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 놓고 침착하게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 진짜 참선

 

사회자 큰스님께서 2개월이 넘게 해외 포교를 위하여 북·남미를 두루 순회하시고 지난 29일 귀국하셨습니다. 피로와 여독이 채 가시지 않으셨을 줄 압니다만 저희들을 위하여 법문을 해 주시겠습니다. 경청하여 주십시오.

큰스님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니까 서울에서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지극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극하게 자기가 온 자리와 갈 자리, 또 지금 하고 있는 자리, 이것을 아시려고 노력하시는 데 대해서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에는 ‘죽으면 무슨 천당에 가느니 승천을 하느니’ 이런 따위의 이론이나 잡담에 지나지 않는 말들을 하면서 인생을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전부 앉아 계십니다. 뜨겁게 감사를 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그렇게 마음 내 주신 덕분에 그저 사흘들이로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안 되었고, 심지어는 목욕하러 가서까지 설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습니다. 두 달째 목욕을 못 해서 목욕탕이 있다고 해서 갔는데, 목욕하러 온 사람들이 법석을 마련해 가지고는 거기서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었습니다.

그래서 한 석 달 예정을 잡았었습니다. 두 달에 끝마치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죠. 11군데를 다니다 보니까, 그리고 나라가 그렇게 크니까요. 15시간 타는 데도 있고 뭐, 6시간 타는 데, 7시간 타는 데, 또 3시간도 탈 때도 있고 2시간도 타고 이렇게 해서 그저 사흘들이로 비행기를 타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한마음으로 염려해 주신 덕분에 그래도 이 몸을 지탱하면서 조금도 어떠한 내색이 없이 내내 그저 정진해 나갔습니다. 허허허…. 그래 여기 오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 이치가 복잡다단하다 할지라도 한 시간의 꿈입니다.
한 시간의 꿈! 한 시간의 꿈을 훌떡 벗어나면
세세생생에 끝 간 데 없이 그냥 그대로 불바퀴 속에서도 벗어나는 것입니다.

나가서 다니다 보니까 기독교든 가톨릭교든 원불교든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내 종교만 좋다고 야단들 하고 남의 종교는 짓밟아서 뭉개 버리려고 하는 그런 의도가 많이 노출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교’ 하면 미신 소굴인 줄 알아요. 모두가 미신 소굴로 생각하고 아주 무시하고 있어요. 심지어는 스님네들까지 내쫓고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하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지금 한마음으로 공부하듯이 ‘어느 종교든 한 뿌리 속에 있다’고 얘기했죠. 한 지구에 붙어 사는 한 동물로서, 자기의 관념으로만 ‘내 종교가 옳다’고 졸렬하게 울타리를 치고 있는 것이지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역설을 했더니 모두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찬성을 해 줬습니다. 기독교든 가톨릭교든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찬탄을 해 줬습니다. 이렇게 마음속에 감응이 되게 했고, 눈을 새삼스럽게 뜨게 했고, 귀를 새삼스럽게 열게 했다고 말입니다. 불교에 이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 줄은 정말 미처 몰랐노라고, 정말 죄송하다고 하면서 깊은 감사의 뜻을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우리 제자들은 “아이, 속 시원하다.” 그러더군요. 허허허….

