다. 사람을 낭패케 하는 것이 하나일지라도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면 나의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존사께서 이 사실을 조사하여 (그 상황을)들어야 합니다. 본사 간사(幹事) 스님이 간여한 것이 사실이라면 곧 이곳으로 인장함(印章函)을 환수해 보내시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입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엎드려 존사께서 살펴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삼가 답장을 올립니다. 1840년 3월  17일 소승 우활(小僧 宇闊)이 삼가 올립니다.
 
月許花香轉馥 未審伊來攝京政氣體候 乃福乃祥 由來茂衲增吉 慕仰良深耳 宇 間關道路 僅棲僻隔 幸何煩喩 就控祿路多險 患波層出 使巖穴餘生轉播是非 口期每用耿耿 不意卽接禮曹關內 則所謂本祠院長僧報招內 向時望報之後 幹使僧就望記中 私改換以出帖 奸狀僞望 不可仍置 原望修呈次 此處所受帖文 卽地上送云云 則世豈有如此駭然之事乎 事果如是 則其於替換任席 一無論端 使人狼狽 一至於此 我之心 尊聽査其事實 其實本祠幹使 卽地發送此處 印函還收 負去企望耳 餘在去口 不備 伏惟尊照 謹候狀 庚子 三月 十七日 小僧 宇 謹再拜

위 내용에서 우활이 예조(禮曹)에 나갔더니 원장인 초의가 보낸 보고서의 내용이 지난번 내용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가 예조에서 파악한 내용은 “지난번 예조에 보고한 후, 간사(幹事) 스님이 망기(望記)에 개인적으로 고쳐 첩을 내기 때문에 간사한 상황은 잘못된 보고이며 망기(望記)도 거짓된 것이라 조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망기(望記)는 바로 삼망(三望)을 적은 단자, 즉 조선 시대 공정한 인사행정을 위해 3배 수로 추천했던 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쟁점의 핵심은 바로 간사가 자기 임의대로 망기를 고쳐 예조에 올렸던 내용을 파악한 후, 초의에게 이것을 바로잡으라는 요구였던 셈이다.

당시 우활은 안국암에 머물렀다. 아마도 안국암은 한양에 위치한 암자로, 종정이란 승직(僧職)을 수행하는 이가 머문 암자가 아닐까 여겨진다. 조선이 건국된 후 폐지되었던 승려의 관직은 조선 후기에 공식적으로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암암리에 승직을 수행했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우활의 편지는 표충사 원장의 임명과 관련하여 초의 측 간사가 임의로 망기를 수정한 것을 발단으로 분쟁이 일어난 셈이다. 따라서 우활의 편지는 초의에게 그 경위를 조사, 처리해 달라는 것이 주된 골자였음을 드러낸다.

다음에 소개할 문서는 일종의 공문서류이다. 도선암(道詵菴)의 성활(性闊)이 1840년 7월 17일 초의에게 보낸 문서이다. 당시 성활은 도내승통(道內僧統)이었기 때문에 초의와 우활 간에 쟁점이 된 총섭첩과 관련된 사안을 바로 처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우활이 주장한 내용의 잘못과 초의가 처리한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여 바로 잡으라는 공문서를 보낸 셈이다.
조선 후기에 “승통은 한 도(道)를 규정하고 원장은 팔도를 총섭, 규정하는 것인데”라고 하는 사실에서 승통과 원장의 승직 처리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이 공문서에는 “이거늘(是去乙), 이고(是遣), ~할 일(向事)” 등 이두 표기가 눈에 띄는데, 공문에 흔히 보이는 용례라 하겠다. 초의에게 보낸 공문서를 살펴보면 크기는 32.6×92.4cm이다.

