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서 사라진 명품 佛畵들

경북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한 의성군은 안동, 상주, 구미, 예천과 접한 지역으로, 한국불교사에 중심 지역이라 사찰이나 사지(寺址)가 많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불가(佛家)의 경전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강원(講院)과 율사(律師)를 양성하는 전문교육기관 율원(律院)을 갖춘 대표적인 사찰로는 고운사를 들 수 있다. 고운사는 1913년 2월 사찰령(寺刹令)에 의하여 고운사 본말사법(本末寺法)이 시행된 후, 현재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경북 지역의 신행과 포교의 중심도량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운사의 창건과 연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는 1937년에 강유문이 편찬한 <경북오본사고금기요(慶北五本山古今紀要)>이다. 이 문헌에 의하면 고운사는 681년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고운사(高雲寺)라 한 후, 최치원(崔致遠)이 여지(如智)·여사(如事)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한 것을 기념하여 최치원의 자(字)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도선(道詵)이 약사여래석불과 석탑을 안치하고, 948년에 운주(雲住)가 중창하였으며 1018년 천우(天祐)가 대웅전과 약사전 등을 중창하였다.

의상대사 창건한 의성 대표 사찰
1970년대 이후 성보 도난 이어져
현재 아미타회불도 등 5점만 신고
문화재 전문털이범 소행으로 추정


1482년에 석가불을 안동 갈라산(葛羅山) 낙타사(駱駝寺)에서 옮겨 대웅전에 봉안하고, 1668년에 극성(克成)과 승묵(勝默) 등이 가운루를 중수하였으며, 처순(處淳)이 천왕문(天王門)을, 설행(雪行)이 봉황문을 신축하였다. 1670년 숭해(崇海)와 묘선(妙善) 등이 명부전을 신축하고 시왕상(十王像)을 조성하였으며, 종헌(宗憲)과 설휘(雪輝)는 영각(影閣)을 짓고 스님의 진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다. 1681년에 천왕문을 중수하고, 1683년에 관헌(灌憲)과 인잠(印岑) 등이 팔상전(八相殿)을 신축하였다. 1695년에 도청(道淸)과 선조(禪照)가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을 봉안하여 이전의 관음상과 함께 삼존불상을 구비하였다.

1724년에 법존(法存)과 지훈(智勳) 등이 운수암(雲水庵)을 창건하고, 1729년에 신유한(申維翰)이 사적비를 세웠다. 1803년 4월에 적묵당과 서별실이 화재로 불타 없어지자 1804년 2월 문찰(文察)이 중건하고, 1812년에 의암이 운수암을 중건하였다.

이후 대웅전과 금당을 중건한 후, 1906년에 경북 일부의 사찰에 대한 관리를 종무원(宗務院)에서 부여받고, 1912년에 30본산(本山)의 하나가 되었으며, 1913년 2월 사찰령(寺刹令)에 의하여 고운사 본말사법(本末寺法)이 시행되면서 교구본사로 많은 말사를 거느리게 된다.

고운사에 소장되었던 재산대장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조선총독부 관보본이 남아있다. 20세기 전반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 의하면 본사에 소장된 성보물은 219건 1,085점이다. 이 중에 불상 37점, 불화 69점(아미타불 등 50점, 진영 19점)이나 되어 조선 후기 조성된 성보문화재가 20세기 전반까지 잘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사찰에 소장되어 있던 문화재들은 유출이나 도난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사찰에서 도난문화재로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조계종 총무원에 신고된 성보문화재(〈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 2016년 간행)는 사십이수관음보살도(1989.01.13. 도난), 아미타불회도 2점(1994.10.04.과 1997.09.02. 도난), 지장보살도(1994.10.04. 도난), 신중도(1992.01.03. 도난)밖에 없다.

(사진 왼쪽부터) 도난된 의성 고운사 아미타불회도1와 아미타불회도2, 지장시왕도. 전문털이범의 소행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1994년 10월에 도난된 아미타불회도와 지장보살도는 당일 연합뉴스에 “의성 고운사 탱화 2점 도난, (義城=聯合) 4일 오전 1시 30분부터 3시 사이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고운사 내 극락전에 걸려있던 탱화 2점이 도난당했다고 고운사 측이 경찰에 신고했다. 주지 김주석 씨(50)에 따르면 이날 오전 1시30분께 숙소에서 잠을 잔 뒤 3시께 아침 예불을 위해 극락전에 와 보니 벽에 걸려있던 탱화 2점이 없어졌다는 것. 도난된 탱화는 고려시대 때 제작된 세로2.4m 가로2.4m 크기 1점과 조선시대 때의 세로2.2m 가로2.8m 짜리 등 2점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으나 문화적 가치가 상당하다고 고운사 측은 주장했다. 경찰은 문화재 전문절도범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라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 이 기록을 참조해보면 도난 시점이 4일 새벽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 불화들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재산대장을 통해 20세기 전반 고운사에 아미타불도는 6점, 지장보살도 4점, 관음보살도는 1점, 신장도는 5점이 소장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찰에서 유출된 사천왕도 중에 광목천과 다문천은 홍익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내세에의 염원 … 한국의 불교미술> 2013년). 기존 문화재청에 신고된 도난 불화의 규격은 관음도가 세로 210㎝ 가로 240㎝, 신장도는 세로 170㎝ 가로 100㎝이다.

1994년 10월 4일에 각각 도난당한 아미타불회도는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부처님 아미타불을 중앙에 두고 그 좌우로 협시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한 형식을 취했다. 원권형의 두광과 신광을 두르고 있는 아미타삼존불좌상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오른손을 가슴 위로 들어 올려서 엄지와 셋째손가락을 마주한 구품인(九品印)을 결하고 있는 아미타불 위쪽 좌우로 가섭과 아난존자를 배치하였다.

1997년 9월 2일에 잃어버린 아미타불회도는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극락세계를 표현했는데, 대좌 위에 앉아있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역시 협시보살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두고 제 보살들을 4명씩 2단으로 배열한 형식을 취하였다. 화면의 윗부분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비롯하여 호법신의 역할을 하는 사천왕을 그려넣었다.

지장보살도는 1994년 10월 4일에 아미타불회도와 같이 도난당한 불화로, 명부전의 주존인 지장보살상 후불도로 조성된 것이다. 역시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지장보살과 함께 협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바로 옆에 그리고 육도중생의 고뇌를 구원하는 용수보살 등 육대보살을 층층으로 단차를 두어 지장보살을 수호하며 에워싸듯이 대칭적으로 배치하였다. 화면의 맨 위에는 지장보살을 보좌하는 동자와 천녀 그리고 장군을 작은 크기로 대칭적으로 그려 넣었다. 지장보살상 후불도로 그려져 봉안된 지장보살도의 지장보살은 민머리 승형을 취하고 있으며, 손에 보주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후기 불화 가운데 가장 특이한 사십이수관음보살도(1989.1.13. 도난)는 중생의 삶에 가장 친근하다고 할 수 있는 관세음보살을 그린 불화이다.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 몸에 천수천안이 생겨나게 하라는 서원을 세워 천수천안(千手千眼)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 천수천안관음신앙의 영향으로 그려진 불화이다. 42개의 손바닥에는 눈이 그려져 있고, 손에 금강저, 보주, 연꽃, 정병 등 각기 다른 지물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고운사 관음도는 독특하게도 관세음보살을 중앙에 크게 그리고 가슴좌우로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을 배치하고 있다. 보관에는 화불이 물론 표현되어 있다. 붉은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매우 화려한 채색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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