우리가 생각해 보면 필수적으로 이것을 믿고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세상만사가 돼 있고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참나’인 자신의 뜻을 항시 중시하고, 항시 그 뿌리를 믿으십시오. 거기에다 거름과 물을 줘서 그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가지와 잎새가 아주 싱싱하게 자라서 제 나무에서 열매가 무르익는다면 그 맛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미리 따서 그런 거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뿌리가 썩어 들어가면 나무가 무성하질 않아서 열매도 맺지 못하는 반면에, 열매를 맺는다 하더라도 익지 못해서 그냥 말라 버리는 형상이니까 맛이 날 수가 없죠. 그와 같이 우리 마음공부도 역시 그러합니다. 한 치도 에누리가 없는 공부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에게 무슨 판결을 내려서 1년, 2년 또는 3년, 5년, 10년 이렇게 법에 의해서 죄를 묻는 게 아니라, 이건 자동적으로 요만한 거 하나도 에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요? 그렇게 바쁘게 휘몰아치고 그러니까 그 지원 자체 내에서도 정신이 없어합니다. 회장이고 부회장이고 총무고 뭐, 거기 신도들도 그렇고 스님네들도 그렇고 아주 정신이 없어합니다, 너무 바쁘게 돌아치니까요. 그래서 저기서 설법을 하고서, 비행기를 금방 타고 와서 또 여기서 설법을 하고, 그렇게 바쁘게 다니니까 저녁나절에는 피곤함이 좀 옵디다. 그래서 바람을 쐬려고 스님들하고 모두 산책을 하다 너무나 기가 막힌 장면을 본 겁니다. 항상 알고 있고, 항상 하고 있고, 뜻으로도 항상 그렇건만 말입니다. 흑인이, 허허허, 새카만 흑인이 새카만 어린애를 데리고 가는데 새카만 초콜릿을 손에 쥐여서 이렇게 물리고 가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그냥 웃음이 터지는 겁니다. ‘야! 이 세상에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구나!’ 하하하…. ‘이게 모두 철칙 같은 법이고 조금도 에누리가 없구나! 흑인이 백인 낳는 거 봤나?’ 하면서, 속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딴 사람이 모르거나 안 본다고 해서, 자기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을 못 해 보고 갑니다, 그렇게 에누리가 없건만. 요 조그마한 데서부터 끝까지, 끝에서부터 또 끝까지 돌아가면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사실을 너무나…. 그걸 새삼스럽게 본 건 아닌데 말입니다. 너무나 기가 막혀서 혼자 껄껄껄껄 웃었습니다. 그러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허허허…. 그러고는 궁둥이를 탁탁 털고 일어서서 오면서 얘네들더러 그 얘기를 하니까 모두 우습다고 웃고들 들어갔습니다마는, 그걸 생각을 하면 ‘이 세상만사, 삼천대천세계, 우주 전체가 그렇게 그러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얘기도 하고 그러지마는, 여러분은 천당 지옥이라는 것을, 천당이라니까 천당인 거고 지옥이라니까 지옥인가 보다 이렇게들 그냥 멋들어지게, 아주 유유히 그렇게 생각하고 갑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에누리 없는 우리의 인생살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게, 한마디로 아주 쉽게 말을 해서 독사같이 살면 독사의 모습으로 나올 것이고, 소같이 살면 소 모습으로 나올 것이고, 사람같이 살면 사람으로 나올 것이고, 개같이 살면 개로 나올 것이고…. 하하하….

그런데 오간지옥이니 칼산지옥이니 또는 독사지옥이니, 이 모든 지옥 지옥의 이름도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옥이다’ 하면은 짐작으로만 그냥 ‘지옥인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죠. 그런데 우리가 사람의 마음으로 살다가, 땅속에서 기어 다니는 벌레의 모습 속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지옥이죠? 그래서 독사같이 살았으면 자동적으로 땅속으로 다니는 독사 소굴에, 독사의 암컷 수컷이 행하는 거기다가 그 영령이 집어넣어져서 그냥 독사의 모습으로 나온단 말입니다. 그런데 독사가 그냥 독사로 살아왔으면 별문제인데, 사람으로 살던 의식이 독사로 들어가서 독사의 모습을 가지고 나와서 독사로 산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처럼, 개같이 살았으면 개로 살듯이 어떠한 한 몫어치만 살게 되어 있죠. 그런데 ‘오간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하는 말은 전부 헌 갓쟁이 모양으로 다니며 그저 악한 일을 일삼는 사람들은 땅속 깊이 뚫고 다니는 이런 것들 소굴에다 그냥 넣어진다고 하는 말입니다. 넣어진다면 땅속으로 기어 다니는 벌레가 될 테니까 그 의식이 어떻겠습니까? 지옥이죠? 그 조그만 데로 들어갔으니까. 지옥인데다가, 그것이 진화돼서 또 인간까지 벗어나려면 얼마만큼 헤매야 된다는 얘깁니까? 그런데 이거를 조금도 생각을 안 하는 거죠.