도선암 본원에 머무는 소승 성활 삼가 올립니다.
초의 사 주 대법좌하 입납
표충사수호겸팔도선교양종승풍규정도원장(表忠祠守護兼八道禪敎兩宗僧風糾正都院長)께서 상고한 일입니다. 우활(宇)이 총섭첩문(摠攝帖文)을 잃어버린 것은 모두 줄 것을 바라고 간사함을 일으켜 생긴 잘못인데 이미 상부 관청(上司)에서 처리하셨다면 다시 여러 말을 할 것이 없거늘 구 원장이 새로 총섭을 맡으면서 일일이 부당한 상황을 상정하였으니 모든 일이 슬프고 놀랄 일입니다. 자신이 규정(糾正)에 있으면서 처음에 상부를 범한 잘못을 잡지 못하고 안이하게 무고를 받아들여서 영문(營門)에 전보한 것이 무슨 사사로운 뜻이 있겠습니까마는 이것이 첫 번째 잘못입니다. 승통은 한 도를 규정하고 원장은 팔도를 총섭, 규정하는 것인데 스스로 일일이 논하여 보고하였으니 이것이 그 두 번째 잘못입니다. 영문에 제기해 보낸 것은 뜻에 맡길 뿐이라고 하신다면 그 간사한 승려로 하여금 문서를 이관하게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일일이 행관(行關, 비슷한 관서 이하로 보내는 공문) 한 것은 무엇인지요. 세 번째 잘못을 범했는데도 승도에게 내려 보낸다면 어찌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理)와 사(事)에는 분별이 있고 상하에는 나누어짐이 있습니다. 즉 팔도에 다섯 가지 규정을 공론함이 있다면 이로써 다 알 수 있으니 마땅하게 지난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항에 합치되도록 이관(移關)하시길 청합니다. 살펴보고 시행하길 바랍니다. 관문이 잘 도착하길 바랍니다. 도내 승통 도광 20년(1840) 7월 17일.  관 원장 도장 날인

道詵菴  本院留 小僧 性濶 謹上候書  謹封
艸衣 師主 大法座下 入納
表忠祠守護兼八道禪敎兩宗僧風糾正都院長爲相考事 宇失其摠攝帖文 都由授望作奸之過失 而旣爲上司之所處 則更無餘言是去乙 舊院長新摠攝 擧名呈狀於不當呈處 萬萬痛駭是遣 身在糾正 而初不執犯上之過是遣 恬受誣訴 轉報營門 有何私情乎 此其一失也 僧統一道之糾正 院長摠攝八道之糾正 恣意擧名論報 此其二失也 營題起送之意知委云爾 則使其幹事僧 文移知委 可也 擧名行關 何也 犯者三失 而以下僧徒 何以糾正乎 理事有別 上下有分 則將有八道五糾正之公論 以此知悉 宜當向事 合行移關 請
照驗施行 須至關者
右    關
道內僧統
道光二十年 七月 十七日 
關 院長 (押)

성활이 보낸 공문서에는 초의와 우활 사이에서 일어났던 분쟁의 쟁점이 드러난다. 그가 파악한 잘못은 첫째는 “우활(宇)이 총섭첩문(摠攝帖文)을 잃어버린 것은 모두 줄 것을 바라고 간사함을 일으켜 생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초의는 “이미 상부 관청(上司)에서 처리하셨다면 다시 여러 말을 할 것이 없거늘 구 원장이 새로 총섭을 맡으면서 일일이 부당한 상황을 상정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불상사였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구 원장은 초의를 말한다.

두 번째에는 “자신이 규정(糾正)에 있으면서 처음에 상부를 범한 잘못을 잡지 못하고 안이하게 무고를 받아들여서 영문(營門)에 전보한 것이 무슨 사사로운 뜻이 있겠습니까마는 이것이 첫 번째 잘못입니다. 승통은 한 도(道)를 규정하고 원장은 팔도(八道)를 총섭, 규정하는 것인데 스스로 일일이 논하여 보고하였”다는 점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잘못은 “영문에 제기해 보낸 것은 뜻에 맡길 뿐이라고 하신다면 그 간사한 승려로 하여금 문서를 이관하게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일일이 행관(行關, 비슷한 관서 이하로 보내는 공문)한 것은 무엇인지요”라고 반문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안은 초의가 처리하려 하지 말고 이관해 달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활의 편지와 성활이 초의에게 보낸 공문서는 대둔사, 표충사 원장 임명에 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드러내고 있으며 표충사 원장 임명과 관련하여 상당한 분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해 보이는 자료이지만 1840년경 대둔사에서 일어났던 분쟁 요인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성활(性闊)은 조선 후기의 승려로, 쌍월(雙月)이라는 호를 썼다. 표충사와 수충사의 총섭(摠攝)을 지냈다. 학식과 지행(知行)이 깊었고 두타행(頭陀行)을 즐겼으며, 1852년(철종 3)에 〈유마경(維摩經)〉 3권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1권, 〈아미타경〉 1권을 판각하였다. 제자로는 철경(鐵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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