그래서 “공덕을 쌓아라, 공덕을 쌓아라. 좋은 일 하고, 좋은 생각 하고, 좋은 행동 해라.” 이렇게 부처님께서도 항상 말씀하셨고, 사대 성인들도 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데다가 여기에서는 한술 더 떠서,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악한 일을 하는 것도 다 놔라.” 이랬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쁜 일이 또 거기 끼어들게 마련이니까 나쁜 일도 놓고 좋은 일도 놔라.”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공부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점에서 그런가? 나쁜 일, 좋은 일을 막론하고, 그 생사윤회 속에서 완전히 해탈해서 벗어나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한 철 좋은 일을 해서 그 선덕으로 인해서 좋게 이 세상에 다시 나와서 산다 하더라도 그게 해가 가고 시간이 지나면 또 나쁜 일도 하게 되니까, 또 짓게 되니까 아예 ‘생사윤회 속에서 그냥 벗어나라’ 이런 뜻에서 부처님도 말씀하셨고 또 지금 나도 길잡이로서 이렇게 길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한 철 요렇게, 한 생을 요렇게 살아가는 시간이 길지 않다고 하더라도, 여러 해를 다니면서 공부했다거나 짧은 시간에 내가 공부했다거나 이런 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 해를 공부해도 ‘정(定)’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뭐, 10년 20년이 가도 소용없고, 소용없는 건 아니지마는 더디다 이거죠. 그런데 몇 달 안 됐어도, 몇 해가 안 됐어도 정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더디고 빠르고가 없다는 얘깁니다. 오래 배웠고 늦게 배웠고 이것이 없다 이 소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마음 안에, 마음이라는 것이 이름이지, ‘이름 없는 마음’ 여기에는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습니다. 이것도 이름해서 방편으로 부르는 겁니다. 항상 얘기해 드리지만,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어서 거기에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연방 그냥 자동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좋은 일을 하려고 생각을 해도 어처구니없이 나쁜 일로 돌아가게끔 자꾸 만듭니다, 그렇게 업보가 입력이 돼 있어서. 지금 현실에서 아무리 착하게 행을 잘하려고, 말도 잘하려고 하지만 앞서 입력됐던 거 때문에 자꾸 그렇게 빗나갑니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빗나가든 빗나가지 않든 ‘무조건 거기다가 맡겨 놓는다’ 이겁니다. 무조건 맡겨 놓는다! 믿지 못하면 맡겨 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믿고 거기다 맡겨 놓는다면, 쉴 사이 없이 입력이 돼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데다가 자동적으로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그 어마어마하게 입력됐던 팔자 운명이 그냥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입니다.

항상 해 오는 말이지만, 저에게는 절절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아주 지극하게, 눈물이 뼈에 사무쳐 나오리만큼 안타깝습니다. 어찌 그렇게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를 믿지 못할까? 어찌 그렇게 과거로부터, 수억겁 광년 전으로부터 자기를 끌고 온 장본인을 믿질 못할까? 이 모습으로 저 모습으로 이렇게 진화를 시켜 가면서 자기가 한 대로, 자기가 한 것대로 끌고 다닌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죠. 주인공 원망할 수도 없지. 주인공이 그렇게 하라고 그랬나? 아, 태양이 ‘너 잘못하고, 너 잘하고’ 이런 거 말했나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서 잘못돼서 행을 잘못하거나, 마음을 잘못 쓰거나 이런 것이 속으로부터 자꾸 나오면 그것을 ‘이러면 안 돼.’ 하고 거기다가 그냥 맡겨 놓는 거죠. 맡겨 놓고 침착하게 지켜보고 체험하는 것이 진짜 참선입니다.

나는 어떤 땐 차를 타고 가다가도 슬그머니 이 속에서 눈물이 복받칩니다. 여러분을 생각만 하면 그렇습니다. ‘저 사람은 남인데, 자기가 아닌데도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겠지만, 우리가 수없이 변질돼서 돌아갈 때, 이것이 됐다가 저것이 됐다가, 이 부모가 됐다가 저 자식이 됐다가, 이렇게 사생(四生)의 모든 천차만별의 생명이 뒤바꿔지면서 돌아갔을 때는 어떤 것이 내 자식이고 어떤 것이 내 부모인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렁이도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습디다. 뭐, 풍뎅이도 그렇고 가재도 그렇고 물고기도 그렇고, 어떤 거를 막론해 놓고 다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어요. 남녀가 있고요. 그런데 그 남녀가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잘 산다 하더라도 연방 변질이 되고 연방 바뀌어서 돌아가니까 어느 때 어떻게…. 그 행복도 잠시 잠깐이죠, 알고 본다면. 그러니 그 돌아가는 수레바퀴 속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얘깁니다.

항상 말씀드리는 거지만,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사십구 년을 설하시면서도 “나는 생각해 본 예도 없고, 한 예도 없고, 나도 없고….” 그렇다고 하셨을까요. 알고 보니까, 생각해 보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거든요. 지렁이 소굴에서는 지렁이가 높고 호랑이 소굴에서는 호랑이가 높고. 안 그렇습니까? 저마다 다 높은 거예요. 저마다 다 높고, 저마다 다 나 아님이 없으니, 자기 아님이 없으니, 자기 아픔 아님이 없고 이러니, 따로이 “내가 너희들을 가르쳤다.” 이럴 수가 있나요? 이럴 수가 없죠. “내가 마음을 내서 너희들에게 길을 인도했다.” 이럴 수도 없고, “내가 너희들을 건져 줬다.” 이럴 수도 없죠. 안 그렇습니까?

항상 여러분한테 이런 걸로 표현해서 얘기해 드리죠? 줄과 줄, 전깃줄과 전깃줄, 전자와 전자라고요. 이것이 있기 때문에 불이 들어올 수 있다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나한테 접근을 해서 모습은 다르지만 간절한 마음이 여기 와 닿을 때, 나도 간절한 마음이 함축이 돼서 가서 부딪치면 불만 번쩍 일어났지, 이 줄이 했다고 할 수도 없고 저 줄이 했다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세히 얘기를 해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부처라’ 이럴 수도 없고 ‘내가 가르쳤다’ 이럴 수도 없어요, 네? 저쪽 놈도 있으니까. 상대성 원리로서의 이쪽 놈과 저쪽 놈이 합쳐지지 않는다면 에너지가 나올 수가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했다, 네가 했다’ 그런 것이 아예 없는 반면에 ‘불만이 덩그마니, 밝게 광명이 이루어졌다’ 이 소리만 나올 수 있죠. 부처님이든 중생이든 하여간에 모두가, 99%는 부처니까. 중생을 끼고 다녀서 걱정이지. 그러니까 ‘모두가 한마음의 불이다, 한마음의 광명이다’ 이럴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무슨 육근(六根)이 어쩌니 육진(六塵)이 어쩌니 육식(六識)이 어쩌니 십팔계(十八界)가 어떠니, 이러한 문제를 들고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마음과 마음이 와짝 붙으면 불이 들어올 뿐이죠.

그래서 여러분이 이 공부를 잘하신다면 “컴컴하면 불을 켜면 되고” 이 소리가 나옵니다. 왜 컴컴하게 삽니까? 컴컴하면 불을 켜서 밝게 살고, 배가 고프면 먹고, 소화시켜서 똥 누고 싶으면 시원하게 똥 누고, 편안하게 잠자고 싶으면 잠자라 이겁니다. 이것이 그냥 그대로 이렇게…. 이것을 말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 이치가 복잡다단하다 할지라도 한 시간의 꿈입니다. 한 시간의 꿈! 한 시간의 꿈을 훌떡 벗어나면 세세생생에 끝 간 데 없이 그냥 그대로 불바퀴 속에서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뭐가 되느냐?” 이러겠죠? “그럼, 그렇게 벗어나면 뭐가 되느냐?” 하고 또 따지겠죠? 따지기 좋아하는 분들은 따집니다. 그러나 벗어나면 벗어나는 거지 뭐가 그렇게 탓이 많고 이유가 많습니까?

우리가 영화배우들이라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소임을 맡아서 주어진 역들을 합니다. 그렇게 소임 소임, 자기 잘하는 대로 소임을 맡아서 이 세상에 나오는데, 작은 거든지 큰 거든지 다, 남한테서 받아 가지고 나올 생각을 하지 말고 감독이 되라 이거죠. 즉 말하자면, 옥황상제도 벗어나야 됩니다. 하하하…. 부처라는 것도 벗어나야 부처입니다. 이 태양과 이 산하대지는 그대로 어머니이자 아버지죠. 그런데 우리의 마음과 마음이 서로 광명을 이루고 창조를 하고, 창조력을 기르고 이럭하는 것도 바로 인연에 따라서 모두 돌아가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천지도 둘이 아니죠. 어떻게 천지가 둘이겠습니까?

L.A.에서도 길을 지나가다 보니까, 그러니까 왜 이런 말이 있죠?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허허허…. 나이도 많이 든 백인이 말입니다, 리어카에다가 깡통, 병 이런 것만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가고 있어요. 뛰는데 다리가 아프고 지치니까 허덕허덕하면서 그걸 끌고 가요. 가다가 언덕에 이르니까 그냥 허덕허덕합디다. 그걸 보는 순간, ‘참, 세상에도 모두가 자기가 한 대로 저렇게 소임을 맡아 가지고 나왔구나!’ 개미가 왜 개미가 된 줄 아십니까? 그 백인이 소임 맡아 가지고 나온 거나 개미들이 소임 맡아 가지고 나온 거나 뭐가 다릅니까?

소를 한 마리를 잡아서 버리면, 호랑이는 양쪽 팔다리를 모두 떼어서 먹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여러 짐승들이 오는데 창자 먹는 놈이 있고 살 뜯어 먹는 놈이 있습니다. 그런 뒤에는 뼈에 살 붙은 걸 떼어 먹는 새들이 있습니다. 아주 차례차례로 그렇게 소임을 다 맡아 가지고 그렇게 뜯어 먹고 뼈다귀만 남으면 그 때는 개미 차례입니다. 그 뼈다귀 속에 들어 있는 거를 다 먹거든요. 그래 그 백인이 그럭하고 가는 거를 볼 때 개미 생각이 퍼뜩 나는 겁니다. ‘아유, 저 사람 개미 좀 봐!’ 하고요. 사람의 모습은 가졌지만, 그런 것을 얼마나 과거에 즐겼으면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사람 개미로서 저렇게 소임을 맡았어야 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렵다, 망했다 이런 것도 남의 탓 할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빨리 수습을 하는 길은 ‘내 탓이야.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연에 따라서 모두 얽히고 얽혀서 입력이 돼서 이 세상에 지금 나오고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너 알아서 해라. 너만이 그 얽힌 거를 풀 수 있고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거기다 맡기는 그 작업을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작업이란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면서 지켜보는 관법(觀法), 즉 ‘관해 봐라, 지켜봐라’ 이거죠. 지켜보면서 마음으로 다스려 가면서 체험하는 것이 아주 제일 빠른 방법입니다, 지금. 그렇게 한다면 빨리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이 다 그렇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냥 급하게 닥치면 아예 잊어버려요. 잊어버리곤 방방 뛰어요, 그냥. 나온 자리에다 다시 놔야 할 텐데, 내보낸 자리에다 도로 놓고, 내보낸 놈더러 해결을 하라고 그래야 빨리 수습이 되는데, 엉뚱하게 딴 데다가 그냥 전부 깔아 놓고는 온통 팔팔 뛰니까 이건 더 더딜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한참 돌다가 생각이 나면 그때서야 놓으니 이미 차 지나간 자리 아닙니까? 하하하…. 우리 이왕지사 이 자리에 앉았으니 질문도 하세요.

사회자 큰스님께서 잠깐 말씀이 계실 줄 알았는데 오늘 상당히 긴 시간을 하셨습니다. 그동안의 여독과 피로가 풀리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큰스님 재밌지 않아요?

사회자 오늘 질문은 생략하겠습니다.

큰스님 왜요? 아, 청년 법우들도 있고 그런데 뭐….

사회자 다음 기회에 듣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감명 깊은 법문 감사히 들었습니다.

큰스님 하하하…. 이런 강제성이 어딨어요?

이거 보세요! 내가 아르헨티나로 15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가야 했는데, 그날 L.A.에서 아주 피곤했어요. (대중 스님들을 보시며) 어디서 왔지? 아, 콜로라도에서. 콜로라도에서도 또 한참입니다, 거기가. 콜로라도에서 바로 와 가지고 설법을 하고 이러다 보니까 너무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턱 드러누웠더니 애들이 영 가질 못하게 했습니다. 가질 못하게 하니까 아, 요게 꾀가 조금 납디다.

그래서 ‘아이, 이거 쟤들도 그만두라는데 나도 좀 그만 쉬어 볼까?’ 이러고 있는데 아, “뜨르르” 전화가 오는 겁니다, 아르헨티나지원 스님한테서. 전화로 “스님이 오실 줄 알고 다 그냥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안 오신다면 어떡합니까? 난 어떡합니까? 난 어떻게 하라고 그러십니까?” 하고 아, 엉엉 우는 겁니다. 그 순간 말입니다, 그 순간, 피로하고 뭐고, 어떤 것도, 하늘이 그냥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그냥 와짝 제끼고선 일어나지는 기분이에요. ‘가야지!’ 아, 그러니까 일어나집디다. 그런 거 뭐, 아랑곳없어요. 이 세상이 다 가로막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가로막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듯이 좀 열정 있게 해 보십시오. 그러고선 나한테 “아이고, 피로하시니까, 피로하시니까 그냥 쉬십시오.” 이러는데 아니, 전쟁에 나갔던 사람이 뒤로 돌아선다고 죽지 않나요? 전쟁에 나갔으면 그냥 전진하는 겁니다. 이래 죽어도 한세상, 저래 죽어도 한세상이에요. 하하하…. 그렇게 좀 더 빠릿빠릿하고 결사적으로, ‘내가 이 길을 걷지 않는다면 세세생생에 끄달릴 거다. 그리고 내가 위로 부모의 빚을 갚아서 건질 수도 없고, 아래로 뿌려 놓은 자식들의 모든 업보도 해결할 수가 없다.’ 하고 결사적으로 해 보십시오.

사회자 감명 깊은 법문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2년 8월 2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 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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